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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 남신도와 바람직한 남신도 지도자

관리자 2010-07-17 (토) 11:09 13년전 2860  
 

2008 년 10 월 8 일 (토) 오후 6 시 30 분 / 대구 동촌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남신도회 대구연합회, 대구장로회 강의


성경본문 : 마태복음 13 장 13 절 

제    목 : 교회 안에서 남신도와 바람직한 남신도 지도자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이 오늘 여기 모인 대구노회장로회 회원님들과 대구장로회 회장님과 대구노회 남신도회원님들과 존경하는 신동욱 노회장님, 동촌교회 이수열 목사님과 당회원 장로님들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대구하면 잘 압니다. 대구시 만촌동에서 2 년 반 일하였습니다. 2 군 사령부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하였고 동시에 무열대 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부장으로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케이블 접속병으로서 대구 시내 동촌에 와서도 전화선로를 깔고 전화기를 고치러 다녔는데 그때 경험한 대구 사람들은 참으로 친절하였습니다. 특별히 대구 여자들이 하는 말의 어투가 그런데예! 하는 것이 무척 정감이 들어 내가 만일 결혼을 하면 대구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는데 대구 여자와는 못하고 경상북도 의성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아기자기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인사말 중에 하나가 “당신멋져!”입니다. 은 당당하게 살자! 은 신나게 살자! 은 멋지게 살자! 는 져주면서 살자!입니다. 여기 모여 있는 분들이 장로님들이고 남신도회이니 거개가 남자들입니다만 우리 남자들이 져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장로님들은 성도들에게 지면서 살고 남신도들은 여신도들에게 져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힘 있는 자가 져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지만 힘 있다고 해서 마구 이겨버리면 참으로 비참합니다. 교회의 평화도 서로 져주면서 살 때 이루어 집니다. “져주면서”에서 “져”를 빼면 “주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누어 주면서 베풀어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주시면서 사셨습니다.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말씀을 주시고 살을 주시고 피를 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고 또 주시면서 사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을 보니까 모두가 멋지신 분들입니다. 이 시간 인사하실 때 앞 사람과 옆 사람 그리고 뒷사람과 인사하면서 “당신멋져!”로 인사합시다.


오늘 성경본문은 마태복음 13 장 33 절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33 절에는 많은 개념들이 들어 있습니다. 1. 비유 2. 천국 3. 가루 서 말 4. 누룩입니다. 하나하나씩 보겠습니다. 1.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말할 때는 거의 비유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란 헬라어 원어로는 “파라볼레”인데 이는 “나란히 던져 놓고 비교해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천국은 어떻게 이거다 저거다 말할 수 없고 단지 그 비슷한 것을 비유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그 무엇을 통해서 비교함으로써 천국의 실체를 단지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2. 천국입니다. 여기서 천국은 하늘의 천국이 아니라 땅에 이루어지는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주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다면 그 땅은 땅이지만 천국이 됩니다. 찬송가 중에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곳은 그곳이 하늘이 되었던 땅이 되었든 내 맘속이 되었던 바로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3. “가루 서 말”입니다. 가루 서 말은 보리 가루인지 밀가루인지 쌀가루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루 서 말인데 이 가루 서 말이 상징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아직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의 어떤 사람의 모임이나 사람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밀가루 서 말은 한 가정을 상징할 수 있고 한 공동체 즉 교회나 일터이거나 아니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사는 우리나라이거나 온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 그것이 비록 가정이라는 적은 세상일 수도 있고 온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5. 누룩입니다. 누룩이란 효모로서 비록 조그마한 것이지만 그것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 변화의 촉매입니다. 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비교해 보면 그 양에 있어서나 그 크기에 있어서 엄청나게 적은 양이지만 그 누룩은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존재는 없어지면서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는데 그저 물리적 변화가 아닌 화학적 변화를 일으킵니다. 누룩이 들어갔을 때 누룩은 아주 조용하게 소리를 내지 않고 누룩 바로 옆에 있는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만약 누룩이 10 그램이 들어갔는데 매 1 분마다 자기 몸무게만큼 변화시켜 나갔다고 하고 변화된 만큼 그 양이 변화의 매체가 되어 변화시켜 나간다고 가정하면 1 분에 10 그램을 변화시키면 2 분이 되면 20 그램을 변화시킵니다. 3 분이 되면 40 그램 4 분이 되면 80 그램 5 분이 되면 160 그램 6 분이 되면 320 그램 그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데 어느새 밀가루 반죽 전체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누룩은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키고 난 다음에 자신의 존재는 형태도 없이 무게나 성질도 없이 싹없어지지만 그러나 밀가루 전체는 이미 변화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누룩은 변화시켜 나갈 때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나는 말이야 누룩인데 내가 지금 밀가루 서 말을 변화시켜 나가고 있어! 내가 점점 없어가고 있는 대신에 보시오 얼마나 많은 밀가루 반죽들이 변화되고 있는지를! 하고 동네방네 광고홍보 선전하면서 나발을 불면서 변화시켜 나갑니까? 아닙니다. 조용히 자신의 몸무게를 줄여 나가면서 자신의 형체는 마침내 보이지 않으면서 전체 밀가루를 완전히 변화시켜 나가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합니다. 누룩이라는 존재는 전혀 들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룩을 밀가루 서 말을 갖다 넣은 여자의 이름이 드러납니까? 전혀 들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이름은 없고 ”여자“로만 되어 있어 전혀 익명성이 강조됩니다. 4. 누룩과 여자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여자가 누룩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누룩은 ”여자가 가지고 있는 누룩“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자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누룩으로 천국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 누룩이 여자가 손에 쥐고 있는 누룩인지 여자 속에 있는 내면화된 누룩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여자와 누룩은 둘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였을 때 바리새인과 누룩이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처럼 여자가 지닌 누룩이라면 여자와 누룩은 분리되어 있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여자라는 특별한 뜻이라기보다는 당시 빵을 만드는 사람이 주로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인 것이지 어떤 성별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지시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를 여신도라고 해도 무방하고 남신도라 해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가 천국을 만들어 가는 누룩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여신도들이 밀가루 서말과 같은 가정 속에 남여신도들이 밀가루 서말과 같은 교회에서 남여신도들이 밀가루 서말과 같은 직장과 일터에서 남여신도들이 밀가루 서말과 같은 남여신도회에서 남여신도들이 밀가루 서 말과 같은 당회에서 노회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한국교회에서 여신도들이 밀가루 서 말과 같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이 나라에서 누룩이 되어 없어지면서 변화시키는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작은 천국을 만들어 간다 그 말입니다. 커피열매를 갈아서 커피를 만들어 내는 Coffee-maker가 있습니다만 여자와 누룩은 남여신도가 Heaven-maker 하늘을 만들어 가는 자가 된다 그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를 오늘의 현실로 끌어온다면 과연 예수의 누룩이 되어 밀가루 서말과 같은 공동체를 변화시켜 나가고 있는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사람”입니까?


교회 안에도 여러 신도들이 있습니다. 신도들이 많지만 모든 남녀신도들이 혹은 당회원인 장로님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 각각 다릅니다. 언젠가 신학교에서 가르치시는 교수님 한 분이 수업시간에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 말하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설명하면서 그런 비유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아이 넷이 남의 밤나무 밭에서 밤을 몰래 따고 있는데 아이 넷의 역할을 각각 다릅니다. 한 아이는 나무에 올라가서 열심히 밤을 따고 있습니다. 또 한 아이는 밤을 따는데 멀거니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는 밤을 따서 떨어뜨려 주면 열심히 밤을 까고 있습니다. 마지막 한 아이는 밤이 떨어질 때 밤이 여기 있고 저기 있다고 가르쳐 주는 아이가 있습니다. 주인이 나타났을 때 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는 아이는 현장에서 체포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소양형 인간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나타났을 때 멀거니 지켜보고 있다가 잡혀 간 아이는 소음인입니다. 막상 주인이 나타났을 때 밑에서 있다가 깐 밤만 얼른 챙겨서 도망간 이가 태양인입니다. 그리고 주인이 나타났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 가버린 이가 바로 태음인입니다. 성격과 행동에 따라 분류를 하면 그렇게 태음 태양 소양 소음인으로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거쳐 간 교회나 봉사한 교회 섬겼던 교회를 죽 나열해 보면 그렇습니다. 마산 77 육군병원 교회, 강진 칠량교회, 원주 영강교회, 광주 양림교회, 서울 송암교회, 대구 무열대 교회, 경기도 용인교회, 서울 한빛교회, 광주 가나안교회, 버클리 영성장로교회, 오클랜드감리교회, 밀피타스한인제일감리교회, 강진읍교회까지 다 합하면 열세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성도들을 만났고 그 중에서도 담임목회를 하면서 많은 신도들을 만났습니다. 그 수많은 만남 속에서 만난 성도들을 나름대로 크게는 세 가지형으로 세부적으로는 여섯 가지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한번 나는 그 중에서도 어떤 양식인지 한번 나름대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크게 세 가지는 첫째 누룩 없는 신도형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누룩의 신도형,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누룩의 여신도형입니다. 


첫 번째 누룩 없는 신도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교병형 남녀신도들입니다. 누룩 없는 빵은 맛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누룩 없는 무교병이라는 빵이 있습니다만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난을 생각하면서 유월절이라는 절기에 먹는 빵입니다.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기억하여 먹는 빵이니 얼마나 맛이 없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무교병과 같은 남여신도들이나 장로님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어도 주변에 눈꼽만큼도 털끝만큼도 손톱만치도 변화를 주지도 못하고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는 이들입니다. 백날 교회만 왔다리갔다리하지만 나의 생활에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남을 변화시키는 촉매도 되지 못합니다. 습관적으로는 신앙생활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자신이 크게 변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주변의 이웃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변화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그때 그 자리인 것입니다. 이 무교병형 신도들은 다시금 두 가지 형으로 나누어집니다.


1) 하나가 바로 "넌너난나형"입니다. “넌너난나형”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이지! 너와 나가 만나 우리가 되어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예배만 싹 드리고 축도가 끝나고 후주의 반주가 나올 때 얼른 나와 버립니다. 성도들 간에 어떤 교제를 나누지 않고 또 무슨 남신도회나 여신도회도 참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세상에 나아가 무슨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생활을 하여 주변에 어떤 영적인 영향력도 끼치지도 못하고 끼치지도 않습니다. 전도를 하라고 무슨 전단지를 주어도 그때 당시는 받아는 놓지만 집에 심방을 가면 그냥 쌓여 있을 뿐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께림직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싫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내 종교적인 의무를 끝냈다고 하는 식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별로 남에게 전혀 주위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사는 처소나 이웃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않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끼치지 않고 삽니다. 이는 물병에다 기름을 부으면 기름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 위에 뜨듯이 아무리 물병을 섞어 흔들어 놓아도 언제나 기름은 다시 기름의 자리로 가고 물은 물의 자리로 갑니다. 결코 섞이지 않습니다. 물은 기름에게 일점일획의 영향을 줄 수 없고 기름은 역시 물에게 개미 눈물만큼도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안치환이 부르는 노래 중에 그런 가사가 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서로 다가갈 수 없는 선 우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 평행선“ 마치 기차의 두 선로가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처럼 서로 평행선을 이루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나쁜 영향이든 좋은 영향이든 주지 않고 삽니다. 나 하나 믿고 예수 천당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무드셀라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창세기 6 장 25 절에서 27 절입니다. ”므두셀라는 백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아마도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그렇게 오랜 장수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므두셀라는 969 년이나 살았지만 10 세기를 걸쳐 살았으면서도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하고 갔습니다. 무슨 카인과 같이 무슨 살인을 하였다거나 사울과 같이 다윗을 죽이려 했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거나 무슨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착한 일을 하여 선한 영향력도 조금도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무어라 하냐고 하면 그는 구백육십구세를 살고 죽었더라! 그렇게만 쓰여 있습니다. 이 형은 무교병형 중에도 ”넌너난나형“입니다.


2) 누룩없는 신도형 중에서 다른 하나가 “세상좋아형”입니다. 이 세상좋아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 (identity)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어디로 가든지 특별히 해악을 끼치거나 문제는 일으키지 않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잘 지내고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예수 믿는 티를 전혀 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술 마시면 같이 마시고 고스톱 치면 고스톱 같이 치고 속칭 남을 씹으면 자기도 똑같이 씹고 교회만 다닌다 뿐이지 예수에 속한 사람이란 것이 눈꼽만치도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에다 술을 탔는지 술에다 물을 탔는지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도형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찬송을 잘 부르고 예배를 잘 드리고 할렐루야 아멘도 잘하지만 세상으로 돌아가면 세상의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혹 “투캅스”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거기에 안성기라는 형사가 박중훈이라는 형사와 짝을 이루어 나옵니다만 안성기는 교회에 가서 예배도 잘 드리고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잘 내고 목사가 설교를 하면 아멘도 크게 잘 외치고 목사 입장에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이 좋은 교인이지만 세상에 나가면 온갖 부정과 비리를 다 저지르고 특별히 뇌물을 좋아하는 형사입니다. 세상도 좋아! 교회도 좋아!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교회에서는 교회방식으로 세상에서는 세상방식으로 하나도 갈등 없이 잘 하고 있습니다. 좋아좋아형은 이방원의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 진들 어떠하리” 대충 적당히 대강 철저히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때론 세상에 이렇게 섞이고 때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둘 사이에 어떤 갈등도 느끼지 아니하고 좋아좋아! 하면서 잘만 삽니다. 디모데후서 4 장 10 절에 보면 데마란 사람이 나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미디아로 갔고” 데마란 사람은 어느 때는 사도 바울을 좋아하여 그를 따르다가 또 이 세상 제 세상 다니면서 전도하러 다니다 보니까 세상도 좋아서 사도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갔습니다. 교회 안에서 살면 교회의 가치관을 따르면서 살고 세상에 살 때에는 철저히 자본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또 쾌락의 가치관을 가지고 삽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그런 신도들이 많았나 봅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3 장 15 절에서 16 절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세상에서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하는 사람을 융통성도 많고 싹싹하고 하면서 좋아할지는 모르지만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뱉어버리겠다”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누룩 있는 신도형인데 그 누룩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해로운 누룩을 가진 여신도들입니다. 부정적인 영향력을 지닌 여신도들입니다. 첫 번 째 형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신도형인데 비해 두 번째 남여신도형은 영향을 끼치긴 끼치되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형입니다. 누룩이 있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누룩도 어떤 누룩이냐가 문제입니다. 누룩이란 다시 말해서 곰팡이인데 곰팡이가 몸에 이롭고 좋은 곰팡이가 있고 몸에 해로운 곰팡이가 있습니다. 학명으로는 아스페르길루스 오리자이 Aspergillus oryzae라는 곰팡이는 필라멘트형의 누룩곰팡이로서 일반적으로 쌀의 녹말을 당화하는 용도로 쓰여 간장이나 된장 청국장 쌀식초을 만드는 없어서는 안되는 곰팡이입니다. 또 페니실린을 만드는 푸른곰팡이가 있는데 이 곰팡이로는 재로 쓰여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쓰여집니다. 우리에게 이로운 유익한 곰팡이가 있는가 하면 곰팡이 중에서는 썩어 부패케 하는 곰팡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였을 때 그 누룩은 한 마디로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해로운 누룩입니다.


1) 해로운 누룩 중에서도 “싸움왕초형”의 여신도가 있습니다. 곰팡이 중에서도 우리 몸에 이로운 곰팡이가 있는가 하면 해로운 곰팡이가 있습니다. 무좀균도 일종의 곰팡이입니다만 이 곰팡이는 몸에 들어가면 가렵고 혈액을 타고 들어가 내장과 뇌에도 들어가 몸을 결정적으로 상하게 하는 곰팡이입니다. 이 곰팡이는 몸 안에 있는 백혈구들과 싸워 무수히 많은 백혈구들을 죽이고 곳곳에 자기 깃발을 꽂는 싸움왕초형의 신도와 같습니다. 이 신도는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여신도회에서나 마치 쌈닭과 같이 파괴와 비참을 남깁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기어이 찾아가서 해꼬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신도가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좌충우돌합니다. 가는 곳마다 분쟁을 만들어 내고 대립전선과 원한의 삼팔선을 만들어 냅니다. 교회 안팎을 돌아다니면서 입술과 혀로 이간질하고 없는 말 있는 말 다 지어내어 흑색선전하고 덮어 주어야 할 것을 발기발기 찢어내고 지 돈 쓰면서 지발로 걸어 다니면서 온갖 스캔들을 다 들추어내며 성도들의 허점, 단점, 결점, 약점을 침소봉대하여 떠들고 다닙니다. 이 사람이 구역에 있으면 구역이 서로 서로 싸움판이 되고 이 사람이 신도회로 가게 되면 신도회가 짝짝 갈라지고 이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싸움이 일어나고 그 신도 때문에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어떤 신도들은 그로 인해 상처를 받아 “목사님! 저는 목사님도 사랑하고 성도들도 사랑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여기서 신앙생활 하지 못하겠어요!” 하고 그 사람이 없는 다른 교회로 옮기게 됩니다. 참으로 교역자의 기도제목이 되는 신도입니다. 교회 다니니까 신도이지 입만 열면 열린 무덤과 같이 썩은 살과 뼈들이 기어 나옵니다. 로마서 3 장 13 절에서 15 절입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대기오염이 일어나고 수질오염 상태가 심각하게 되어집니다. 가는 곳마다 흑암을 짓고 어둠을 뿌리고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키고 그 사람이 있으면 환경이 아주 열악하게 되어집니다. 오염공해형 신도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사람을 보고 “저런 것이 교회 다닌다고 나는 저런 것 때문에 교회 안나가! 교회 나가 저 사람 닮을까 무섭다!” 전도를 가로 막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면서 지 잘난 맛에 열심히 교회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암흑의 지옥을 만들어 갑니다.


2) 해로운 누룩 중에서도 “변질부패형”의 신도가 있습니다. 싸움왕초형의 신도형이 부단히 교회 안에서 싸움과 분란을 일으킨다면 이 여신도는 신도들 가운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데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철학으로 이단사설로서 교묘하게 신도들을 변질시켜 나가는 신도형입니다. 이 형은 결코 싸움을 하지 않고 신도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해 갑니다. 그야말로 교회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돈과 물질로 포섭하든지 중심에는 세상의 철학인데 거기다가 겉만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의 색칠을 하여 포섭하든지 아니면 사이비 이단 사설을 들고 들어와 성도들을 포섭하여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자기는 교회 안에서 영주와 같이 행동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될 일도 안 되게 하고 안 되어야 할 일도 되게 합니다. 그래서 교역자들이나 교회에서 직분을 맡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요즘 신천지라는 이상한 이단들이 교묘하게 교회에 들어옵니다. 신천지의 핵심세력들이 각 교회에 들어와 무척 교역자에게 순종하는 신도와 같이 굴고 나중에는 구역의 말씀 인도자가 되어 이상한 이단사설을 성경을 빙자하여 가르치고 결국 그 구역을 장악하고 신도회를 장악하여 신천지 식구들을 만들어 지옥의 자식들로 만들어 냅니다. 이 형이야말로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누룩입니다. 마태복음 16 장 6 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이라 하였을 때 바리새인과 누룩 사두개인과 누룩은 identify 일체화가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이 누룩과 같은 일인데 어떤 누룩입니까? 마태복음 23 장 15 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누룩을 가지고 교인들을 만드는데 그들이 교인을 만들었지만 그 교인들은 천국의 백성들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아닌 변질시키는 신도인데 돌아다니면서 하는 것이라고는 마귀짓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천국을 만들어 가는 누룩이 아니라 지옥확장공사를 하는 누룩을 말합니다. 교회는 천국을 향한 공동체인데 마치 알곡이 자라는 곳에서 가라지를 심어 가라지 천국을 이루게 합니다. 이는 여신도들이 아니라 마귀의 미션을 받아 일하는 마귀의 똘마니들로서 결국 꺼지지 않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 번째 누룩 있는 신도형인데 그 누룩은 바로 천국을 만들어 내는 예수의 누룩을 가진 신도들입니다. 첫 번째 형의 신도형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신도형이라면 두 번째 신도 형은 영향을 끼치는 신도형인데 부정적이고 공해와 오염으로 변질시키는 여신도형입니다. 세 번째 여신도 형은 뭔가 좋은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여신도형입니다. 이 여신도형은 자체가 누룩이 되어 들어가는 곳마다 빵이 만들어지고 요구르트가 만들어지고 된장과 청국장이 만들어집니다. 이 신도형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누룩이 되는 형입니다. 마태복음 13 장 33 절 말씀을 다시금 보겠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이 형은 자신이 누룩이 되어 점점 적어지다가 없어지지만 그 공동체의 반죽은 부풀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복음으로 감화된 남여신도가 가는 곳마다 긍정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형입니다. 이 형에도 두 가지 형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의 누룩 중에도 그저 소극적으로 있지만 주변은 영향을 받는 “은밀누룩형”의 신도가 있습니다. 이 형은 자신이 나서거나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봉사하는 형입니다. 기도생활도 열심히 하고 봉사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그리고 구제생활도 잘하지만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형입니다. 그 사람을 알아서 이름을 내려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멀리 도망가 버리는 형입니다. 믿음은 깊고 봉사활동도 즐거이 하지만 결코 앞장서지 않는 형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하고 그 가슴 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있지만 그것을 겉으로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 신도를 보면서 참으로 이슬비와 같이 스며드는 영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옛날 중세에 성화를 그릴 때 어떤 성자의 모습에는 머리 뒤에 달무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그러면 성자에게 보기 좋으라고 그런 것이냐 하면 아닙니다. 깊은 기도생활을 하고 수도생활을 하고 그 가슴에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달무리와 같이 환하게 빛나는 거룩의 빛이 있습니다. 성자들을 찾아간 이들은 그 성자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얼굴만 보아도 그 얼굴에 나타나는 빛만 보아도 영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모세의 모습이 그러했고 변화산에 올라갔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환하게 얼굴이 빛났습니다. “은밀누룩형”의 여신도에게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그를 단지 바라봄으로 인해 그가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영적인 깊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가 섬겼던 강진읍교회는 두 분의 권사님에게서 두 분 다 기도하는 권사님이지만 그런 거룩의 빛이 납니다. 제가 교역자이지만 그 권사님의 모습을 보면 옷깃을 여미고 싶을 정도의 그런 영적인 향기를 풍기는 권사님들이 계십니다. 그저 조용하게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분 자신이 영적인 누룩이 되어 은밀하게 그 거룩성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누룩 중에도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활동을 하는  “예수누룩형”의 신도가 있습니다. 이 형은 예수님과 같이 말씀을 전하고 활동을 하는 것과 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이 밀가루 서말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 누룩이 되는 형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밀가루 서 말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은 비로 없어지더라도 누룩이 되는 형입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 찬송가의 가사와 같이 십자가는 지려고 하지만 영광은 주님께 오직 돌리는 형입니다. 은밀누룩형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데 비해 이 형은 이사야와 같이 주님이 누가 나를 위해서 갈꼬 할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면서 적극적으로 주님의 일을 위해 나서는 형입니다. 이 사람 역시 은밀누룩형과 같이 그 가슴에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뜨거워져 있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져 있기 때문에 주님이 보내만 주신다면 어디든지 가서 누룩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일을 합니다. 주를 위하여 기꺼이 죽겠다는 각오로 임합니다. 이 여신도는 로마서 12 장 2 절에 있는 그대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를 가던지 그와 접촉하는 사람은 변화가 일어나되 좋은 쪽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그가 들어갈 때 뭐든지 선한 것들이 나옵니다. 메주와 된장이 만들어지고 빵이 만들어집니다. 성경에 보면 한나와 같이 기도를 다양하게 한 사람이 없습니다. 한나는 오래 기도하고 통곡하면서 기도하고 성령에 취하여 기도하고 서원하며 기도하고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누룩씨가 되어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사무엘이라는 사사시대와 이스라엘 왕정을 연결시키는 인물이 만들어집니다. 예수누룩형의 신도는 어디를 가든지 그가 일하는 곳에는 그가 만나는 사람이면 괄목할만한 변화는 아니지만 조그마하지만 바람직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가 말을 할 때나 그가 무슨 일을 할 때 그것을 보고 어떤 선한 영향력을 느끼고 그가 참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의 통로, 축복의 물줄기임을 감지합니다. 그와 함께 있어도 좋고 그와 함께 일하여도 좋고 그와 함께 있으면 조그마한 천국을 경험케 되는 사람이며 그런 신도입니다. 아가서 5 장 15 절에서 16 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로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나 오라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존재하고 있되 동산의 샘과 같이 생수의 우물과 같이 흐르는 시내와 같이 존재하고 있어서 주변에 부단히 해갈함을 주고 생명을 살아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겨울에는 남풍으로 불어 따뜻한 훈풍으로 불어오고 여름에는 북풍으로 불어 시원함을 안겨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향기와 같은 존재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야! 하고 이름을 불러 주시고 내 동산에 들어와 아름다운 열매를 먹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 향기가 되고 빛이 되고 예수의 누룩이 되는 존재는 하나님께서도 바라보시고 즐거워하시고 좋아하십니다. 스바냐 3 장 17 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노래를 부르실 정도로 좋아하시고 사랑하신다 그 말입니다. 예수님의 누룩이 되는 여신도는 그 공동체에서 그렇게 수효가 무척 적지만 이들이 변화의 촉매가 되어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만들어 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적은 무리들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는 창조적 소수 (creative minority)가 이끌어나간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마치 창조적 소수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일꾼이 됩니다.


요약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을 크게 세 가지 형 1)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형. 이 형은 다시 두 가지 형으로 나누어지는데 (1) 넌너난나형과 (2) 세상좋아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형은 2) 영향력을 끼치는데 부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형으로 (1) 싸움왕초형과 (2) 변질부패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 째 형은 복음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형인데 (1) 은밀누룩형과 (2) 예수누룩형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을 아마도 다 이여섯 가지형 안에 다 분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성도 여러분들은 어떤 형입니까?


결론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변해 가고 있습니다. 변해가되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이 변해 가고 이에 따라 인간의 의식도 변해가고 인간세상의 풍조도 무섭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주도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정신이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싹쓸이로 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과 자본이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였습니다. 20 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있었습니다만 오늘날 21 세기 자본주의만 남고 나머지는 전멸하였습니다. 물론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가 있기는 해도 중국이나 러시아는 껍데기만 공산주의지 실제 내면은 자본주의 보다 더한 자본주의, 변형된 자본주의일 뿐입니다. 자본주의도 무슨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막스 베버에서 나오는 성서적인 정신에 뿌리를 둔 자본주의가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돈으로 돈 먹는 자본주의, 물질이 중심이 되고 자본이 주가 되는 자본주의입니다. 이런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자본주의의 가치관으로 인해 즉 물질지상주의, 자본 중심주의가 인간을 유물적인 인간, 소유지향적인 인간, 쾌락적인 인간으로 무섭게 인간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말하는 조심해야 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으로서 그 누룩의 영향을 받으면 갑절이나 지옥의 자식이 되는 인간으로 바꾸어져 가고 있습니다. 레지던트 이블 3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블렐러라는 다국적 기업이 돈을 벌기 위해 바이러스를 유포하고 그 백신을 만들어 팔아먹으려 하였는데 그 바이러스가 유출이 되어 전 세계로 확산이 되어 인간들은 모두가 다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결국 좀비족들이 되었습니다.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저 흡혈귀와 같이 그저 광견병에 걸린 미친개와 같이 남을 물고 남의 피를 빨아 먹는 족속들이 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다 좀비족이 되었는데 몇몇 사람들이 생존하여 다시금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그저 가상의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흡혈귀와 같이 남의 피를 빨아 먹지 않을 뿐이지 실상 인간들은 좀비족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악한 정령이 인간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여 겉만 멀쩡할 뿐이지 실제적으로는 흡혈귀와 같고 좀비족과 진배없는 인간들이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공공의 적”에 보면 대표적인 좀비족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서 범인으로 나오는 사람은 아버지가 맡겨놓은 돈을 달라 한다고 복면을 하고 부모의 집으로 들어가서 부모를 칼로 다 찔러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죽은 부모의 시체 위에 밀가루를 뿌려 놓습니다. 돈을 위해서는 부모도 무참히 죽이는 그 인간은 좀비족들보다도 더 못한 인간들입니다. 인터넷에서는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음란과 쾌락의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마치 악성 바이러스와 같이 물질로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망쳐 놓았고 망쳐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니까 교회도 뒤지지 않게 변하자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과 자본주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으로 인간을 좀비족으로 변하여 지옥으로 가게 하는 인간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퇴폐자본주의 물결이 넘나들어 교인구성대비 좀비족들이 너무도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해로운 누룩으로 물든 영혼들이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오늘날 세기말적인 현상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는 신신애라는 가수를 그저 가수로 보지 않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고발하는 예언자라고 봅니다. 신신애가 부른 노래를 한번 들어 봅시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야야 야들아 내 말 좀 들어라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인생 살면 칠팔십년 화살같이 속히 간다  정신차려라 요지경에 빠진다 싱글벙글 싱글벙글 도련님 세상 방실방실 방실방실 아가씨 세상 영감상투 비틀어지고 할멈씨도 도망갔네 하-세상은 요지경 요지경속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대로 산다> 신신애가 부르는 노래 속에 정확하게 오늘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 온통 세상이 거짓으로 버무려 져 있다고 세상을 고발합니다. 단지 고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 차려라 이것들아 요지경에 빠진다!”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지경의 세상 속에서 우리 신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성도들은 참으로 교회 안에서부터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의 누룩이 형성되기 위해 해산하는 수고의 기도를 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내 안에 예수님의 누룩이 발효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아울러 내가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 살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 내가 밀가루 서 말과 같은 교회 속에 들어가 교회가 참으로 이 세상 가운데 예수님의 누룩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여자가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었다 하였습니다. 이 여자를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남녀신도회의 지도자로 봅니다. 밀가루 서 말은 우선은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도 지도자들은 교회를 누룩 공동체로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누룩이 되도록 여신도 지도자들이 누룩이 되어 밀가루 서 말과 같은 교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누룩이 되지 못한다면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될 뿐입니다. 벌써부터 그런 징후가 나타납니다. 엠비씨가 교회를 고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이 다 사실입니다. 교회가 희망이 없으면 이 세상은 어둡게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교회가 그저 종교인의 누룩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누룩이 된다면 이 땅의 교회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돌 하나에 돌 하나가 놓이지 못할 정도로 훼파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강단에서 적극적 사고방식의 철학만을 전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형통케 되는 방법만을 알려 줄 때 교회가 복만 많이 받도록 하는데 치중한다면 교회는 세상의 가치관 바리새인의 누룩과 서기관의 해로운 누룩이 될 뿐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누룩이 되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손해 볼 줄 알고 희생할 줄 알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 주고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해주는 그런 천국시민을 만들어 가는 누룩공동체가 되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누룩으로 만드는 오늘 마태복음 13 장 33 절에 나오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교회는 희망의 공동체, 예수님의 누룩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신도들은 참으로 마태복음 13 장 33 절에 나오는, 오늘을 현실을 바꾸어 나가시는 창조적 소수의 누룩, 변화의 촉매제가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에 있는 대구노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이들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누룩으로 삼으시옵소서! 이들의 가슴에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부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예수님의 거룩한 누룩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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