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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장로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관리자 2015-08-24 (월) 16:26 8년전 1709  

2015년 8월 23일(주일) 오전 9 시 30 분 11 시 30 분 평택장로교회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 장 23 절 _ 26 절

제 목 :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


□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의 은총과 평강이 오늘 주의 전에 나아와 예배 드리는 평택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오늘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성가대 위에 지금 영적 순례 가운데 계신 이종원 목사님과 사모님 위에 목사님이 안 계시는 동안에 수고하시는 김한이 목사님과 장민기 목사님과 모든 부교역자님들 위에 당회 장로님들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이 가 계시는 영적 순례는 종교개혁의 발상지에서의 순례의 여정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 2 주일동안 진행되는 이 여정은 교단총회 목회와 신학연구소가 기획한 것인데 무척 프로그램이 좋아 제 집사람도 가게 하였습니다. 아내는 매일 새벽에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의 활동지와 발상지를 방문한 뒤 사진과 설명을 카톡으로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듣는 것으로만 해도 저에게 좋은 공부가 되고 있습니다. 금번 기회에 이종원 목사님과 사모님께서도 금번 순례의 길에서 좋은 자극을 얻어 오늘날 많은 비판과 비난에 직면해 있는 한국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동기를 찾아오시고 주님을 사랑하였기에 죽음도 불사하면서 종교개혁에 가담한 개혁자들의 그 뜨거운 가슴의 불을 붙여 오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기관목사로서 말씀을 은혜롭게 전하는 좋은 강사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깊고 깊은 은혜는 여러분의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본문은 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 읽는 본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 장 23 절에서 26 절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2 장 19 절에서 20 절을 보겠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을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이었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하신 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셨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을 하는 것이며 오래지 않아 자신은 잡혀가게 되고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리라고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식사후 포도주를 드시면서 뭔가 제자들에게 깊은 영적인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빵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살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자신의 피라 하시고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혹은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현장 그 자리에 앉아 하신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예수님의 표정에서 예수님의 음성에서 예수님의 심장의 고동으로부터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신 그 진정한 뜻은 무엇이셨을까를 한번 짐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핵심을 잡는 것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참 신앙생활을 하는데 참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임이 형성되었을 때 문패도 이름과 번짓수도 없는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힘써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을 전달받았는데 오늘날 이는 예배에서 설교로 발전되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2 장에 보면 집에서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찬이라 불리우는 예전이 시작되는 원형이 어디 있느냐 하면 집에서 서로 함께 <떡을 떼었다> 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이것을 행하여 날 기억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행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 우리가 성경 사도행전 2 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무척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44 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46 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저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 가운데 뭔인가 놓칠 수 없는 걸 하나 발견합니다. 여기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과 떡을 뗀다는 것이 각각 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이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그냥 한 번에 써도 될텐데 서로 따로 떼어 말씀한 것은 떡을 뗀다는 것 속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는 때문입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단지 식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떡을 떼셔서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다!” 하신 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기 위하여 함께 떡을 뗀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이 가슴 속에 새기기만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떡을 뗀다는 것을 단지 음식물을 먹기 위해 쪼갠다는 뜻이 아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심을 깊이 생각하고 떡을 떼는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떡을 떼면서 그렇지!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나누어 주셨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단지 떡만 떼어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지! 이 땅에 계실 때도 하늘의 말씀도 주시고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정도 나누어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어 병도 고쳐주시고 죽으시면서 까지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죽어 가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지! 자신의 몸을 분해하시고 해체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온전히 모두 다 몽땅 털어 다 나누어 주셨지!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삶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면서 기념하면서 떡을 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회상만 하고 기억만 하고 떡만 뗐습니까?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떼어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의 물건을 내놓아 서로 함께 통용하기 시작하였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 그것만이 아닙니다. 마음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고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과 박해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나누며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나눔과 섬김의 삶을 자신들끼리에게만 해당시키고 그것을 세상사람들과 아직 안믿는 이웃들과는 담벼락을 쌓고 살았더라면 사도행전 2 장 47 잘 말씀의 현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머리 속의 기억으로만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화시켜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인카네이트(incarnate)하여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시키면서 살았는데 그 삶을 보고 세상사람들이 너도 나도 예수를 따르고 믿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성찬의 삶을 살았던 것이고 이것이 빛이 되어 예루살렘을 환히 비추었고 그 빛이 광속도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 그것 자체가 전도가 되고 선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점점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로마제국 깊숙이 복음이 스며들어 약 300 년이 지난 다음에는 로마제국이 자신의 국교로 선포할 만큼 기독교는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고 영향력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종교화가 되면서 예배를 드리는 예전도 점점 복잡한 형식을 더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을 즉 예수님의 성찬을 아주 예배와 예전 속에 담아 아주 긴 시간을 예배 속에 할애하였고 그 성찬예전을 신학화하여 <화체설>이라는 교리로 확립하였습니다. 화체설이 뭐냐 하면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카톨릭의 사제가 서품을 받으면 천국의 열쇠를 맡는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 위에 손을 얹고 축성을 하면 떡과 잔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하고 불사의 능력이 그곳에 임재하게 된다. 그것은 너희가 믿던 안 믿던 상관이 없다. 왜 변하느냐고? 사제가 서품을 받을 때 그 능력(히에라르키아)을 받기 때문에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위해 기도할 때 그 떡과 포도주는 본질이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하기 때문이지! 그렇게 변하기 때문에 성찬은 만병통치약이기도 하다>.이것이 바로 화체설입니다.


□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가 루터는 반박하였습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성례전은 마술이 아니다. 그래 사제가 축성하여 떡이 예수의 살로 변했다 치자! 그럼 제일 먼저 구원받은 이들이 교회성도들일 것 같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구원서열 1 위는 교회 안에 돌아다니는 쥐들일 것이다. 빵도 갉아 먹고 포도주도 찔끔거리면서 마실테니까! 성찬의 효과는 마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그것은 헛것이다. 사제가 축성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상관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 가운데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실재설>입니다.


□ 이에 대하여 또 다른 종교개혁가인 쯔빙글리는 말하였다. “루터! 너는 성경 좀 더 읽어라! 예수님께서 제정의 말씀에서 뭐라고 하셨냐? 나를 기념하라 되어 있잖냐? 그러면 말씀 그대로 보면 성찬의식은 그날 그때를 상징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쯔빙글리의 성찬론은 한마디로 <상징설-기념설>로 정리가 됩니다. 루터의 <실재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 사이에 격론이 붙자 두 사람이 1529 년 마부르그에서 만나 회담을 합니다. 루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쯔빙글리 너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왜 빼 먹는거냐?” “이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주님의 말씀이고 그 분의 현존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징이라고 우겨대는 너 쯔빙글리와는 영영 이별이다” 하고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웠고 그 두 사람들의 제자들이 세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들은 분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살과 사랑의 피를 주신 것인데 카톨릭과 종교개혁가들은 서로 교회를 나누면서 사랑으로 주신 것을 열불나게 서로 싸우는데 사용하여 성찬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 종교개혁사 칼빈은 이 둘 사이에 논쟁에 대하여 “쯔빙글리도 맞고 루터도 맞고 내 생각으로는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 작은 컵에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다. 루터의 말대로 주님은 떡과 잔에 분명히 실재하신다. 주님은 믿음으로 참여한 이 떡과 잔에 영으로 임재하시고 주님이 떡과 잔에 임재하시는 것은 신비이다.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와는 다르게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종교개혁가들의 성찬논쟁은 그 제자들에게도 이어져서 열렬하게 싸웠습니다. 싸운 결과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가 나누어졌으며 루터파는 독일을 중심으로 루터파대로 또 나누어지고 개혁파 교회는 네델란드와 영국을 중심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나누어져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우리 기장은 개혁파교회의 전통에 속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이 성찬논쟁 하나로만도 약 500 년동안 줄기차게 싸워온 것입니다. 1973 년에 와서야 스위스 바젤 근처의 로이엔버그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정리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성찬에 관해 루터나 칼빈은 결국 같은 견해를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 뿐이다!” 그동안 예수님의 성찬을 가지고 로만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에 그리고 개신교 사이 안에서도 서로 많이 싸웠습니다. 서로 싸우는 과정에 이론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서로 죽이고 죽었는데 특별히 서로 신학의 이론이 다르다고 같은 개혁자들 간에도 화형을 처해 죽이는 등 참으로 못할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500 년 동안에 진행된 성찬논쟁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렀고 교회 안의 종교적 유물로만 기능하였지 예수님의 성찬의 깊으신 뜻이 세상 밖으로 나와 세상에 활력소를 주지 못하였습니다.



□ 예수님은 지금 부활승천하시어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실 것입니다만 승천하신 후에 하늘보좌 위에서 이 땅을 바라보고 계셨고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값주고 피로 사신 교회를 보시면서 이 땅에 계실 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는 것과 같이 울고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하라고 주신 성찬을 그 뜻과 정반대로 서로 싸우고 이단으로 정죄하고 서로 갈라서고 분열하고 서로 죽이는데 사용하여왔고 그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보좌에서도 예수님은 얼마나 지상의 교회들이 서로 분열하고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서로 엄청난 살인을 하면서 죽고 죽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지난 해 독일에 국제회의차 갔을 때 어느 도시에 기록관이 있어서 보았습니다. 카톨릭교회 신도들이 어느 날 밤을 기해서 일제히 개신교인 삼만 명을 칼로 돌멩이로 쳐 죽여 버립니다. 그 생생한 역사와 기록들을 나열하고 전시해 놓았던 기록관을 보았습니다. 믿는 바가 서로 다르다고!! 로마 카톨릭만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개혁자 칼빈도 삼위일체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셀베투스라는 이를 불에 태워 죽여 버립니다.



□ 예수님께서 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내 살이고 내 피라 하시면서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주신 살과 피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생명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특별히 십자가 상에서 아낌없이 우리에게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피흘려 죽어가시면서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향해 뭐라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죽어가시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가슴의 뜨거운 온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는 내 살이다 이는 내 피다 하고 주시면서 이를 기억하여 행하여라 하심은 예수님께서 무슨 화체설을 말씀하시고자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무슨 기념설이나 공재설이나 상징설이나 영적 임재설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겠습니까? 제자들을 모여 놓고 저녁을 같이 하시면서 그야말로 사랑의 만찬을 하시면서 내 살이다 내 피다 하신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내 생명을 내 사랑을 너희에게 나누어 준다 하심입니다. 나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여라! 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나눔과 같이 너희 역시 너희의 생명을 나누어 주면서 살라!는 거룩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계명에 오롯이 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성찬을 주심은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어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도 살을 나누고 피를 나누어 너희도 너희 생명을 나누어 너희도 너희의 소유를 나누고 너희 마음을 나누고 너희 존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떡을 떼어 나누면서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해 주신 말씀을 듣고 그저 떡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는 말씀을 무슨 이론으로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성찬의 삶,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다 내어놓고 서로 아낌없이 서로 나누고 섬기는 삶 예수님의 성찬을 삶을 살았습니다. 성찬을 교회 안에서만 성찬을 그리스도인들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 교인들을 칭찬하고 저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바로 그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총회본부에서 일합니다만 우리 교단의 역대 총회장님 중에서는 자신의 신장과 장기를 내놓으신 분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봉사했던 송암교회 기원형 목사님은 나중에 총회장이 되셨는데 그 이전에 한 교우가 신장이식수술을 받아야 할 형편에 이르자 지체없이 바로 자신의 신장 한 개를 떼어 주셨습니다. 교단 총회장이셨던 김옥남 목사님께서도 신장을 떼어 주셨고 박원근 목사님께서도 떼어주셨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유재천 증경총회장님께서는 교회에서 주시는 퇴직금을 모두 개척교회를 세우는데 다 희사하시고 자신의 재산 나머지를 한신대학교에 기증하시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는데 소천하신 다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외에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신 것입니다.


□ 한 때 유럽 특별히 독일 신학계에는 <성찬의 사회화> 논쟁이 일었습니다. 이는 신학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두고 예수님의 귀한 말씀과 정신을 교회 안에다 가두어 두면 안된다! 성찬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그 정신을 오늘날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굶주린 이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이들, 집없는 이들, 전쟁과 질병으로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은데 이들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떡을 그들에게 주고 예수님의 피를 그들에게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논쟁이 일었습니다. 성찬을 우리들끼리만 먹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다! 뒤이어 <세계를 위한 빵 Bread for the World>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찬의 사회화는 예수님께서 성찬을 나누어주심을 예루살렘과 유대 안에만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만 유폐시킬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지고 나가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 금번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교단총회 100 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100 회 총회의 주제는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 이고 부제는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로 정하였습니다. 교단총회로서는 100회를 지나오면서 최초로 예수님의 성찬을 총회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카톨릭교회는 매 예배 미사때마다 성찬을 거행합니다만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성찬을 한달에 한번 하거나 부활절이나 새해 성탄절 특정한 때만 거행합니다. 어떻게 보면 카톨릭에 비해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횟수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을 받으면서도 그 깊은 뜻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에 반영하면서 살려하는 노력들은 우리 개신교회 교인들 사이에 구체화되어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성찬은 제도적인 면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고 세례와 성찬은 만국 그리스도인으로 편입된다는 의미이며 죄사함과 구원받았다는 증표다! 그런 정도의 의미로만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제도와 성례를 넘어서 이 성례 속에 예수님께서 담아 놓으신 보다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의 깊은 뜻을 생활화하면서 살았습니다. 단순히 성전에 모여서 떡만 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의 떡을 떼어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나누어 주고 자신의 구원받은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선한 예수님의 착함과 선함을 자신의 삶속에서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야 말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를 기억하여 행하여라!>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실천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박봉랑 교수님께서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종교화되고 극단주의적 종교가 되면 오히려 지금 isis와 같이 세계의 문제꺼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만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가르침으로 나아가 즉 비종교화하여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 산산수훈의 보배같은 말씀을 실천해 나간다면 세상사람들로부터 기독교는 짓밟히지 않고 많은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비종교화가 일어나듯이 성찬에 있어서도 비종교화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성찬을 교회 안에서 하나의 의식과 예전으로만 수행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 뜻이 어디 있는지 포착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존재와 삶의 모든 것을 주시면서 우리와 함께 나누고 섬김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성찬정신으로 살아 더 베풀고 더 나누고 먼저 손 내밀고 더 용서하고 하늘의 축복과 은총과 사랑을 더 자주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더 적극적으로 나누며 손을 움켜지지 아니하고 아낌없이 펼쳐 하나라도 더 나누고 우리의 물질과 몸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눔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작은 천국을 이 땅 안에서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평택교회 성도님들이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펼쳐가는 한 분 한 분 귀한 존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저희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에 쫓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거룩한 삶을 쫓아 살 뿐 아니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떡을 이웃과 함께 나눔으로 그것이 전도와 선교가 되게 하시고 참으로 착하고 선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복되신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9:53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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