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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주일 강진읍교회

관리자 2015-03-27 (금) 10:54 9년전 1604  
2014 년 11 월 16 일(주일) 오전 11 시 주일낮예배 추수감사주일 강진읍교회
 
성경본문 : 빌립보서 1 장 1 절 ~ 6 절
제 목 : 생각할 때마다 감사!
 
■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강진읍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성가대 위에 존경하는 김승봉 담임목사님과 사모님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강진읍교회를 떠난 지 7 년째이고 날들을 오늘까지 따진다면 2245 일이 넘어 보통 인지상정으로만 말하자면 까마득한 기억으로만 남게 되는데 아직도 기억해 주시고 불러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리고 실로 여러 가지로 친동생 이상으로 저를 보살펴 주시고 늘 기도해주시고 추수감사주일이면 교회 절기 중에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데 또 사랑하셔서 불러주신 우리 목사님께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언젠가 제 가정사를 알고 계시는 한 분이 저에게 그랬습니다. “넌 니 머리털로 신을 삼아 드려도 널 길러주신 어머니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머리털로 신을 만든다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당시는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찬송가에 보면 그런 가사가 있지 않습니까? <머리털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 졌네> 머리털은 많은 것을 상징합니다만 절 낳지 않으셨지만 낳은 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며 길러주신 어머님의 은혜를 저 머리털 한번 잘라서 신을 삼아 드린다 한들 어찌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절 가지셨을 때 치명적인 질병이 있으셨는데 독한 약을 먹으면 아이에게 안좋은 영향이 갈까봐 병원에서 주는 약을 버리면서 저를 마침내 살리고 당신은 결국 죽으신 낳아주신 어머니의 그 은혜를 제가 지금까지 자란 모든 머리털로 신을 삼아드린다 한들 그것으로 어찌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갚을 수 없는 은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제가 2004 년 강진읍교회에 덜 갖춰진 담임목사로 와서 약 5 년 동안 일하면서 강진읍교회 성도님들에게 받은 사랑을 그리고 강진읍교회를 떠나서도 김승봉 목사님과 성도님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제가 만일 머리털로 신을 삼아 드린다한들 그것이 갚음이 되겠습니까? 대차대조표를 살펴보면 제가 그 사랑을 갚아나가는 것은 없는 가운데 제가 받은 사랑의 빚만 점점 더 많아질 것입니다. 저는 갚을 수 없기에 주님께서 어떤 형태로라도 우리 목사님과 성도님들 각자에게 갚아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도 바울에게는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을 것이고 자신이 개척해 놓은 교회들에게 서신을 통한 목회를 할 시간이 많아졌을 것이고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아시아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한 선교활동과 목회활동에 대하여 되돌이켜 보고 회상해 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일하게 유럽지역에서 개척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입니다. 감옥 안에서 빌립보교회를 회상하면서 편지를 쓰려고 보니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서 기쁨이 샘솟듯 차올라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빌립보교회를 개척하는 때부터 시작하여 한 성도 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들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생각해내면서 사도 바울은 너무도 기뻤고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이라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 오늘 성경본문 빌립보서 1 장 3 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기서 보면 사도 바울의 생각이 있고 사도 바울의 감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감사가 있기 전에 사도 바울의 생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이 감사와 바로 연결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하나하나 생각할 때마다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바꾸어나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생각할 때마다 이가 갈린다고 합니다. 생각함이 분노로 곧바로 연결이 됩니다. 생각함이 기쁨이 되어 긍정적인 에너지로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에너지로 표출되고 그것이 더 큰 분노로 연이어지게 되어 혈압이 터지고 뇌에 문제가 생겨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뇌의 메카니즘은 <생각과 감사가 직렬로 연결되는 구조>였습니다. 생각하면 단지 그것이 생각으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은 끊임없는 감사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감사를 하늘로 쏘아올리게 되고 하늘은 감사를 받고 그의 가슴에 기쁨을 심어주고 또 감사를 받고 또 기쁨을 심어주게 되어 사도 바울은 생각하는 순간은 결국 감사하는 순간이 되고 감사하는 순간은 기쁨을 받는 순간이 되고 결국 기쁨이 겹쳐지게 되면 행복하게 되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객관적으로 감옥에 있었지만 그것은 감옥이 아니라 행복의 천국을 맛보는 곳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울의 생각은 어떤 공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목회한 빌립보교회의 처음부터 그곳을 떠날 때까지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고 회상해 보는 일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자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내가 사고무친한 그 유럽지역에서 개척을 하였을 때 참으로 신들린 듯 일하였던 것이 그래 그랬어!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지! 주님이 나에게 기쁨을 주셨던 거야! 그래 그때 주님이 천사를 보내서 교회가 날로날로 부흥했던거야! 내가 뭘 잘해서 내가 무슨 설교를 잘하고 내가 전도방법이 뛰어나서 아니었지! 내 등 뒤에서 주님이 도와주셨지! 주님이 그때 지혜를 주셔서 그 위험도 건너뛰었지! 하나하나의 빌립보교회가 개척되었던 장면을 떠올려 보면서 <아하 주님이 하셨던 거야!> 하면서 주님 그때 그렇게 해주셨죠! 하면서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처음 개척을 하였을 때 자주장사인 루디아가 예수를 믿었던 것도 내 언변이 뛰어나서가 아니었어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신 거야 그 여신도가 장사를 잘되게 하고 그 돈으로 내가 목회할 때 쓸 비용을 적지 않게 주었던 것도 주님이 그를 천사로 삼으셔서 내 동역자가 되게 해 주신거야! 그때만 해도 참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야 주님이 나로 하여금 루디아를 만나도록 필연적으로 역사하신거야! 생각할 때마다 이것도 주님이 하셨지! 그래 그것도 주님이 하셨어! 아하 그래 그때 그것도 주님이 결국 그렇게 해 주신거야! 고백하고 감사에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 물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해 주셔서 결국 그것을 생각해 내고 감사를 드린 것이지만 빌립보교회 성도들도 참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신앙생활을 참으로 잘 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1 장 5 절에서 6 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말씀대로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복음을 위한 일에 적극 참여하였고 예수 안에 있어서 착한 열매를 맺고 살았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선한 목자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착하게 사는 것으로 인해 사도 바울의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어떤 결과로 나타났습니까?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생활과 선교와 증언들이 사도 바울의 감사의 제목들이 되고 그것들이 사도 바울의 서신 안에 쓰여지게 되고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빌립보서 4 장 3 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글레멘드란 사람을 언급하는데 아마도 빌립보교회에서 사도 바울의 목회와 선교사역을 잘 돕는 집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보내온 편지를 아마도 분명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읽었을 것인데 그 자리에 있던 글레멘드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 하였으니 얼마나 좋고 기뻤겠습니까? 만약 당시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 장이 있다면 절로 그 찬송을 불렀을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그러나 그 당시에 글레멘드 역시 사도 바울의 서신이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 즉 신약성경이 되어 모든 예수를 믿는 지금까지 2 천년 동안 수백억도 넘는 사람들이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이름도 함께 읽게 되는데 생명책에 있는 사람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으니 나중에 천국에 가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은총의 주님께서도 니가 내 책에 기록된 글레멘드가 아니냐 물었을 때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제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제 별명은 월남전이 한창일 때는 <베트콩>이었고 대부분은 <배터져!>였습니다. 제가 원주초등학교 3 학년이었을 때 제 학교성적이 72 명 중에 71 등이었는데 72 등이었던 애의 이름이 <이현인>이었는데 그 애는 나를 부를 때 <야! 배터져! 어디가> 였습니다. 지금도 꼴등한 그 아이가 보고 싶습니다. 중학교 때는 아이들이 제 이름을 부를 때 노래로 부르면서 놀렸습니다. 제 앞을 지나가거나 제 뒤에서 “터질 거에요 내 마음은 당신이 내 곁을” 뭐 그렇게 불러야 하는데 “터질 것에요 내 배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을 배터진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당시 제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노래로 불러주는 것이 뭐 그렇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관심을 가지고 제 앞에서나 제 뒤에서 이름도 불러주고 노래도 불러주니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배가 터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글레멘드가 그랬을 것 같습니다. 빌립보교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사도 바울이 언급했을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았을 것이고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니 나중에 천국에 가서 자신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고 영혼과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에 차올랐을 것입니다. 글레멘드의 후손들은 어떻하였겠습니까? 만일 글레멘드 후손들 중에 10 대조 할머니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가문의 영광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글레멘드는 사도 바울이 이름을 써서 기록할 정도이면 사도 바울이 무슨 일을 맡겼을 때 그 일을 맡겨준 것을 감사하면서 늘 기쁨으로 일하면서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님께서도 이곳에서 목회를 하시면서 자신의 목회사역을 도운 이들의 이름을 가슴 속에 깊게 새겨놓고 다른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거나 축사나 격려사를 하실 때 그 이름을 언급하면서 예화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 저는 오늘 빌립보서 1 장 이 말씀을 가지고 강진읍교회 성도님들과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몇 가지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사도 바울이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로 연결시킨 것과 같이 강진읍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삶의 주변과 여러분들이 경험한 것들과 여러분들이 만난 사람들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일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로 연결하시기를 바랍니다. 영어로는 생각하다는 <think>이고 감사하다는 <thank>로서 단지 한 단어 차이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살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자꾸 그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나에게 돈이 되느냐 내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발상입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삶을 뒤돌아보면서 내 삶의 한 장면 한 장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내고 항상 감사로 연결시키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나온 일을 되돌아보면서 순간순간들을 감사와 감사로 연결시켰습니다.
 
■ 저는 사도 바울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되는 사람입니다만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한 것과 제가 강진읍교회를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리는 것 즉 생각과 감사로 연결되는 think-thank의 틀은 정확하게 같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생각해 보면 제가 지나온 교회들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칠량교회 원주영강교회 광주양림교회 용인교회 송암교회 제2군사령부교회 한인제일감리교회 오클랜드한인교회 광주가나안교회 강남교회 강진읍교회. 그중에서도 강진읍교회에서 받았던 여기 계시는 성도님들을 통해 받았던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는 언젠가 제가 눈을 감을 것이지만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제 머리털이 몇가닥인지 모르지만 보통 한국사람의 머리카락수가 보통은 5 만 많으면 7 만이라고 할 때 저는 제 머리카락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은혜를 이곳 강진읍교회를 통해 받았습니다. 물론 그 오만가지 은혜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은혜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께서 강진읍교회 성도님들을 통해서 주신 은혜입니다. 아침 새벽기도회 마치고 사택으로 들어서려하면 문고리에 걸려 있는 검은 비닐보자기에 금방 캔 상추들과 고추 몇 개가 담겨 있습니다. 누가 거기다 걸어놓았는지 모르지만 그걸 열어보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낍니다. 그런 일들이 수도 없었습니다. 아하 은총의 하나님께서 강진읍교회 성도들을 통해 허벌나게 많은 은혜를 주심을 체험했습니다. 제가 떠나온지 7 년이 되어갑니다만 때로는 강진읍교회 당회에서 결의를 하여 제 선거운동 비용도 보내주시고 쌀, 멸치, 고구마, 감, 배, 양파, 마늘, 파김치 묵은 김치 등등 헤일 수 없이 많이 보낸 주신 성도 여러분들게 감사드리며 그것들을 보낼 수 있도록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신 은총의 하나님, 강진읍교회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였는데 저 역시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강진읍교회와 강진읍교회 성도님을 생각할 때마다 김승봉 목사님과 사모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제가 교단총무로 일하면서 지난 6-7 년 동안 정말로 차로만 해도 30 만킬로를 넘게 다녔고 그동안 기차와 비행기 등등으로 다닌 것을 다 따져보자면 100 만 킬로를 훨씬 넘게 다녔을 것입니다. 지난주에 독일에서 복음선교연대 회의를 다녀왔을 때 움직인 총 거리가 17000 km였습니다. 그렇게 많이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사고가 나지 아니하고 딱 두세번 코피를 흘린 것 외에는 약간 머리가 희어진 것 외에는 아직도 쌩쌩하게 다니고 있는 것은 담임목사님과 강진읍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절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은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너무도 잘 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그런 성경구절이 떠오릅니다. “걸어가도 피곤치 않고 달려가도 곤비치 않은 독수리 같은 새 힘을 ” 그 힘을 제가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힘은 하나님께서 강진읍교회 성도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제게 베풀어주신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여기 계신 우리 목사님과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 사도 바울은 생각하고 그것을 감사로 연결시키는 것이 빌립보서 일장 3 절에 있어서 저는 <빌일공삼 메커니즘>이라고 부르고 THIK - THANK 이니까 TTM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빌일공삼을 여러분의 삶에 도입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내가 참 어려웠지 그때 그 생각을 해보면 어떻게 내가 지금 살고 있나 몰라 그래 맞아 하나님이 내 등 뒤에서 날 도와주신 거야 그랬어 하나님의 은혜였어> 뭐 대충 그런 틀이기도 하고 때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찾기 위해 깊은 묵상에 잠길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강진군 칠량면 영동리에서 살았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다녔을 때인가로 기억하는데 칠량 앞바다에 나가 호미를 가지고 갯벌을 캐면 조개들이 나왔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지금은 한참 호미질을 해야 조개를 찾지만 그때 약 50 년 전에는 그저 호미질 몇 번만 해도 조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때로는 큰 꼬막도 나오고 조개가 큰 것이 캐져나오면 바구니에 담을 때 그 기분은 쏠쏠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과 감사로 치환을 해 봅니다. 호미질이 생각이라면 조개와 꼬막은 감사라고 해 봅시다. 너른 하나님의 밭에서 생각의 호미질을 하게 되면 감사를 캐게 되고 그 감사는 마음 속의 바구니에 담겨져 그대로 기쁨과 행복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삶의 밭에서 자꾸 생각의 호미질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열매들을 자꾸 캐게 해 주실 것입니다. 저도 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의 호미질을 해보았습니다. 내 심장이 언제부터 뛰었던가 아마도 어머니의 태에서 제일 먼저 조직이 되어 어느 날부터 희미하게 뛰기 시작되었다면 지금까지 몇 회나 뛰었을까? 시카고 대학의 의학 연구원들이 16세에서 65세까지의 사람 백 명에게 일할 때나 쉴 때나 항상 자그마한 전자 감식기 장치를 부착시켜서 테스트를 한 결과 하루 종일 끊임없이 심장이 뛰고 있었으며 하루에 약 100,000번 정도 뛰는 걸로 나타났나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55 년을 살았으니 365 곱하기 55 곱하기 십만 하면 20 억 750 만번 째 뛰고 있는데 내가 잘 때도 쉴 때도 운동할 때도 한 시도 쉬지 않고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장은 1 - 2 분이라도 뛰지 않으면 심장마비로 그대로 죽습니다. 한 번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심장이 55 년동안 단 1 분도 휴식시간을 갖지 않고 뛰어준 심장이 고맙지 않은가? 그 심장을 내가 만들었는가? 내 심장은 하나님께서 주셨고 그 심장을 오늘에 이르도록 뛰게 하신 은총의 하나님께 한번이라도 감사하다고 감사헌금을 한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았을 때 한 번도 그 명목으로 헌금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생각의 호미질을 내 몸에다가 해 보면 감사할 것이 참으로 허벌나게 많습니다.
 
■ 제 누나는 광주에 있는 가나안교회에서 권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제가 광주가나안교회 담임목사였을 때 당시 누나가 집사였는데 심방을 갔습니다. 누나는 피아노 선생이었는데 포르테피아노 학원으로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였습니다. 다리가 니은 자로 구부려졌는데 펴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수술을 해서 폈는데요 이제는 펴지기는 했지만 구부러지지 않습니다. 누나의 펴진 다리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아 한쪽 다리와 다른 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늘 절둑이며 걸어야 했고 신발 굽높이가 높은 것을 신어야 합니다. 누나는 그동안 엄청나게 많이 울었습니다. 병.신이라 하면서 놀려대니까 울고 다리가 고통스러우니까 울고 왜 나만 이 고통을 당해야 하나 서러워서 울고 했는데 제가 심방을 갔을 때 누나는 울면서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동생 배 목사! 나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 노래가사가 이렇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누나는 자신의 등 뒤에서 주님께서 계셔서 늘 도와주신다고 믿고 언젠가 등 뒤에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잘 걷고 힘있게 살고 있습니다. 누나는 <나의 등 뒤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생각의 호미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고 느끼고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 여러분도 여러분의 인생의 밭에 나가서 인생 앞에 펼쳐져 있는 갯벌에 나가서 생각의 호미질을 계속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고발고소를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총회총무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제 직무상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고소를 당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소를 당하고 있는 일들은 주로 직전 총무인 분이 일할 때 약 10 년 전의 일이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교단소유의 향린동산을 팔았을 때 정당한 과정을 거쳐서 팔지 않았다고 직전 총무를 고소했고 그 분은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소고발한 분들은 소송을 끊이지 않고 약 열 번도 훨씬 이상 고소고발을 계속하고 있고 지난 주에도 저는 강북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왔습니다. 저는 교단 총무로서 모든 일을 처리할 때 합당한 기관과 교단총회에서 다 승인을 받은 것들입니다. 저를 고소하신 분들은 교단 안에 있는 분들입니다. 저는 무척 억울했고 저를 고소하고 고발한 분들은 참으로 미웠습니다. 그분들에게 다가가 뺨을 확 쳐버리고 싶은 생각도 일었습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끊임없이 모해하고 고소고발을 상습적으로 하는 자들을 다 주님의 손으로 처리해 주십시오!” 그토록 기도했는데도 저들은 더 쌩쌩하게 고소고발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조용히 앉아서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생각의 호미질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래 저들을 미워할 것만이 아니라 저들은 교단 안에 한 호리라도 부정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사회법정에 고소고발을 하는데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교단을 보다 더 깨끗하게 과정과 절차에서도 바르게 하고 교단이 세상사람들이 보더라도 투명하게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안전판을 만들어 놓는다면 중장기적으로는 교단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닌가? 저들을 미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페니실린 주사를 맞아 더 큰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되는 것 아니겠는가? 만일 내가 저들이 날 사회법정에 끌고가서 설령 사회적 생명을 끊으려 했다고 해도 만일 내가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보훈하신대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 즉 하늘예 게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태복음 5 장 43 절 _ 45 절) 이 말씀대로 내가 오히려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산상수훈을 지키게 되는 복을 받게 되는 것 아닌가! 너를 고소고발하는 이들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게 되고 그 지키기 어렵다는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지키게 되어 너는 내 아들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복을 받게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를 고소고발하는 자들은 나로 하여금 축복을 받게 되는 통로가 되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나가 자식이 없었을 때 브닌나가 그토록 괴롭혀 그것 때문에 기도하게 되었고 결국은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브닌나는 한나로 하여금 축복을 받게 되는 통로가 아니었던가? 역시 그렇다면 원수와 같고 박해하는 저들 고소고발하는 저들은 오히려 주님의 큰 은혜를 얻게 되는 어떤 시발점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아니던가? 사도 바울도 몸 속에 질병이 찾아왔을 때 계속하여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오히려 그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주의 음성을 듣지 않았던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은 약하게 하여 주님의 온전함을 입지 않았던가 오히려 그 시련과 고통의 불 속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정금같이 단련되어 주님 앞에 금그릇과 같이 쓰임받지 않았던가? 저들은 결코 원수가 아니라 너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또 다른 은혜를 주시려고 만들어 놓으신 브닌나들인 것이다는 깨달음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 날 사랑하셔서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은혜를 주시는구나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각의 호미질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 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굵고 씨알이 큰 열매를 캐게 해 주셨습니다.
■ 강진읍교회 성도 여러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삶의 너른 갯벌에서 생각의 호미질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강진읍교회 성도 여러분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호미질을 하는 가운데 여러분의 생각 속에 쳐들어 오셔서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열매를 많이 캐게 해 주시고 여러분의 삶이 통째 감사와 행복 가운데 있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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