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투쟁하는 교회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 향린교회

당황과 충격의 밤

내가 구속되어 안기부 지하실에서 신문을 당하고 있을 때 땅위에서는 충격을 받은 향린교회가 대응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자세한 것은 물론 내가 목격한 것이 아니다. 내가 서울 구치소에서 신문을 보고 알 수 있었고 후에 내가 1 심이 끝나고 석방이 되지 않았을 때 석방대책위원회에서 출판한 {통일의 길, 십자가의 길}에 자세히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내가 구속된 당일날 밤 뉴스를 통하여 내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티.브이.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안기부는 20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쪽분부 준비위원회 결성과 관련, 집행위원인 향린교회 당회장 홍근수(54)를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 구성 등) 혐의로 구속했다."(한겨레 2월 21일자)

이 보도들은 한결같이 내가 2년 전에 T.V. 심야토론회에서 공산주의는 인도적이다라고 한 발언을 회상시키고 북한을 예찬했다는 것을 부연하고 있었던 것 모든 신문들의 보도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안기부에서 돌린 보도자료가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날 밤 서울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아내는 강원도에서 돌아오던 길에 때아닌 폭설로 귀경길이 지연되고 있었다. 밤 자정쯤 되어 집에 도착한 그는 흔히 그랬듯이 오늘밤도 내가 무슨 일로 그냥 늦게 귀가하겠거니 라고 만 여겼을 뿐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도 신문, 라디오, 티.브이.를 잘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어서 이날 밤도 그는 T.V.를 켜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자정이 넘은 깊은 밤 시간인데 울린 전화기를 드니 기장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장인 광주의 조규혜 장로였다. '홍 목사님이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지금 막 보도되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오히려 무슨 말인가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일이 난 줄 비로소 알게 된 아내는 종로경찰서로, 안기부로 사방 전화를 하여 알아보았으나 늦어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조선호텔에서 헤어진 목회자들은 각기 집으로 향해 귀가하였다. 김경호 목사와 안정자 전도사는 신사동으로, 곽건용 목사는 일산으로, 각각 귀가하였다. 내가 구속된 사실을 제일 먼저 안 것은 곽건용 목사로 그는 집에 도착하여 10시 뉴스들 통해서 내가 구기동에서 구속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어 알게 된 것이다. 부교역자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즉시 전화연락을 취하는 등 신속히 행동하였다.

향린교회의 출사표 : 홍근수목사석방대책위원회 결성

비상 연락을 받은 아내와 당회원들을 비롯하여 교회의 각부서와 조직의 책임자들은 충격과 당황을 금치 못했지만, 다음날인 목요일 저녁에 교회로 모여 즉시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모임에서 아내 김영 목사는 충격을 받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교우들에게 오히려 격려와 희망의 말을 하여 방안의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그는 지금은 홍 목사를 위해 걱정할 때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안기부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일을 당하여 우리 교회가 결속된 우리 자신들을 보이느냐, 이 일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이번 사건으로 향린교회가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 기회에 새로운 시위 문화와 투쟁방식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이런 것들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 홍 목사 석방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에 교인들은 정말 용기 백배하였다. 이날 밤 모임에서는 "홍근수 목사 석방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위원장에 김경호 목사, 고문에 황성규 목사를 선출하고 위원들도 선출하였다. 주로 교회의 각 신도회와 부서의 장들로 구성되었다. 이 대책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앞으로 홍 목사 구속이후의 교회의 대응책과 행사들을 이끌어 나가도록 결의하였다. 특히 이 모임에서 교회의 내부적 결속, 홍 목사 구속에 대한 법적 대응, 홍 목사 석방촉구 기도회와 신도대회를 갖는 등, 모든 투쟁방법을 강구하는 한편 교계 및 사회운동단체와의 연대투쟁을 벌리기로 결정을 하고 활동을 신속히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 대책위는 그 날로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한 일은 향린교회 전 교우들이 그 다음날 저녁에 "홍 목사 석방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연다는 것을 결정하고 이를 위해 준비하기로 했다.

한편 이날 이 모임직후에 임시비상 당회를 열고 담임목사 유고에 대비하여 김경호 목사를 대리 당회장으로 선출하고 강단 계획 등에 관한 일련의 결의를 하였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저녁, 기도회가 열리기 직전에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큰 사건이 또 일어났다. 그것은 안기부에서 전경 2개 중대 정도의 병력이 향린교회를 난입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마침 기도회와 석방운동 등을 계획하던 교역자들과 청년회원들이 저녁식사 하러간 사이에 안기부 경찰력이 교회로 난입을 시도한 것이다.

이런 일을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였지만, 일부 교우들은 저녁식사를 가지 않고 교회에서 기도회 준비 등의 일을 하고 있다가 이 일을 당한 것이다. 급히 모인 청년들과 교역자들이 몸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교회는 침탈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김경호 목사는 그들의 행위가 "명백히 성전침탈 행위"라고 말하고 "당장 성전침탈 행위를 중단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마의동풍격이었다.

이들 안기부 파견 전경들은 당회장 실에 난입하여 컴퓨터와 디스앛, 우편물, 여러 가지 원고들과 설교원고 등을 침탈하여 갔다. 이 사건은 곧 모인 기도회 참석 교인들에게 보고되고 교인들은 불의한 정권과 일전을 할 결의를 더욱 굳혀주는 효과를 냈다.

급히 소집된 이날 기도회에서 200 여명의 교인들이 참석하여 기도회를 개최하고 정권 당국에 대항하여 투쟁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특히 이날 아내는 교우들에게 홍목사의 구속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순절 선물이라고 말하여 고무하고 격려하였다. 장로들과 초청회원들, 특히 황성규 목사가 일선에 나서서 교인들에게 결속을 촉구하고 격려하였다.

이날 기도회를 마친 후에 청년신도들은 교회에서 "홍 목사 석방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나의 구속 소식이 전해지는 대로 내가 관계하고 있던 단체들이 속속 항의 성명서 등을 발표하였다. 향린교회를 비롯하여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임수경 후원사업회, 기독교사회운동연합, 통일신학동지회, 등이었다. 후에 홍 목사가 통일위원장인 기장 서울노회, 기장총회, 그리고 엔시시 등도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교역자들과 대책위에서는 변호사 선임 등으로 법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엔시시와 교단 등에도 연락하고 토요일에는 최초의 면회를 신청, 면회를 관철하였다. 그리고 토요일 밤에도 특별기도회를 열었다.

마침내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홍근수 목사를 석방하라}, [우리는 홍근수 목사님을 사랑합니다.]는 현수막이 향린교회의 건물에 내 걸려 바람에 펄럭거렸다. 이는 마치 이제 향린교회는 저항하는 교회로 나섰다는 것을 대외에 선포하는 듯 했다.

안기부는 나를 구속하고 일어날 사회적 반응, 교계의 반응, 특히 향린교회의 반응을 과소평가한 것이 틀림없었다. 교회는 즉시, 신속, 정확히 대응하였고 전교회적으로 비상대책을 세우고 처음 사흘동안 교회에서 특별기도회를 열어 담임목사 석방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향린교회가 이렇게 나온 데에는 모든 교인들이 나의 사회참여와 통일운동의 목회로선을 지지해서였다고 보기 어렵다. 향린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는 비록 목사의 목회노선을 그대로 지지하지는 못할지언정 분단시대의 목사로서 그런 신학과 목회철학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공안당국이 목회자를 구속하는 사태를 당면한 교인들은 그들의 신앙노선과 관계없이 홍 목사의 구속은 부당하다고 판단하여 일어난 것이다. 향린교회의 담임목사석방대책위에서는 이번 이 구속사건을 종교의 자유와 선교탄압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이에 향린교회는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교회로 분명히 선언하였던 것이다.

길거리로 나와 투쟁하는 향린교회

내가 구속된 후 맞은 첫 주일날이 왔다. 나의 구속 소식을 들었던 향린교회 교인들은 평소와 달리 거의 전 교우들이 교회로 몰려왔다. 이들은 전경들이 교회를 포위하고 삼엄한 경계를 서있는 가운데 예배를 보았다. 이날 대리 당회장인 김경호 목사는 "향린교회의 출사표"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여 교인들을 고무시켰다. 그 설교는 향린교회가 안기부를 향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를 포위하고 있던 전투경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듯이 교인들은 예배 후 신도대회를 열고 담임 목사 구속과 성전침탈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채택하고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평화의 행진을 시작하였다. 안기부로 행진하려던 시위행렬은 전경의 제지를 받아 결국 명동성당 앞길에서 기도회와 구호제창, 결의문 낭독, 시민에게 드리는 말씀 등으로 순서를 진행하였다. 이날 이들이 외친 구호는 "하느님의 종, 통일의 종, 홍 목사님을 즉각 석방하라."는 것 외에도 "선교탄압 성전침탈 안기부를 해체하라."라는 엄청난 구호가 명동 일대에 우렁차게 울려 펴졌다. 한 지역교회의 불의한 권력에 대한 항전이 선포된 것이다.

삼성 인쇄소 회장인 김근호 집사는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홍 목사 석방운동을 위한 스카프를 제작하여 그것을 시위할 때 사용하도록 하였다. 스카프의 한쪽 귀퉁이에는 밧줄에 묶여있는 나의 그림과 "통일목사 홍근수 만세"라는 글씨와 향린교회의 로고와 교회이름을 넣고 나머지 공간에는 나의 석방과 건강 등을 기원하고 지지와 격려의 뜻을 표현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씨를 담은 것이었다.

홍근수 목사 석방촉구공동투쟁위 결성과 철야농성

향린교회는 홍 목사가 평소에 관계하던 단체들인 한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 한국기독노동자서울지역연합, 애국 크리스챤연합, 기장청년회서울연합회, 기장민중교회운동연합, 임수경 후원사업회, 통일신학동지회, 등 단체들과 홍근수목사 석방촉구공동투쟁위를 결성하고 종로 5가 엔시시 강당에서 향린교회 교인 250 여명 문익환 목사 등 각계 원로와 재야인사들의 참석 리에 기도회와 규탄대회를 개최하고 농성을 벌리기도 하였다. 엔시시, 기장총회, 기장 서울노회 등을 비롯한 교회 단체들과 전민련 등 재야단체에서 연달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기도회와 항의농성에 친히 참석하여 향린교회와 나의 가족들에게 연대를 표시하고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한 교계와 재야의 여러 인사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격려의 말을 방명록에 남겨 홍 목사의 가슴과 교회의 역사에 각인되어 길이 기억되고 역사의 길을 비쳐주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이기고 있다."(문익환);

"놓칠세라!"(계훈제 선생);

"통일의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건투를 빕니다."(이우정 장로);

통일만세! 민중의 힘으로 통일(진관 스님);

근수야 울지 마라 주님 가신 길이다(김용욱 목사);

목사님, 너무 일찍 나오시지 말고 대법원, 헌법재판소까지 갑시다. 이미 이겨놓고 하는 싸움 아닙니까? (기장 총회 사회선교국장, 배태진 목사);

주님께서 함께 하노라(최희섭 목사: 기장 총회장);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서정래 목사: 기장 총회 총무)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김용욱 목사);

김영 목사님을 내어놓아라!(고애신 전도사);

건투를 빕니다. 통일의 선구자 홍 목사님을 당장 내놓아라!(박수현 목사)

힘내세요!(유원규 목사);

"대화 제의 답변이 구속이냐? 반통일범죄 회개하라!(범민련 재정위원장, 이관복 선생)

통일의 선구자 홍 목사님을 즉각 석방하라!(전창일 선생: 범민련 조직위원장)

열심히 합시다(민자통 공동의장);

목사님 건투를 빕니다(청년목회자연합회);

참 통일 일꾼 장하다(한창호 선생);

장하다 민주통일의 꽃!(양동발 선생);

안기부에 도전하는 사람들 : 부당한 구속항의와 석방촉구 기도회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내가 구속된 후 두 번째 주일날인 3월 3일, 서울에서는 진귀한 광경이 벌어져 시민들의 화제를 모았다. 그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안기부 정문 앞에서 향린 교우들이 모여와서 노상예배를 드린 사건이 벌어졌다. 이날 주일예배를 마친 향린 교우들 150 여명은 그들의 교회의 목회자의 부당한 구속에 대한 항의와 석방촉구 기도회를 안기부 정문 앞에서 연 것이다. 반시간 가량 계속된 이 기도회에서는 십자가를 그린 흰 마스크를 하고 침묵으로 시가지를 행진해 왔던 교인들이 안기부 정문에 와서는 그것을 벗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며 구호를 외치면서 예배를 보았다. 교인들은 안기부 안쪽을 향해 "우리는 홍근수 목사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홍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러 왔습니다." 등등을 구호로 외쳤다.

"오늘 우리가 평화집회를 하게된 것은 당국의 아량이나 양보에 의해서가 아리나 죄 없는 목회자에게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 가둔 잘못을 인정한 것입니다.(김영 목사)

"홍 목사의 통일의지를 불법으로 가둔 안기부 지도자들에게도 주님이 함께 하시어 이 민족에 화해와 통일의 그 날이 오게 해 주십시오."(기도)

불의한 권력의 심장부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르고 있던 안기부 정문 앞에서 그 안에 구속되어 있는 홍근수 목사 석방, 국보법 철폐 양심수 석방, 등의 요구와 구호를 외치고 기도회를 개최했다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날은 정식으로 사전에 집회허가를 내고 성가대 가운을 입고, 십자가를 높이 쳐들고 어른 어린 아이들까지 참가한 질서정연한 침묵시위를 벌렸고 경찰은 시위하는 교인들의 행렬을 '엄호'하였다. 이날 향린교회의 안기부 앞에서의 시위는 장안은 물론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재야의 투쟁에 큰 활력소를 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주로 종로 5가에서 있었던 목요기도회는 향린 교인들이 거의 참석하여 엉성하던 목요기도회장이 사람들로 빼곡 차서 열기를 올렸다. 어떤 교우들은 신문에 글도 쓰고 당국에 편지도 보냈다.

* 교회에서 농성/종로 5가에서 농성

* 항의시위, 평화행진, 노상기도회, 안기부 앞에서의 항의시위, 석방촉구기도회

* 서명운동

* 옥중투쟁을 지원하는 통일강연회 개최

이재정, 손규태, 홍성현

* 향린교회에서는 교우들이 매일 밤 10시에 감옥에 있는 목사를 위해 기억하며 기도를 계속하였다.

* 향린교회는 산에 등반을 가서 거기서도 석방촉구활동을 하고 예배와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 문화행사를 통한 석방운동

향린교회는 4월 28일, "통일의 십자가 어깨에 지고"를 향린교회에서 공연

* 머플러 투쟁

향린교회는 또한 나의 석방을 위한 교인 싸인 스카프를 발행하여 투쟁하였다. 표지에는 수갑을 차고 밧줄로 전신을 동여맨 나의 모습을 왼쪽에, 향린교회 로고가 들어있는 한반도의 그림이 오른 쪽에 그려졌고 아래쪽에는 "홍근수 목사님석방을 위한 교인 싸인 스카프"라는 것이 인쇄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뜻 없이 무릎 꿇는"이란 찬송가가 곡과 함께 인쇄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표지 속에는 파랑 바탕의 천에 거의 모든 교인들이 친필로 나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글귀를 써넣었다. 이것은 향린 교인들이 나를 지지, 성원한다는 물적인 표시였다. 이것은 아내에 의해 미국에 까지 전파하였다.

* 자료집 발행, 1, 2, 3 집, 그리고 "통일의 길, 십자가의 길: 홍근수 목사법정일지" 출판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감옥에 있는 나를 찾아주었고 내게 편지로 격려를 했는가? 서울구치소에 있을 때에는 매일 교우들이 면회 와서 나를 격려해 주었고 물건이며 음식을 넣어주고 영치금을 주었으며 나의 석방을 위한 온갖 활동들에 참가하였다.

싸움의 시작

검사가 기소를 했다는 것은 앞으로 재판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보통 관례에 따라 첫번 공판에 피의자는 '모두진술'이란 것을 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첫 공판을 준비하는 피의자는 재판일자가 정해지는 경우 모두진술을 준비하기 위해 볼펜을 받을 수 있다. 모두진술이나 최후진술에 한해 미농지에 쓸 수 있는데 이 미농지는 본인이 구매하여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재판시일이 다가오면 부장에게 말하여 사용할 수 있다. 본래 볼펜은 우권을 쓸 때에만 사용할 수 있지만, 모두진술이나 최후진술을 준비할 때에는 낮 시간에 한해 볼펜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모두진술이란 것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책상도 없어 쪼그리고 앉아서 미농지 속에 묵지를 넣어서 힘을 주어 쓰기란 보통 힘든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모두진술을 준비할 때 이 기회를 오랫동안 내 설교를 듣지 못한 교인들에게 설교를 겸하고, 일반 그리스도인들이나 재야 운동권에는 한 목사가 재야운동, 통일운동을 하는 신학적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리하여 발표하자는 동기를 가지고 준비하였다.

첫 공판 날이 드디어 왔다. 5월 14일이었다. 첫 공판에 출정하기 위해 나는 사동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담당(당직) 교도관이 몸을 수색하고 호송 교도관이 또 수색을 하는 등 집합 장소로 데려가기 전에 하는 절차가 많다. 나는 이날 첫 공판인 만큼 모두 진술을 쓴 미농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담당 교도관이 그것을 문제삼았다. 각 사동으로부터 출정하는 피의자들을 인솔해 가는 교도관도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가서 모두진술 시간에 읽어야 한다고 우겼다. 그것이 허용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는데 어떤 교도관들은 그것을 문제삼으면서 그것은 재판부에 서면으로 제출하면 되는 것이지 출정 시 본인이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실강이를 한 끝에 높은 사람에게 전화를 하고 야단법석을 뜬 후에 결국 지참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날 처음으로 법정에 피고인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법원 지하 감방에 여럿이 대기하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불려나가는 것이다. 검찰청 감방과 다른 것은 일반수나 정치수를 구별하지 않고 큰방에 20-30십까지 같이 수용하며 또 그 방에 변소가 없고 큰 드람통 같은 데에 소변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정말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어찌 법원이 검찰보다 못한지... 나는 불려 올라갔다. 나는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복잡한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어느 방에 들어갔다. 거기 교도관이 몇 명 더 있었다. 내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 24부라고 하고 부장판사는 정호영 판사이고 다른 두 젊은 판사가 있다고 했다. 그 옆방이 형사지법정 제 311호라고 하였다. 밧줄과 수갑을 풀었다. 의자에 앉아서 조금 기다리었다.

3시부터 개정되는 시간이 되어 입장이라 하여 나는 교도관의 뒤를 따라 법정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나는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와 "목사님 사랑합니다"는 소리를 듣자 순간 눈앞이 캄캄해 져서 한동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경험을 하였다. 아마 순간적으로 블랙 아웃(black out)이 되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나는 법정 옆문으로 접근하는데 내가 걸어가는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은 검사석이고 정면 쪽에는 변호인석이 있으며 왼 쪽에는 판사가, 오른 쪽은 방청객들이 앉아 있다. 나는 교도관의 도움으로 내 지정된 피고인 석에 앉았다. 내 앞에는 마이크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보였다. 차차 내 눈에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먼저 맞은 쪽 높은 곳에 앉은 세 판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앉은 곳 오른 쪽으로 변호사들이 한 사람씩 보였다. 그리고 한 참 후에야 내 왼편에 안종택 검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변호인들은 기소하는 검사와 마주보고 앉아 있게 되어있다. 그 법정은 중대법정으로 150 여명을 수용하는 크기로 보였는데 앞쪽에는 낯 익은 교우들의 얼굴들과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 찬 방청석을 얼핏 보았을 뿐 판사를 향해 내 자리에 앉으라고 하는 교도관이 일부러 방청석을 보지 못하게 하고 앉게 하였기 때문에 잘 볼 수 없었다.

모두진술

내 앞에는 마이크가 있었다. 판사는 신원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고 모두진술을 하겠는가고 하였다. 나는 진술을 하겠다고 말하고 "존경하는 재판장님! 모두 진술을 허락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로 말문을 열었다. 그리고 준비해 온 모두진술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였다. 이 모두 진술은 공소장 보다 길게 준비하였다. 근 2시간을 중단하지 않고 읽어 내려갔다. 나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진술하였다:

나는 먼저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내가 평소에 나의 신조처럼 여기고 매일의 나의 기도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인용하였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거짓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대주재이신 하느님

내가 위로 받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를 더 구하게 허락하시고

이해 받기 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구하게 허락하소서.

이는 우리가 받음은 (다른 사람에게) 줌에 있고,

우리가 용서를 받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데 있으며

영생에로 태어나는 것은 죽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이 기도문대로 실천하고 살려고 하던 결과로 오늘 내가 구속되어 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공소장에서는 내가 다음과 같은 활동을 했다고 요약하였다:

"각종 재야.종교.정치.사회단체의 결성을 주도하여 그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평소 해방신학, 김일성 주체사상,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하는 강연.설교.집필 활동을 통하여 이른바 '반 외세 자주화, 반 독재 민주화, 조국통일운동'을 표방한 체제 변혁적 정치투쟁 및 김일성 주체사상과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을 지지.선전하는 등 목회활동을 빙자, 친북.반미.통일투쟁을 전개하면서...."

내가 위의 검사의 공소장의 일부를 인용했을 때에 검사가 제지하였으나 판사는 검사의 의견을 누르고 모두 진술을 계속하게 하였다. 나는 먼저 위의 검사의 기소이유가 내가 한 목회활동이 목회활동을 빙자한 것이고 진정한 목회활동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 중요하다. 이 문제는 사실은 종교적, 신학적 판단의 문제이므로 이 서울형사법정은 이 문제를 재판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당국에서 관할해야 할 성격의 사건이라는 것을 말했다. 다만,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이 세 속의 법정에 출정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의 사법제도를 존중하여 이 재판에 응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실 이 공소장의 말들은 대부분이 사실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만 그것들이 '목회활동을 빙자'하여 행한 것이 아니라 "모두 목사의 고유한 목회활동이고 선교활동이고 그러므로 검사가 기소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저는 혐의가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또 그런 것들은 나의 신앙양심에서나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신념으로 보아 전혀 범죄가 되지 않을 뿐더러 내 양심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주장을 검사의 주장이 부당하다는 것을 일일이 지적하고 쟁점을 풀이하였다. 내가 통일운동을 하는 것이나 그 근거로 내세운 주장들은 특별한 주장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은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고 목사로서 나는 그것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증언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리고 당시 한국 정부당국이 다르게 본 것뿐이다.

나더러 복음만 설교하고 정치를 설교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것은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한 소리일 뿐이다. 신학에서는 설교, 특히 불의의 정치나 사회적 죄악에 대한 비판을 예언자적 설교라고 부른다. 옛날 구약시대의 모든 예언자들은 말하자면 오늘의 재야 정치운동가와 마찬가지 지위를 가지고 활동한 사람들이다. 과거의 예언자가 곧 오늘의 설교자이다. 설교자는 과거 예언자의 전통을 이어 받아 예언자들이 수행했던 사명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인권유린이 있고 사회적 불의가 있고 반민주적 군사독재정권이 국민을 억압하고 박해할 때 오늘의 설교자는 비판적인 '정치설교'를 할 수밖에 없다.

나보고 좌경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독일의 빌리 브란트의 이야기를 말하곤 한다. 독일의 사회주의 지도자였던 그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그는 최근에 타계하였지만, 그가 살아있을 때 그는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좌익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받곤 했다. 한번은 극우적인 인사로부터 극좌란 비판을 받은 브란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전에도 지금도 이곳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당신이 오른 쪽으로 자꾸 가더니만, 이제 나보고 극좌라고 말하고 있소. 당신이 다시 이쪽으로 오면 돼오. 나는 극좌가 아니오.'

사실 나는 복음만 설교했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한 한 사람의 목사일 뿐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정치목사니 용공, 좌경분자니 빨갱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나는 정치학자도, 정치인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장치로는 민주주의가 제일 나은 것이라고 믿고 있고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 등을 믿고 있으며 생존권과 인권은 하느님이 주신 천부의 권리이고 정부나 국가가 주거나 빼앗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고 이를 정치생활에서 실천하도록 설교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개인에게 권력을 집중 또는 독점케 할 수 없고 권력을 분립시켜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민주주의 정치가 기독교적 윤리에서 가장 적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목사인 내가 반민주적인 군사독재정권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반민주세력과 투쟁해 왔다.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배타주의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배타주의적 민족주의자란 인종-민족 우월주의적이고 차별적이고 편협하고 전투적인 민족주의자를 의미한다. 나는 한국인이고 또 세계인이다. 나는 가정과 민족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속하고 하느님이 축복하신 인간 공동체의 단위임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민족의 해방과 자주와 독립은 의미 있는 민족의 삶에서 꼭 필요한 전제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북조선의 주체사상은 그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민족자주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믿고 있다. 통일을 위해서는 물론, 그때까지 남.북의 평화공존을 위해서 남쪽에서 주체사상의 연구가 필요하고, 특히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나는 북조선 출생이 아니다. 남쪽 부산 출생이다. 북조선에는 가보지도 못했으며 북조선 사람들을 만난 일도 없다. 다만, 민족분단의 희생자들의 고난, 특히 이산가족들과 실향민들의 고난과 상처와 아픔을 함께 하고자 하는 인도주의적인 정신과 예수의 사랑의 교훈을 믿는 목사이다.

나는 통일이론가도, 운동가도 아니다. 다만 민족분단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며 인간의 탐욕과 권력욕 등으로 빚어진 죄의 산물이라고 보고 그래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외치는 설교자이다. 나는 지난 반세기동안 분단되어 서로 적대하고 있는 남.북의 동족이 서로 화해하고 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교해 왔을 뿐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권하는 설교자이다. 바로 이러한 인도주의적 정신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장기수, 민주-통일인사들 등 양심수, 학생들, 노동자-농민들-도시빈민들 등의 생존권과 인권을 해결하기 위해 설교하고 운동을 했다면 했다. 불의를 규탄하고 정의를 세우라고 외치는 예언자적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설교하려고 노력해 온 목사이다. 나는 전쟁을 반대한다. 나는 핵무기를 반대한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고 그 실현을 위해서 힘쓰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본주의자가 아니듯이 나는 교조적인 사회주의자도 아니다. 다만 나는 경제적 평등과 사회정의와 인간다운 삶을 목표로 하고 있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꿈꾸고 있는 사람이다. 구테어 말한다면 나는 인도주의적,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다. 내가 민족통일과 평화를 주장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이유는 내가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이라기 보다 사실은 그보다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을 가지고 목회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검사의 주장을 나는 반박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고 믿고 있는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정치적 이해에서는 그것들이 전혀 죄가 되거나 징역을 살아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 뿐더러 국가의 안정이나 존립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행위라고는 없었다고 믿는다. 다만 군사독재 정권이 그 존립에 위협을 느꼈을 뿐이었다.

어떤 사회가 민주사회냐 아니냐의 시험대는 민주화를 주장하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누리려는 사람,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사람이 박해를 받느냐 안느냐, 그 사회의 민중들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과 인권과 복지가 얼마만큼 보장이 되고 있느냐, 그 사회에서 물질 보다 도덕, 산업 보다 환경, 전쟁 보다 평화, 제도나 이념이나 체제 보다 인간이 더 귀하게 여겨지고 존중을 받느냐는 등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나는 장장 두시간이 넘는 긴 시간에 걸쳐서 검사의 기소내용을 반박하고 내 자신을 변호하였다. 진술하는 동안 청중으로부터 여러 차례 박수가 나왔고 그 때 마다 검사가 불평을 했지만, 재판장은 한 두 차례 주의를 주었을 뿐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나의 모두진술의 맺는 마지막 문단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맺는 말씀으로, 이 공소장에서 지적하고 있는 말과 활동들은 대부분 제가 한 말과 행동이고, 또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평가와 결론이 엉뚱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말들과 행동들은 제가 목회자로서 목회와 선교의 활동으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말과 행동들은 국가의 존립이나 안전을 조금도 위태롭게 한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국가의 안전이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반민족 자주적, 반국가적 정책이나 태도들을 비판했고 대안을 내세웠을 뿐입니다. 저는 자유민주주의적인 기본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하여 비판했고 그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회복하고 보호하려고 노력했지 그 반대가 아니었음을 말씀드립니다."

내 모두 진술이 그렇게 까지 길 줄 나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사람들의 말이 2시간 20여분이나 했다고 하였다. 아마 모두 진술을 길게 하기로는 내가 기록을 세웠는지 모르겠다. 이날은 내 모두 진술하는 것으로 끝이 났고 다음 개정 일자를 정하고 폐정하였다. 폐정되었을 때 다시 한 번 큰 박수를 받는 가운데 내게 가까이 온 몇 사람들과 인사를 하다가 교도관에 의해 제지되고 나는 옆방으로 끌려나갔다. 옆방으로 나왔을 때 교도관들은 매우 존경하는 태도로 나를 대하면서 진술을 잘 했노라고 말했다.

그날 아래 지하실로 내려오니 10 여명의 피의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나 때문에 구치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증인 채택과 증언

이후 거의 2주에 한 번 꼴로 공판을 계속하였다. 공판은 대개 검사의 심문, 변호사의 반대심문, 증인의 진술, 판사의 직접 신문, 결심공판, 선고공판 등이 따랐다. 이 재판의 증인으로 내가 변호사를 통해 신청한 사람들은 정부의 정책과 법에 관련하여 장관들을 증인으로 출두하여 진술할 것을 신청하였다. 정부의 통일정책과 관련하여 통일원 장관을, 노대통령의 7.7 선언과 관련하여 외무부 장관을, 국가보안법과 관련하여 법무부 장관을 각각 증인으로 신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판사는 검사의 건의를 받아드려 장관들이 국사에 바쁘다는 실장 또는 국장으로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들 마저도 바쁘다는 이유로 법정에 출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법원의 출두명령을 무시하는 관리들에 대하여 판사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점이었다.

그리고 이들 이외에 피고인에 대해 증언할 증인들로 나의 신학교 스승이신 문익환 목사(당시 안동교도소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고 계셨다), 통일신학동지회와 관련하여 동지회의 부회장이었던 박순경 박사, 역시 통일신학동지회 총무이고 나와 신학교 동창이고 친구인 손규태 박사 등과 미국의 엔시시 회장으로 있으면서 통일운동을 하고 있고 내가 미국에 있을 대 북미기독학자회와 통일운동을 함께 하였고 나가 미국에 있을 때 같이 미국장로교 소속 목사인 이승만 목사, 뉴욕에서 목회하고 있고 같은 미국장로교 소속 목사이며 동지인 안중식 목사 등을 신청하였다. 특히 문익환 목사를 신청한 것은 신학교 스승으로서 제자인 나에 대한 성격증언을 하고 같은 목사로서 통일운동을 하게 되는 신학적인 이유를, 그리고 이승만 목사는 북한 기독교 교회에 대하여 증언하도록 신청한 것이다. 검사는 북한의 기독교를 가짜라고 보기 때문에 북한에 직접 가서 보고 온 이승만 목사의 증언을 듣자는 것이다. 재판부와의 절충으로 손규태 박사, 배태진 목사, 뉴욕시에서 목회하고 있던 안중식 목사만 채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청을 받은 안중식 목사는 나를 위해 증언하기 위해 뉴욕에서 김포공항까지 왔다가 입국이 거절되어 도로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검찰 쪽에서 그를 막은 것 같았다.

손규태 목사와 배태진 목사, 등은 모두 법정에 나와서 나를 위해 유리하고 좋은 증언을 진술해 주었다. 손 박사는 특히 통일신학동지회의 성격과 내가 독일 크리스챤 아카데미로부터 학회참석의 초청을 받았다가 통일원의 북한동포접촉신청거부로 좌절된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주최 통일에 대한 대화모임에 대하여 잘 증언해 주었다. 배태진 목사는 그가 아는 홍근수 목사와 순수한 통일운동 지도자로서의 위치와 훌륭한 점에 관해서, 그리고 최근에 일본에서 열렸던 남.북 기독교인들의 만남에 참석하고 돌아온 그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좋은 진술을 해주었다. 너무나도 고마웠다.

증인들의 진술 직후에 판사는 내게 직접신문을 하였다. 이것은 유례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날 판사는 공산주의가 인도주의라고 한 나의 주장(KBS 심야토론에서 한 말), 김일성에 대한 나의 평가, 주체사상에 대한 나의 견해 등을 물었다. 그 때 그는 피고인인 나를 두둔한다고 까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히 유리한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물었다. 가령 그는 내가 공산주의는 인도주의라고 말할 때 그 공산주의는 원시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또 그는 '김일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마디로 '난 사람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순간 판사는 좀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곧 다음 질문을 물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가 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학적으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20년 이상 권좌를 유지하면 그는 영웅으로 보는데 김일성은 20년의 배가 넘는 근 반세기를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는 점, 세계에서 최강대국과 전쟁하여 패전하지 않았다는 것, 6.25로 완전히 초토화된 북한을 맨 손으로 오늘의 북한으로 건설한 것, 특히 오늘의 저 아름다운 평양이란 도시를 건설한 것, 북한 2천만 동포를 먹여 살리고 발전하게 한 것 등으로 볼 때 그는 정말 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이 대답이 결정적으로 내가 2년 징역선고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대답은 그 후에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날 판사가 직접 신문을 한 것도 이례적이라고 했고 또 그가 질문하는 것이 나를 도와 주려고 하는 것이라고 믿고 다음 번에 있을 선고공판에 정호영 판사에게 크게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석방의 꿈 무산되고

검사의 5년 징역구형

7번째의 공판, 결심공판이라는 것이 7월 30일(화)에 열렸다. 이날 안종택 검사가 논고를 하였다. 그는 피고인의 교육적 배경이나 사회적 신분으로 보아 이런 중대한 범죄를 행한 만큼 중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하면서 징역 5년형, 그리고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해달라고 구형을 하였다. 나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아찔하였다. 그것은 내가 혹 석방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런 기대를 가졌던 것은 내게 대한 검사의 태도나 국내외적으로 탈냉전시대와 공산국가들과 수교하고 있는 정부의 북방정책이나 서울과 평양으로 다니면서 남.북 정부의 총리 급 회담을 성공적으로 잘 하고 있는 점 등을 생각할 때 아무리 공안 검사라고 하더라도 초범인 나를 석방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대와 너무 엄청난 차이로 5년 징역을 구형하였다는 데 대하여 나는 큰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내게 일어난 생각은 아마 이 검사는 판사가 집행유예를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났다.

검사의 구형이 끝나자 정호영 판사는 변호인에게 변론을 하게 했다. 조준희 변호사가 먼저 일장 연설을 하였다. 매우 파워 풀레이적인 변론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어서 박인제, 김칠준 변호사의 변론이 있었는데 특히 김칠준 변호사는 매우 감동적이고 때로는 울먹이면 한 그의 변론으로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키었다.

최후진술

결심공판은 검사의 구형과 피고인의 최후진술로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관례에 따라 판사는 검사의 구형을 들은 피고인이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최후진술을 하겠느냐는 말이었다. 나는 준비해 온 최후진술서를 꺼냈다. 읽을 필요가 없기를 그토록 바랐던 최후진술서를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인사의 말을 한 다음 나는 당시 나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구형을 들은 저의 심경은 착잡하고 제 느낌은 엇갈리는 것입니다. 우선 슬픕니다. 제가 유죄로 구형을 받는 데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하지만, 그런 뜻에서 슬프다기 보다도 공안검사가 나 같은 사람에게 징역을 구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민족의 현실이, 이 정권의 현실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렇게 변했고 또 제가 구속되었던 6개월 전과 오늘이 또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여전히 검사는 국가보안법으로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양심적 통일, 민주화 인사들에게 징역을 구형하고 있으니 그것이 슬프다는 것입니다. 언제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우리 사회에서 집어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한편으로 제 개인의 생에서는 뜻깊은 일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이 나라의 양심적 인사들의 대열에 이 부족한 사람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만, 꽁무니에나마 서게 되었다는 것이 제게는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느낍니다.....5년 구형을 받았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기쁜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 최후진술에서 오늘날 정부에서 국내적으로는 반공, 국제적으로는 친공의 정책을 쓰고 있어 국민에게 혼란을 주고 있는데 대하여 조지 오우웰(George Orwell)의 1984에 나타난 '이중사고'를 가지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전쟁은 평화다, 자유는 노예다; 무지는 힘이다'는 등이 대표적인 예라는 것을 말하고 한 정부가 반공과 친공을 동시에 내세우고 있는 것을 다름 아닌 오웰의 '이중사고' 개념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이중사고에 의해 왜곡되고 비뚤어진 사고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분단은 통일이다.

통일은 반공, 멸공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이다.

군사독재는 한국식 자유민주주의다.

언론, 출판, 사상과 신앙의 자유는 국가의 안전존립에 위협이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의 해악이다.

민족자주는 미국의 보호와 종속 아래 있는 것이다.

정부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자는 좌경, 용공, 불순분자이다.

재야운동권과 학생운동권은 극좌, 빨갱이들이다.

휴전은 평화다.

평화는 핵무기, 미군주둔, 군비증강이다.

법 정의란 큰 도둑은 석방되고 좀도둑은 징역사는 것이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대권잡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면 그것은 선이고 아름답고 위대하다.

억울하면 육사 가라, 대통령 되려면 육사 가라.

민족주의 말하는 자는 빨갱이다.

반미, 반전, 반핵은 곧 친북, 반한이다.

북한의 기독교는 대외 선전용이고 위장된 것이다.

북한의 목사는 남북 기독인간의 교류를 빙자, '국내의 종교인과 종교단체를 대상으로 대남적화 선전선동활동의 일환이다.'

북한 공산주의 사회는 거지들이 우굴거리는 생지옥이다.

북한은 모든 것이 남한 보다 열세지만, 군사력만은 우세하다.

북한은 유엔에 가입했어도 반국가 단체이다."

나는 최후진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내가 믿고 있는 정치윤리를 나의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그것은 왜 내가 민주화와 민족통일.평화운동 등을 위해 액티비스트로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신앙고백은 새로운 내용이기보다는 저서나 단편적인 글들을 통해서 이미 발표된 것을 통일에 관해서,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공산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하여, 평화. 군사주의 등에 대하여로 모두 네 분야로 나누어서 28개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각 항목에 대한 나의 고백을 가장 대표적인 것을 한 두 가지 씩 든다면 다음과 같다:

통일에 대하여: "나는 '민족의 화해, 통일, 평화의 실현이상의 최대. 최우선 선교과제는 이 땅의 교회에게는 없다'고 믿는다."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나는 '이데올로기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절대적 가치도 아니다'고 믿는다."... "나는 '시민의 기본적 권리로 제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민주주의는 자유와 함께 평등이 실현되어야 하고 이것이 전제가 된다'고 믿는다. '평등은 적어도 네 가지 영역에서의 평등, 곧 정치적 평등, 법 앞에서의 평등, 경제적 평등, 사회적 평등이다.'"

공산주의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하여: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남한 사람들 뿐 아니라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위한 것이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평화, 군사주의 등에 대하여: "나는 '군사주의는 생명을 부정하는 주의'이고, '생명의 반(反) 명제여서 적국이 아닌 자국의 국민이라도 죽이는 일을 자행한다'고 믿는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외국군의 주둔과 핵무기의 존치와 군사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명백히 반(反)기독교적이다'라고 믿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심정과 결의를 가장 간략하게 잘 나타내는 기도이고 노래인 "새날에 선 겨레여"의 가사를 인용하고 최후진술을 모두 마쳤다.

이 최후진술은 모두진술 만큼 길지는 않았지만, 아주 짧은 것은 아니었다. 거의 2시간 가까운 긴 진술이었다. 특히 최후진술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의 신앙고백을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구치소에서 많이 불렀던 노래, "새 날에 선 겨례여"의 가사를 읽었다. 그 노래가 당시 나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검사가 목사님을 대접했군요."

나는 긴 재판의 과정을 거쳐 결심공판이란 것을 마쳤다. 이 날 오후에 검사의 5년 구형으로 어쩌면 석방될지 모른다는 나의 일루의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그런 희망을 가진다는 것이 결코 무리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었다. 내가 한 일이란 것이 별 것이 아닐뿐더러 최근 급격하게 변한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도 이 집이 철폐되거나 전적으로 새로 수정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징역 5년의 구형이라니 나는 그 순간 정말 얼마나 아찔하였는지 모른다. 석방이 5년의 징역을 검사가 구형을 했으니 나는 너무나도 화가 났었다. 구치소에 밤에 돌아와서 한 교도관의 인도로 2 관구 2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오늘 내가 결심공판에 나갔던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그 결과를 물었다. 나는 여전히 화가 나서 '그 망할 놈 같은 검사놈이 나에게 징역 5년이나 구형을 했다.'고 씩씩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런 분노 섞인 말을 하려니 자연히 열이 올랐는지, 아직도 법정에서의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몹씨 흥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교도관은 전혀 뜻밖의 이야기로 내게 반문하는 것이 아닌가? '그 검사가 목사님을 잘 대접하였군요. 그만하면 목사님의 체면을 세워주었네요. 만일 목사님 같은 분에게 1년만 구형을 했다면 아주 업신여기는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렇구나!' 라고 생각되었다. '정말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라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같은 일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렇게 달리 보이는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최후진술서 보충서 제출

검사의 5년 징역 구형은 확실히 나를 당황케 하였다. 많은 교인들도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적어도 나는 내가 설령 유죄가 되더라도 내가 초범인 데다가 '죄상 '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어서 검사가 3년이나 2년 정도의 구형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판사가 나와 원수진 것이 없는 바에 유죄를 판결하더라도 집행유예정도로 석방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기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징역 5년을 구형하면 집행유예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렵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안 검사의 구형은 예상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선고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하였다.

교역자들을 통해 김칠준 변호사 면담을 부탁하였다. 뜻밖의 중형의 구형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김칠준 변호사에게 말했다. 그는 정호영 판사를 만나 본 이야기를 하면서 정 판사가 목사님을 잘 보고 있는 만큼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다만, 지난 번 최후진술이 종 강하다고 하면서 보충 진술을 제출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나는 선고공판 전에 보충진술서를 작성하여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내용이 바꾼 것이거나 새로운 것을 첨가한 것은 없었다. 다만 항목별로 간결하게 정리하였을 뿐이다.

꿈에 선고받은 2년 징역이 현실로

오늘은 내 생일이자 8.15 46돌의 날이다. 보통 이날을 광복절이니 민족해방의 날이니 라고 이해해 왔었다. 그러나 이 날은 실상 민족분단의 시작의 날이라고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젊은 역사 학도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날은 나의 송별회 날이었다. 민중의 소리 방송 시간에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여 했다. 송별회라는 것은 대개 선고공판 전날 석방될 가능성이 있는 동지들에게 잘 되기를 빌고 또한 선고공판에서 무죄나 집행유예가 선고되면 그는 감방에 다시 돌아오지 않고 구치소에 온후 대기실에서 준비를 하고 검사의 지휘서가 떨어지면 바로 석방되어 나가기 때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전날 밤에 송별회를 가지는 것이다.

내일 선고공판에서 석방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모두가 믿었다. 그동안 밖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가서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고 남.북 간 고위층 회담(국무총리를 수석으로 하는 남.북 정치회담)이 잘 진행되어 가는 등 사정으로 미루어 보거나 내가 초범이고 또 내가 범했다는 죄들이 별 것이 아니라고 볼 때 내일 선고공판에서는 아마 석방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무죄선고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구형이 5년이어서 조금 힘들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집행유예는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많은 다른 동지들은 실제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모두 그렇게 될 것으로 말을 하고 송별회를 해 주었던 것이다. 송별회란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잘 되기를 비는 뜻의 말을 해 주고 작별인사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짐을 다 꾸려놓았고 나갈 준비를 다 하고 구치소에서 마지막 밤을 잔다고 생각하니 흥분되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몸을 뒤척거리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잠이 들었고 아침에 기상 나팔 소리 전에 잠이 깨었다. 확실히 나는 흥분해 있었다.

지루하던 여름만큼이나 지루하던 재판이 이제 끝날 즈음이 되었다. 그 마지막 공판날인 선고공판 날이 마침내 왔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 다음날인 8월 16일(금)로 정해진 운명의 날이 마침내 왔다. 나는 나의 생일 선물로라도 내가 석방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물론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뻐스에 실려 법정으로 갔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과 걱정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 걱정은 주로 교회 때문이었다. 나는 선고공판을 앞두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나의 기도의 중심적 내용, 나의 자세는 '죽든지 살든지 주 뜻대로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이날 정호영 판사의 얼굴이 지난 몇 달 동안 보아온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있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몇 분 만에 피고인에게 징역 2년형, 자격정지 2년을 선고한다고 말하고는 도망치듯이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방청객들은 일제히 작은 신음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이 내 귀에까지 들려 왔다.

교도관들은 나를 급히 옆방으로 떼밀고 가서 문을 닫았다. 문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손목에는 다시 수갑이 채워지고 밧줄이 동여 메어져서 아래층 감방으로 끌려 내려왔다. 마지막 사람이 내려오도록 오래 기다리고 있던 피의자들은 내가 내려오자 비로소 뻐스를 타기 시작하였다. 나의 마음은 천근만근이나 더 무거운 것 같은 무게를 느꼈다.

나는 그날 구치소에 돌아와서 다시 들어오고 싶지 않던 내 감방으로 다시 들어왔다. 너무나 마음이 우울하고 무거웠다. 짐 봇다리를 끌를 생각도 못한 채 우두커니 앉아서 초점 없이 화장실 창 쪽으로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저녁 방송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왜 때 아니게, 보통 때 일직이 본 일이 없는 장엄한 종교음악들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마태 수난곡 같기도 하고 장엄한 장송곡 같기도 한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음악이 상한 나의 마음을 스다듬는 것 같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향수 비슷한 감정을 내 마음 속에 일어나게 하면서 나를 치유하는 듯 했다. 다음날 신문을 보고 안 일이지만,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집행이 있었다. 사형집행이 있은 날에는 아마 그런 음악을 내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 날 처형된 사형수 가운데는 우리 사동에 있으면서 내게 한 번 상담을 하고 착실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형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선고가 내려졌을 때 당시 나의 심정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서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해 했던 순간을 회상하고 또 회상하였다. 당시의 나의 심정을 그때 김경호 목사 앞으로 보낸 나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었다:

"......판결문에서는 검사의 기소문을 하나도 에누리 없이 다 유죄로 하니, 실로 어처구니 없었소. 과거 20여 년 간 순수 목회했고, 바른 목회를 위한 연구활동을 인정하고, 과거에 어떤 전과도 없고 이번이 처음인 점을 감안하여 징역 2년 실형을 내린다니, 그런 것을 참작하지 않으면 검사의 구형보다 더 중형에 처할 번한 것인지? ....지금 민주, 통일운동 하는 재야인사들이 싸그리 잡혀 들어와 있는데 나 혼자 나가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잘못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보고 생각할 때 별 뚜렷하게 한 일이 없는 내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석방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고 또 재판부를 신뢰했던 것이 배신당한 느낌, 정말 주체할 수 없었소."

나는 선고를 받으러 법정으로 나갈 때 가지고 있었던 내 마음의 희망, 생일 선물로 석방이라는 말을 판사의 입에서 기대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날 새벽의 꿈에 들은 징역 2년이 현실로 된 일, 등을 떠올리면서 생일선물 치고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고 이상한 선물에 대하여 무슨 의미인가 하고 이상하게 여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앞날이 걱정스러워

내가 2년 징역선고를 받고 뻐스에 실려 오면서 내내 내 마음에는 온갖 걱정이 일고 지고 했다. 그것은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어떻게 되고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걱정은 다음날 조간 신문을 보고서 어제 선고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나에게 2년 징역을 선고한데 대하여 향린교인들이 항의하여 바로 그 법정에서 항의기도회를 가졌다는 것, 그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지만 곧 석방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다음날에 면회 온 교역자들로부터 소식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 날 법정에서 가졌던 항의기도회와 시위에서 우리 교회 청년들이 몇 사람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곧 나왔고 그 날 밤 교회에서 기도회와 성찬식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2심을 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의 요청에 의해 김칠준 변호사가 와서 변호사 접견을 하였다. 징역 2년 선고는 김 변호사도 의외라고 하면서 아무래도 판사의 직접 신문과 최후진술서가 강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였다. 그러나 2심에서는 잘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전망할 뿐 더 이상의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교회가 그렇게 석방운동을 줄기차게 해 오고 있는 것을 보고 감동되어서라도 하느님은 나를 석방해 주리라 믿었으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날 밤 꿈에 내가 징역 2년이라는 소리를 두 번씩이나 확실하게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법정으로 나가는 나의 심정은 야릇하게 엇갈리는 생각으로 차 있었다. 2년 징역을 선고받고 돌아오는 뻐스에서 나의 심정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생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징역 2년이란 실형을 언도 받은 나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실로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그것이 교회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1심 언도를 받고 사흘 후에 김경호 목사에게 보낸 나의 편지에서 그것이 잘 피력되어 있었다:

"또 제 마음을 떠나지 않는 의문은 내가 이러한 상황에서 2년 간이나 교회를 떠나있어야 하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번에 1심에서 석방되는 경우를 생각하여 고민이 없지 않았습니다. 지금 재야의 민주, 통일인사들이 싹쓸이하듯이 다 잡혀 들어 온 이 때 나 혼자 석방되어 나가면 그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고 어떻게 처신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교회로서는 자연히 내가 교회내의 대내목회에 더 전념해주기를 바라고 밖의 일에는 좀 관여를 적게 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을 것인데, 그러나 객관적 상황은 내가 밖의 일에 더 시간을 내어주었으면 하는 기대일 테니 그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용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큰 고민이었소. 또 무죄석방은 아예 기대 못한 것이니 집행유예가 되었을 텐데 그것은 손발을 묶어 놓는 것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목회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면 1년 실형을 살고 나가면 오히려 그것이 더 낫다는 것이었습니다....빌라도나 가롯 유다가 예수님에게 한 일은 분명 어처구니없는 일이고 못할 짓을 했지만 (그래서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예수님도 언급하셨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습니까?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이번 일도 이렇게 양면성이 있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

우리 민족을 비인간적으로 분단시키고 있는 세력, 그로 인해 불필요한 수난을 당하게 이 땅의 민중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민족적 모순을 묵과하거나 방관적이 된다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을까요? ...."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향린교회의 창립지도자이신 홍창의 장로님의 "향린교회의 정신"에 대한 분명한 피력에서 얻을 수 있었다. 그는 향린교회의 남신도회 수련회에서 다음과 같이 중요한 사실을 천명하였다:

'역사를 외면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싸구려 은총이나 파는 그런 부끄러운 교회가 얼마든지 있는 이 땅에서 역사 앞에 책임을 지는 교회가 향린교회의 역사이며 정통성이다'

향린교회의 창립정신과 정통성이 그러하다면 그 교회의 담임목사인 내가 통일운동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유죄판결을 받고 죄수로 징역을 사는 것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고 향린교회 담임목사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당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의 '운명'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항소를 제기하면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다. 내가 그 꼴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검사와 판사와 변호사들이 모두 내 학교 동창들이고 후배들이었다. 변호사 한분 만 나와 법대 클라스 메이트이고 나머지는 모두 까마득한 내 후배들이었다. 법대 동기동창인 조준희 변호사는 우리나라의 법조계의 '원로'이고 민주변호사이고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들만을 믿고 석방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국내외의 정세의 변화와 국내 정계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를 논의하고 있었고 남.북 간에 총리 급 회담이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되고 있었고 세계사적으로는 냉전의 시대가 거하고 새 시대가 왔다. 그래서 반공주의나 사상은 완전히 원인무효가 되고 무력해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런 것을 믿었다. 그런데 나는 2년 징역 형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그것도 믿었던 판사로부터 그런 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을 통해서 분명히 안 것은 재판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이다. 안기부 수사관은 수갑을 내 손에 채우고 구속하고, 검사는 인상을 쓰고 기소하고 구형하지만, 판사는 미소를 지으며 악의 없는 유죄선고를 하는 것만이 다르다. 내가 오랜 세월동안 1심 재판을 하면서 몰랐던 것도 아니요 교훈을 못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항소를 하여야 했다. 미련한 것은 인간인가 보다. 나는 2심에서는 혹 잘 되어 석방될지 모른다는 희망과 기대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또 교인들이 그렇게 석방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항소하여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는 1심의 선고를 불복하고 항소를 하였다. 법 규정은 선고 후 1주일 이내에 항소를 하거나, 아니면 자동적으로 포기로 간주, 선고가 확정된다고 하였다. 나는 변호사들과 상의한 후 선고받은 다음날인 8월 17일(토)에 항소를 제기하였다. 이로서 나는 다시 미결수로 서울 구치소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었다. 예외적인 경우에 재판 중에, 또는 1 심이 끝나고 항소하는 경우에도 안양교도소로 이감 갈 수도 있으나 나는 그대로 있게 되었다. 이것도 교도소장의 배려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항소 이유서

검사의 항소이유는 '친북 로비스트의 일원'에게 2년 징역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내가 항소를 제기하기로 한 이유는 달랐다. 항소 이유서를 통해, 또 공판에서 모두진술, 최후진술 등에서, 그리고 검사의 심문과 변호사의 반대심문 등의 기회를 통해서 1 심 선고의 부당성을 토론하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나는 검사의 기소문을 그대로 판결문으로 한 이 나라의 사법 관행을 문제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항소제기 후 얼마 후에 검사의 항소 이유서라는 것을 받아보게 되었다. 검사가 항소 이유서를 제출하는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 생각에는 피고인이 항소를 제기하면 검사는 자동적으로 항소하는 식인 줄 알았다. 내가 항소를 하지 않았더라도 검사가 항소를 제기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검사는 5 년 구형에 대하여 그 절반도 안 되는 2 년 징역을 선고하였다는 데 대하여 불만하여 항소를 제기해야만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검사의 항소 이유서에서 내게 대한 기상천외의 비방을 보고 크게 충격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나를 북한의 지령을 받아 활동하는 '친북 로비스트의 일원'이라고 중상하였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그런 자와 따따부따할 필요가 없는 것을 부질없이 항소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런 검사와 토론을 한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기며 우의독경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항소를 해 놓은 것을 물릴 수 있겠는가?

피고인의 항소이유 : 법의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내가 항소를 한 이상 항소 이유서란 것을 제출하여야 한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항소를 제기하지 않았는가? 나는 항소를 제기하고 2심 공판이 시작되기까지 꽤 오랜 세월동안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평정하여 나의 항소 이유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나는 항소 이유서에서 1심 판결이 나를 유죄판결하고 2 년 징역이란 실형을 선고한 것 때문에 항소를 제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 보다도 그 선고의 근저에 있는 가치관이 문제이고 나는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항소를 제기하는 이유는) 형량이 무거워서나, 내가 희망한 대로 판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항소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1심 재판의 판결이 법의 정의를 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의 정의를 무너뜨렸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나는 1 심 판결은 "법 상식에 위배될 뿐 아니라 반민주적 가치관에 근거하고 있다."고 나는 지적하였다. 1심 판결 이유를 하나씩 하나씩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그리고 나는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부정적인 접근으로 무엇이 자유민주주의가 아닌가 라고 29개 항목에 걸쳐서 말하였다.

그 중 일부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정의, 인권, 평화, 민족자주, 통일, 반전, 반핵, 반 외세 등을 주장하면 죄가 되는 정치"를 하고 "양심수, 사상범, 정치범이 1,600여 명이 교도소, 구치소, 경찰서, 안기부에 넘치는데도 밖에 나가서는 우리나라에 정치범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는 대통령"이 다스리는 나라나 "검사의 기소장을 그대로 베껴 판결문으로 만드는 판사"가 있는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교에 관한 것들로 나는 "목사 등 성직자의 종교적 활동과 설교내용 등을 기소하면서 북한은 반 종교, 무신론적 유물주의 사회이고 종교자유가 없는 사회라고 우기는 정부" 나 "세계기독교가 공인하는 해방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잡아 가두는 정부"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다.

나는 검사의 항소이유서의 내용을 논박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나를 친북 로비스트란 억지 주장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섬기며 복종하고 책임을 지며 궁극적으로 충성을 돌리는 대상은 내게 지령을 내리는 하느님, 오직 하느님 뿐이다."

그 외에도 나는 이번 기회에 1심 검사의 공소장과 항소이유서, 그리고 1심 판사의 판결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반박하였다. 나는 긴 항소 이유서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맺었다:

"이 정권의 창과 방패로 자처하는 공안검사가 정권의 비판자들에게 '친북 로비스트 조직'을 또 조작해 덮어씌우는 모양이지만, 장장 125 매나 되는 공소장에서 수없이 북한고무, 찬양, 동조, 이적행위, 이적단체 결성 등을 반복하고도 아직 성이 안차서, 아니면 공소유지가 어려워서 이제 친북 로비스트 조직을 들먹이는지 모르겠다. 뒤틀린 시대, 병든 권력에 봉사, 충성하고 출세를 위해 '친북 로비스트 조직의 일원'을 만들어내야 하는 검사의 고충에 대하여 깊은 동정과 안쓰러움을 함께 느끼면서 나의 항소 이유서를 마치기로 한다."

고등법원의 공판 : 흥분 없는 놀이

2심은 좀 수월하고 다소 덜 긴장되었다. 1심의 공판을 받으면서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1심과 비슷한 절차로 공판이 진행되었다. 변호사를 선임하였다. 1심의 변호사들을 그대로 선임하되 최병모 변호사만은 사실상 일하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일하기 어렵다고 하므로 자원한 박용일 변호사로 교체하였다. 검사는 본래 같은 검사가 맡는 것이 원칙이나 무슨 이유인지 교체되었다. 그는 안종택 검사보다는 인상도 좋고 사람이 잰틀맨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재판부는 고등법원 형사합의 5부였는데 주심에는 권광중 부장판사가 맡았다. 그도 역시 나의 법대 후배였음은 물론이었다. 그도 인상이 아주 좋은 분으로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증인으로 범민련 관계가 중요한 쟁점인 것을 감안하여 준비위원장인 문익환 목사와 그 위원의 한 사람인 이관복 선생을 채택하였다. 재판부는 우리측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문익환 목사의 경우 안동교도소에서 경호 등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변호인들이 직접 안동지법에 가서 증인심문을 하도록 결정함에 따라 변호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문익환 목사에게 변호인 심문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만하면 판사가 상당히 호의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관복 선생은 법정에 출두하여 직접 증언하였다.

판사는 비교적 열린 자세였으나 공판을 아주 기계적으로 임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개방적인 태도는 역시 갇힌 사람인 나에게는 기대를 걸게 하였다.

1심 때의 5년 징역형 구형을 반복한 검사

결심공판에 고등검찰청의 검사는 1 심 때의 지방검찰청 소속 검사와 다른가 하는 것이 물론 나의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상식으로 보더라도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1심 때의 안 검사와는 달리 매우 인상 좋고 젊잖케 생긴 얼굴을 한 검사는 법정에서 인상을 쓰지도 않았고 오히려 나를 동정하는 듯한 태도마저 취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1 심 때와 마찬가지로 5 년 징역형을 구형하였다. 검사가 바뀌어도 검사일체 원리로 1심 검사가 요구한 것과 같은 구형을 내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이날 조준희 변호사는 원고 없이 즉석 연설로 최후변론을 하였다. 사실은 이날 그가 법정에 오면서 자동차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남.북 합의서 채택에 대한 방송을 들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세상이 이렇게 변했고 독재정권마저도 북한과 화해하고 합의서를 체결한 이 마당에도 검사는 구태의연하게 악법인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재야 양심 세력인 목사에게 5년 구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정권의 위선과 기만을 통박하였다. 남북합의서는 그 정식 명칭은 "남.북 화해.불가침.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였다. 이를 두고 언론은 '분단이후 최대의 쾌거,' '남북화해 시대열렸다'고 대서특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 정권간의 합의는 바깥 세상에서만 떠들 뿐 이 검사의 귀에는 마이동풍이었을 뿐이다.

두 번째 송별회

나는 오늘 민중의 소리 방송 시간에 송별회를 가졌다. 이번으로 두 번째 송별회를 가진 셈이었다. 내일 선고공판에서 석방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모두가 믿었다. 그동안 공판에 대한 보고를 정치수 동지들에게 보고했고 또 밖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등 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내일 선고공판에서 석방이 거의 확실시되었기 때문이다. 대개 2심에서는 1심보다 형량이 깎이는 것이 보통이고 내가 무죄선고가 아니라도 형기가 2년에서 깎이면 유죄판결이 되더라도 집행유예를 판사가 선고할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번에 석방되리라고 믿었다. 다른 동지들도 그렇게 믿어 송별회를 해 주었다. 모두가 내가 잘 되고 내일 꼭 석방되기를 바라고 축하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 번같이 석방 대신 다시 감방으로 돌아오게 되지는 않을지?

죄수의 몸이 되어

다시 유죄판결을 받고

선고공판의 날이 왔다. 이날은 내가 구속 된지 10개월 째인 12월이고 또 묘하게도 나의 결혼기념일 하루 전날인 18일이었다. 나는 그래서 내가 석방된다면 그것은 영에게 더 할 수 없는 결혼 27주년 기념선물로 되기에 안성 마침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것을 간절히 희망하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희망과 기대는 큰 실망으로 나타났다. 권광중 판사는 징역 1년 6개월,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하면서 끝내 집행유예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말았다. 그래서 1심에서 6개월이 감해졌을 뿐 징역실형이 선고된 것이었다.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남북합의서가 교환되었다고는 하나 법률적으로는 하나도 변화한 것이 없다." 판결이유를 말하고는 내빼다 시피하고 바람을 일으키고 돌아서 나갔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고등법원 법정 안에서는 남.북 합의서 같은 것은 전혀 효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마치 이 법정이 남.북 합의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양, 아니 그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 냥, 딴 외국 법정인 냥, 판사는 이 나라의 양심세력이 악법이고 무효화된 법이라고 규정했고 지금 여당의 대표로 있는 이가 야당 총재였던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악법이어서 철폐해야 할 법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 국가보안법이란 것에 근거하여 내게 유죄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결혼27주년 기념선물로서 주문된 석방은 끝내 오지 않았다.

검사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판사는 좀 다르리라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1심의 주심이었던 정 판사는 소위 정치판사로 이름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고등법원의 권 판사는 정치판사로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다르리라고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결국 군사독재하의 판사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인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권 판사는 자신은 청산되고 타도되어야 할 구 질서의 일부라는 것을 스스로 천하에 선포한 셈이 되었다. 나는 그의 판결에 의해 징역을 사는 것이 억울하거나 분하다는 생각보다 그런 판결을 내리지 않고는 법관 노릇을 못하는 그 판사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큰 연민의 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보따리를 다시 풀고

나는 오늘 선고공판에서 석방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어제 송별회도 했고 짐도 다 싸 놓았던 것이다. 나는 법정에서 그 선고를 받는 순간부터 내 마음을 좌절과 슬픔으로 주체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는 큰 상처 입은 마음으로 내가 그렇게 다시 보고싶지 않던 구치소 감방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살장으로 죽임을 당하러 가는 소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순순히 끌려간다지만, 나는 정말 끌려가고 싶지 않아 몸부림쳤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끌려가기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감방에 들어와서 그 짐 봇다리를 다시 풀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앞으로 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야 몇 년을 징역을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되었으나 교회가 걱정될 뿐이었다.

나는 너무나 마음에 상처를 입고 상심하고 좌절하여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날 따라 복도의 래디오 방송은 무거운 음악을 내보냈다. 그것은 수난절 음악 같았다. 사순절도 아닌데, 그것도 보통은 가벼운 유행가나 경음악 등의 음악을 내보내는 것이 거의 예외 없는 일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나는 그 이유를 묻기 전에 그 음악이 그 날 오후 상한 나의 마음의 상처를 싸메고 상한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었다.

후에 안 사실은 그 날 서울 구치소에서 6명의 사형수에게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다. 그 음악은 바로 그래서 특별히 방송되었다고 한다. 그 날 죽은 사형수 가운데는 내가 있는 2동에 있는 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마지막을 예감했는지 며칠 전에 내게 여러 가지 신앙적인 것을 묻기도 했었다.

상고를 포기하고 기결수가 되다

고등법원의 판결에 불만, 불복하면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민주공화국 정부 형태로 3 심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경우 사실 심리를 하지 않고 서류심리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재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또 최근에 비슷한 국가보안법 사건이 대법원에 의해 그대로 유죄로 된 판례가 있다는 것, 1심, 2심에서 이미 속아 본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등등의 사실을 감안할 때 생각할 것도 없이 상고를 할 것 없다고 판단되었다. 더 이상 법적 투쟁으로 상고를 한다는 것은 공연한 시간 낭비임이 틀림없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상고를 포기하겠다고 교회와 변호사들에게 통보하였다. 법정 기일 내에 나는 상고를 하지 않아 곧 나는 확정범, 또는 기결수가 되었다.

나는 기결수로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지 교도소로 이감가게 되어 있었다. 그 날들을 기다리며 나날을 보냈다.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뚜렷한 목적이나 대상이 없이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더욱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