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1.2.3부 발음교회 설교 > 상임이사칼럼new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주일낮예배 1.2.3부 발음교회 설교

관리자 2015-07-30 (목) 16:38 8년전 1478  
2015년 7월 26일(주일) 오전 7시 9시 11시 주일낮예배 1.2.3부 발음교회
 
성경본문 : 마태복음 5 장 13 절
제 목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우리 예수님께서 은총과 평강을 발음교회 성도님들과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브니엘 성가대 위에 예배 순서를 맡은 민경순 권사님과 김노영 장로님께, 교회를 섬기시는 모든 일꾼들 위에 주님의 종 권오륜 목사님과 사모님 위에 김종택 원로 목사님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원로 목사님이신 김종택 목사님께서 건강하신 모습을 뵈어서 참 좋습니다. 교단과 성풍회, 군선교를 위해 그동안 참 헌신하시고 목사님의 눈물로 뿌리셨는데, 그 열매를 이제 후배들이 거두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깊은 감사를 드리며 더욱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님께서 하와이 열방대학에서 계신다고 들었는데 묵상도 하시고 연구도 하시는 동안 영적으로 충전되고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도 생기셔서 이제 돌아오셔서 발음교회를 영적으로 더욱 새롭게 하도록 준비하는 시간, 은총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기관목사로서 말씀을 은혜 충만하게 전달하는 그런 강사는 아닙니다. 깊은 은혜의 말씀은 여러분의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이 시간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수훈의 한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마태복음 5 장 13 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모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할 때 너희는 누구일까요? 마태복음 5 장 1 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이 두 부류였습니다. 한 부류는 예수께서 제자로 열 둘을 선택하신 제자들이요 다른 한 부류는 예수님을 보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산에 까지 따라온 무리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단지 열두 제자들에게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산 위에까지 따라온 모든 무리들에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5 장 13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하였을 때 너희는 예수님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도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신 말씀이니 마태복음 5 장 1 절의 너희는 단지 예수님 당시 주후 1 세기 때의 사람들 만이 아니라 21 세기를 사는 발음교회 성도들을 포함한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세상의 소금이라 하였을 때 세상은 어떤 범주이며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이제야 우리는 알았네 작고 작은 이 세상” 세상은 온 지구를 말할수도 있지만 우리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기쁨과 슬픔 그리고 희망을 나누는 함께 사는 작고 작은 이 세상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가정, 교회, 일터, 친구, 동아리, 직장, 만나는 이들 우리가 만나 함께 삶을 나누는 곳이라면 그것은 세상입니다. 나태주 시인이 시를 썼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 지구 한 모퉁이가 / 깨끗해 졌습니다 / 꽃 한 송이가 피었습니다 / 지구 한 모퉁이가 / 아름다워 졌습니다” 내가 사는 삶의 자리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내가 사는 세상은 드넓은 우주 안의 한 구석인 것입니다.
 
□ 소금이라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은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요? 마태복음 5 장에서 7 장 까지를 산상보훈이라 하는데 가만히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엇 무엇이라!” 한마디로 정의하셨는데 그게 딱 두 가지입니다. 마태복음 5 장 14 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와 마태복음 5 장 13 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둘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세상의 소금이라!>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빛 없으면 살 수 없지요! 그러나 그 빛보다도 소금을 먼저 말씀하셨으니 그 소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소금이 없으면 인체는 시들시들 죽게 되고 소금은 인체를 활력소를 불러 일으키는 99 가지 귀한 역할을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도 소금의 중요성이 가슴 안에 깊게 새겨져 있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굵은 소금이 물 안에 녹아져 내리면서 그 물이 짜게 되는 실험을 한번쯤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굵은 소금이 점점 몸무게가 줄어들면서 눈에 형체도 보이지 않게 되면서 비로서 짠 맛을 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소금이 굵은 소금이거나 가는 소금이거나 간에 물 속에 녹아들면서 내가 말이야 이렇게 내 몸을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내 자신이 없어지면서 짠 맛을 내게 하고 김치를 맛있게 담구게 하는거야 하면서 자신을 자랑합니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없애가면서 자신의 존재가 발현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지닌 소중성과 헌신성을 아시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비유해서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분명 구약도 읽으셨을 터이니 레위기 2 장 13 절 말씀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실 때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되고 인간에게 가장 귀중하게 사용되는 소금을 제사에서 받으시는 것도 인간에게 있어서 소금이 가지고 있는 필수불가결성 소중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하였을 때 그 안에는 무슨 뜻이 있겠습니까? 이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였을 때도 같은 뜻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빛이 없으면 안되는 것과 같이 소금이 없으면 안되는 것 같이 너희는 세상에 있어서 세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존재, 세상이 존재하기에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라!, 소금과 같이 자신의 존재가 아닌 이웃 존재에 큰 존재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 어떤 이가 어떤 공동체 안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그 공동체가 활성화되는데 아주 금쪽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가 선하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하였을 때 그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그가 따르는 예수님을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 저는 오늘 예수님 말씀에서 5 장 13 절의 후반절의 뜻을 함께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이 맛을 잃는다 소금의 맛은 짠 맛인데 짠 맛을 잃는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소금이 자기정체성을 잃는다면!” 그렇게 오늘날의 표현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정체성을 상실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 하셨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사람들에게 밟힌다 하셨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를 정확히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 오늘 우리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개독교>라는 것입니다. 개독교가 무슨 뜻인가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더니 는 <개같은 종교>의 줄임말이요, 은 <독을 품어내는 기독교>라는 뜻이라 합니다. 목사를 잘 먹는다고 해서 먹사라고 하거나 목사와 쓰레기를 합성하여 목레기 혹은 교인들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뱀파이어라고 하고 집사는 잡사, 평신도를 병신도라 합니다. 기독교의 지도자를 <개독괴수>라고 합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개독교란 말을 인터넷에서 처음 접하고 무척 화가 났습니다. 왜 우리 기독교가 얼마나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조선말에 기독교가 들어와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기독교가 역할을 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개독교란 말이 온당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교단총무를 맡게 되어 한국기독교를 한편으로 좀 거시적으로 다른 한 편으로 한국교회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저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들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너무나도 많은 면모를 우리 한국기독교가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사실상 우리 기독교의 현상을 보고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생각, 잘못한 것보다도 매를 덜 맞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교회를 사유재산과 같이 여겨서 대형교회들을 자식들이 세습한다든지, “수많은 광주시민을 죽인 바로 직후에 구국의 영웅이라 하여 학살했던 사람을 교회강단에 세우고 축사를 하게 한다든지, 저들 독재자들을 위하여 조찬기도회를 개최한다든지”, 목사들이 수백명이 모여 독재자를 찬양하는 예배를 드려준다든지”, “교회들 사이에 교단들 사이에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또 교단장이 되기 위해 법정소송을 벌인다든지”, “가짜박사학위를 받거나 제조한다든지 그리고 교회주보에 버젓이 내놓는다든지”, “목회자가 여러 가지 스캔들을 일으킨다든지”, “온갖 이권에 개입해 있다든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천국의 축복과 치환시킨다든지!” “기독교를 반공이데올로기와 일체화시킨다든지” 등등 오늘날 교회의 안과 밖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소재들과 꺼리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한마디로 오늘날 뉴스에서 보여지는 한국기독교, 우리가 경험하는 한국교회는 정말 개독교라고 비판받을 수 밖에 없는 너무도 일그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사실상 너무도 부패해 있습니다.
 
□ 세계교회의 역사를 보거나 한국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초기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았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단과 선교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 제자교회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는 하비콕스 박사가 특별강연을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기독교와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로 나뉘어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기독교는 박해받고 순교도 한 초대교회 전통을 담지한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였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먹어버린 것처럼 여겨졌지만 오히려 제국주의에 의해 기독교가 먹혀 버린 껍데기만 남고 함몰되어버린 기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예수 정신은 어디로 온데간데 없고 제국주의 정신만 살아있어 그 정신으로 계급주의적 질서를 만들었다. -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 복자 등 - 또한 십자군이라는 미명아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서 이슬람이라 이교도라 하여 칼로 도륙하였다. 제국의 질서는 통일성(uniformity) 인데 교리가 서로 다르다고 화형으로 다스리고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는 기독교의 십자가 사랑의 정체성이 온데간데 없어진 한마디로 기독교 아닌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하였습니다.
 
□ 한국기독교의 초기 역사는 참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된 역사였습니다. 3.1 운동에 가담한 이들도 당시 기독교인들이 1.25 %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독립선언에 참여한 지도자들이 기독교인이 반수 이상을 차지하였고 만세운동을 하다가 잡혀간 이들중에는 거의 69 %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성장하고 부흥하고 난 다음에는 안면을 싹 바꾸었습니다. 언젠가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데 cbs에서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나와서 그런 요지의 강연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카톨릭이 먼저 들어왔고 개신교는 한참 이후에 들어왔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온 개신교가 카톨릭을 그 수나 영향력의 면에서 훨씬 앞서 갔다! 왜일까? 개신교는 제일 처음 민중들에 의해 민중 속으로 전파되었다. 개신교 초기는 무척 민족과 민중과 그 시대의 사회를 향하여 무언가를 주었다! <삼일운동>, <나라빚갚기운동>, <물산장려운동>, <독립운동> 그런 운동들을 전개하여 당시 시대에 소금이 되고 희망을 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개신교는 점정 융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20 세기 후반 들어 한국개신교는 점점 쇠퇴해가는 데 비해 한국카톨릭은 융성해 간다! 왜 그럴까? 기독교는 100 주년을 맞이하고서 하는 일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100 주년 기념사업이다 100 주년 기념관이다 해서 건물부터 때려짓기 시작하였는데 당시에 카톨릭은 무엇을 시작했냐 하면 <시각장애인 눈떠주기 운동> 등 사회적 약자를 찾아가는 일을 시작했다 지난 10 년 동안에 카톨릭 교회는 점점 회중들이 늘어났지만 개신교는 실제로는 감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도대체 기독교가 그 사회에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었습니다.
 
□ 만일 오늘날 개신교 교인들이 세상에서 저들의 삶의 자리에서 조용하게 자신 속에 있는 예수 정체성을 녹이면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있다면 한국개신교가 이렇듯 급격하게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인구통계청이 인구조사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1995 년부터 2005 년까지 불교도 조금 늘었고 카톨릭교회는 무려 75.6 % 성장을 했는데 유독 개신교만은 2.9 % 마이너스 성장을 했습니다.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도대체 왜 개신교가 고구마전도다 이슬비전도다 전도를 많이 하는데 교인수는 줄었을까 리서치를 해서 발표를 했는데 그중에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넘어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그런 응답이 나왔습니다. 개신교에 갔더니 시댁분위기와 같았는데 카톨릭에 갔더니 친정분위기더라! 교인들이 세상사람들보다도 더 징하고 더 독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향취를 맡는 것이 아닌 냄새를 맡아 역겨워서 얼른 교회를 떠나간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눈꼽만큼 손해보려 하지 않고 손톱만치도 희생하려 하지 않고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나도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도 천국에 들어가는 막고 서 있는 셈이 됩니다. 한국기독교가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보고는 예수 믿고 싶지 않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이 전도의 문을 닫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만 무섭게 이기주의적이고 차갑고 비인간적인 모습 때문에 점점 하향길로 치닿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예장통합 총회장이 한장총 행사장에서 우리 교단은 재작년에 오만명의 교인이 줄었고 작년에 오만명의 교인이 줄어들었다 염려와 걱정을 하였습니다. 100 명 정도의 교회가 1000 개가 2 년 사이에 없어진 것입니다. 장로교 중에서 비교적 건전하다고 하는 예장통합이 그러하니 다른 교단들은 어떻겠습니까? 불교방송(BBS)가 언젠가 리서치를 했는데 3-40 년 후에는 한국개신교는 거의 이름도 따질 수 없을 만큼 미미해질 것이고 불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 공간을 한국카톨릭교회가 채워갈 것이다 전망하였습니다.
 
□ 왜 급격하게 개신교인수가 줄어들어 갈까? 특별히 장로교단들과 같이 성수주일 열심히 하고 십일조 및 봉헌생활을 잘하고 순종생활을 잘하는데 왜 축소재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새 교우가 왔는데 적지 않은 수가 교회 안에 있는 교우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다시는 예수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이기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물질적이고 경제지상주의를 신봉한다고 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을 믿기 보다는 자본을 더 믿고 경제를 더 중시합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를 살면서 예수님을 본받아 섬기면서 향기를 풍겨내면서 소금과 같이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살아간다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좋아지고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선교가 되고 전도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비록 예수 믿어라! 우리 교회 나와라! 그렇게 전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활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먼저 희생하고 먼저 손해보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기도해 주고 자신을 저주하거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 오히려 축복해주고 산다면 자신이 사는 자리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산다면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들이 믿는 예수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이 많아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긴 다니는데 신앙은 좋다고 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이득에는 더욱 아득바득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주의적이고 가슴은 오뉴월 서릿발과 같이 냉냉하고 이웃의 아픔을 모른 체하고 더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나누는데 인색하면서 독을 품어내면서 산다면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아이고 나는 너같이 될까봐 예수 같은 거 믿지 않겠다! 니가 믿는 예수도 그렇게 독한 사람일까봐 나는 예수 같은 것 죽어도 믿지 않겠다! 하고 결국 전도와 선교의 문이 닫혀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먼저 오래 믿는 교우들 때문에 상처를 받아 다시는 예수 따위는 믿지 않겠다고 하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아니면 카톨릭 교회로 가버립니다.
 
□ 얼마 전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강남의 수입품을 파는 직장의 점장이 예수를 잘 믿는 집사였습니다. 그 점장은 너무도 신앙이 좋아 우리나라 알만한 대형교회를 다니는 사람인데 직장에서도 개인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점원들에게는 너무도 들들 볶고 갑질을 하여 점원들이 견딜 수 없어 하여 그 직장을 떠난다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점원도 떠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점원도 떠나는데 예수 믿지 않은 점원이 예수 믿는 점원에게 말합니다. “점장이 믿는 예수도 점장과 같이 왕갑질을 하는 인간 아냐?”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소금과 빛이 되어 주님의 품으로 이끌어 올 수도 있고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차단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내 자신이 삶속에서 뿜어내는 냄새가 예수 믿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적그리스도 세력>의 한 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제 99 회 총회주제를 <하나님과 세상 앞에 참회하는 교회>라 정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총대원이 총회석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회해야지 세상 앞에 참회해야 하느냐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총대원들이 우리 교회가 세상 앞에 참회홰야 하는 것이 옳다!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는데 얼마나 우리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을 많이 하지 않았느냐! 오직 했으면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때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하였을 때 세상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빛과 소금의 서비스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빛과 소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빛의 서비스를 받기는커녕 저들의 삶속에서 캄캄함과 절망만 느끼고 소금의 서비스를 받기는커녕 저들이 오히려 더 썩었다면 세상은 반대의 서비스를 제공해 온 것이니 교회는 세상 앞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참회해야 할 책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 기독교를 개독교로 비난하는 주장들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하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의 비난 속에서 우리가 그 중심을 봐야 하는데, 비난의 핵심이 뭐냐? “너희 속에는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기독교를 말하고 예수를 선전하지만 너희들 자체 속에 그리스도가 없고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투쟁을 하는 가운데 서구 기독교를 경험하면서 그런 비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없는 것이며 소금과 빛된 삶도 없는 것입니다.
□ 제가 예전에 강진읍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을 때 소리엘 복음성가 가수가 와서 복음성가로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 노래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었습니다. “주의 꿈을 안고 / 일어 나리라! / 선한 능력으로 일어 나리라! / 이 땅의 부흥과 회복은 /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리!” 그렇습니다!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보면서 저들을 저주하기 보다는 캄캄함을 손가락질 하는 것보다도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비춰주는 이들이라 고맙게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참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일이 선한 능력으로 일어나는 일이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사는 적은 세상에서부터 먼저 한줌의 햇볕이 되고 한 줌의 소금이 되는 일을 조용히 시작하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발음교회 성도 한 사람부터 세상의 소금이 되는 적은 일 하나부터 시작하고 그럼으로부터 발음교회가 이 지역 내발산동에서 예수님의 소금이 되고 그럼으로 인해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이 땅 한반도의 화해의 소금이 되고 그로 인해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소금이 되는 그래서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 가기를 소망하고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이 땅에 세상의 한 줌의 소금이 될 때 우리 예수님 영광받으시고 무척 기뻐하시고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우리 삶의 여정 내내 임마누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소중한 일이 발음교회에서부터 발음교회 성도 한 사람부터 출발되기를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 이 세상에 소금이 되게 해 주옵시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해 주옵시고 다른 사람들은 어찌하던지 나로부터 소금되는 삶을 시작하게 하옵소서! 발음교회가 더욱 예수님의 소금이 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복되신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축도)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원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될 때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오늘도 거룩한 영으로 거룩한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소금이 되어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겠다고 나로부터 소금의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하는 발음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위에와 귀한 은혜의 가르침을 주시는 권오륜 목사님과 사모님 위에 지 금부터 언제까지 임마누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9:53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