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 제 100 회 총회를 위한 기도회 > 상임이사칼럼new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한국기독교장로회 제 100 회 총회를 위한 기도회

관리자 2015-10-01 (목) 17:11 8년전 1869  

2015913(주일) 오후 7 시 원주영강교회 주일저녁예배

한국기독교장로회 제 100 회 총회를 위한 기도회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 23 _ 26

제 목 :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의 은총과 평강이 존경하는 서재일 증경총회장님과 한국기독교장로회 제 100 회 총회를 앞두고 준비하며 이 시간 함께 기도하는 원주영강교회 준비팀과 영강교회 온 성도님들 위에 오늘 찬양을 주께 올린 직원/교역자 찬양단 위에 총회본부와 총회 교육원 팀 그리고 한기장복지재단팀과 한신대학교 신학과와 신학대학원 팀 모두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예배에서 영강교회의 역사성을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기도해주신 제 83회 부총회장이시고 영강교회 장로이신 손숙자장로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영강교회의 역사성으로 따지면 저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이 교회를 주일학교 학생으로 다녔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교회를 아름답게 지은 직후 교단 총회를 위해 두 번씩 총회장소를 허락해 주신, 특별히 금번 100 회 총회 개최를 위해 성소를 허락해 주신 영강교회 서재일 증경총회장님과 당회 장로님들께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서재일 총회장님은 제가 총무가 될 때 바로 모셨던 총회장님 이셨고, 기억에 남는건 남북교회가 평양봉수교회에서 사자후를 토하시며 설교하실 때, 봉수교회 모든 성도들이 아멘 했던 것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습니다. 총회를 두 번씩이나 그것도 100회 총회장소로 주시고 하나님께서 엄청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장로교 제 1 회 총회에서 제 100 회 총회 중에 중요하지 않은 총회가 어디 있겠습니다까마는 그래도 장로교 제 100 회 총회는 시대사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뜻을 지닌 카이로스 총회라 할 수 있습니다. 100 회 총회는 단지 총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대회, 신도대회, 선교박람회 및 바자회, 환영리셉션, 홈커밍 컨설테이션, 기장미술인선교회전시회 등등 약 10 개의 중요한 행사가 동시에 개최됩니다. 아마도 약 2 천여명 이상의 기장인들이 여기에 참예하여 축제와 잔치 그리고 총회를 동시에 하게 됩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영강교회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서재일 담임목사님께서 개최를 허락키로 결정하신 것을 넘어서서 은총의 하나님께서 이 좋은 장소를 정해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시간 좋으신 은총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동시에 영강교회와 서재일 목사님께 감사드리는 박수를 함께 드리도록 하십시다.

 

특별히 이 행사를 위해 가장 많이 수고해 주실 분들이 영강교회 준비팀들과 영강교회 제직분들과 성도님들과 부교역자님들이신데 이 시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신대학교 신학과와 신대원 자원봉사단 여러분들과 총회 각 기관의 실무자들에게도 역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가 합력하여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주시고 그리스도의 선을 이루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흘리는 땀을 보시고 은총의 하나님께서 은밀한 가운데 보시고 그 땀과 수과와 헌신에 적절히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린도전서 11 23 절에서 26 절은 누가복음 22 19 절에서 20 절에 그 원문이 나와 있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을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이 말씀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이었고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하신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을 하는 것이며 오래지 않아 자신은 잡혀가게 되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리라고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살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자신의 피라 하시고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혹은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현장 그 자리에 앉아 하신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예수님의 음성과 표정에서 예수님의 심장의 고동으로부터 빵과 포도주를 나누신 그 진정한 뜻은 무엇이셨을까 짐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 힘써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을 전달받았는데 오늘날 이는 예배에서 설교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 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무척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44 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46 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저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 가운데 놓칠 수 없는 걸 하나 발견합니다. 여기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과 떡을 뗀다는 것이 각각 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이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그냥 한 번에 써도 될텐데 서로 따로 떼어 말씀한 것은 떡을 뗀다는 것 속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는 때문입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단지 식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떡을 떼셔서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다!하신 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기 위하여 함께 떡을 뗀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이 가슴 속에 새기기만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떡을 뗀다는 것을 단지 음식물을 먹기 위해 쪼갠다는 뜻이 아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심을 깊이 생각하고 떡을 떼는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떡을 떼면서 그렇지!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나누어 주셨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단지 떡만 떼어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지! 이 땅에 계실 때도 하늘의 말씀도 주시고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정도 나누어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어 병도 고쳐주시고 죽으시면서 까지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죽어 가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지! 자신의 몸을 분해하시고 해체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온전히 모두 다 몽땅 털어 다 나누어 주셨지! 그렇게 생각하고 예수님의 삶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면서 기념하면서 떡을 뗀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회상만 하고 기억만 하고 떡만 뗐습니까?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삶을 떼어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의 물건을 내놓아 서로 함께 통용하기 시작하였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초대교인들은 마음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고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과 박해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나누며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웃의 발을 씻어주며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나눔과 섬김의 삶을 자신들끼리에게만 해당시키고 그것을 세상사람들과 아직 안믿는 이웃들과는 담벼락을 쌓고 살았더라면 사도행전 2 47 잘 말씀의 현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머리 속의 기억으로만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화시켜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인카네이트(incarnate)하여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시키면서 살았는데 그 삶을 보고 세상사람들이 너도 나도 예수를 따르고 믿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성찬의 삶을 살았던 것이고 이것이 빛이 되어 예루살렘을 환히 비추었고 그 빛이 광속도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 그것 자체가 전도가 되고 선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점점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로마제국 깊숙이 복음이 스며들어 약 300 년이 지난 다음에는 로마제국이 자신의 국교로 선포할 만큼 기독교는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고 영향력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종교화가 되면서 예배를 드리는 예전도 점점 복잡한 형식을 더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을 즉 예수님의 성찬을 아주 예배와 예전 속에 담아 아주 긴 시간을 예배 속에 할애하였고 그 성찬예전을 신학화하여 <화체설>이라는 교리로 확립하였습니다. 화체설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카톨릭의 사제가 서품을 받으면 천국의 열쇠를 맡는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 위에 손을 얹고 축성을 하면 떡과 잔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하고 불사의 능력이 그곳에 임재하게 된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위해 기도할 때 그 떡과 포도주는 본질이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이것이 바로 화체설입니다.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가 루터는 반박하였습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성례전은 마술이 아니다. 그래 사제가 축성하여 떡이 예수의 살로 변했다 치자! 그럼 제일 먼저 구원받은 이들이 교회성도들일 것 같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구원서열 1 위는 교회 안에 돌아다니는 쥐들일 것이다. 빵도 갉아 먹고 포도주도 찔끔거리면서 마실테니까! 성찬의 효과는 마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이는 그것은 헛것이다. 사제가 축성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상관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 가운데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실재설>입니다.

 

이에 대하여 또 다른 종교개혁가인 쯔빙글리는 말하였다. “루터! 너는 성경 좀 더 읽어라! 예수님께서 제정의 말씀에서 뭐라고 하셨냐? 나를 기념하라 되어 있잖냐? 그러면 말씀 그대로 보면 성찬의식은 그날 그때를 상징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쯔빙글리의 성찬론은 한마디로 <상징설-기념설>로 정리가 됩니다. 루터의 <실재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 사이에 격론이 붙자 두 사람이 1529 년 독일 마부르그에서 만나 회담을 합니다. 루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쯔빙글리 너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왜 빼 먹는거냐?” “이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주님의 말씀이고 그 분의 현존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징이라고 우겨대는 너 쯔빙글리와는 영영 이별이다하고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웠고 그 두 사람들의 제자들이 세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들은 분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살과 사랑의 피를 주신 것인데 카톨릭과 종교개혁가들은 서로 교회를 나누면서 사랑으로 주신 것을 열불나게 서로 싸우는데 사용하여 성찬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종교개혁사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합니다. 이 둘 사이에 논쟁에 대하여 쯔빙글리도 맞고 루터도 맞고 내 생각으로는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 작은 컵에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다. 루터의 말대로 주님은 떡과 잔에 분명히 실재하신다. 주님은 믿음으로 참여한 이 떡과 잔에 영으로 임재하시고 주님이 떡과 잔에 임재하시는 것은 신비이다.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와는 다르게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종교개혁가들의 성찬논쟁은 그 제자들에게도 이어져서 열렬하게 싸웠습니다. 싸운 결과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가 나누어졌으며 루터파는 독일을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는 네델란드와 영국을 중심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나누어져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우리 기장은 개혁파교회의 전통에 속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이 성찬논쟁 하나로만도 약 500 년동안 줄기차게 싸워온 것입니다. 500 년 동안 예수님의 성찬을 가지고 로만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에 그리고 개신교 사이 안에서도 서로 많이 싸웠습니다. 요즘은 싸울 거리가 없는지 한국교회에서는 <성찬>이냐 <성만찬>이냐로 싸웁니다. 서로 싸우는 과정에 이론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서로 죽이고 죽었는데 특별히 서로 신학의 이론이 다르다고 같은 개혁자들 간에도 화형을 처해 죽이는 등 참으로 못할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500 년 동안에 진행된 성찬논쟁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렀고 교회 안의 종교적 유물로만 기능하였지 예수님의 성찬의 깊으신 뜻을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 그것으로 세상에 활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승천하시어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실 것입니다만 승천하신 후에 하늘보좌 위에서 이 땅을 바라보고 계셨고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값주고 피로 사신 교회를 보시면서 이 땅에 계실 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는 것과 같이 울고 계실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라고 주신 성찬을 그 뜻과 정반대로 서로 싸우고 이단으로 정죄하고 서로 갈라서고 분열하고 서로 죽이는데 사용하여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보좌에서도 예수님은 얼마나 지상의 교회들이 서로 분열하고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서로 엄청난 살인을 하면서 죽고 죽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지난 해 독일에 국제회의차 갔을 때 어느 도시에 기록관이 있어서 보았습니다. 카톨릭교회 신도들이 어느 날 밤을 기해서 일제히 개신교인 삼만 명을 칼로 돌멩이로 쳐 죽여 버립니다. 그 생생한 역사와 기록들을 나열하고 전시해 놓았던 기록관을 보았습니다. 믿는 바가 서로 다르다고!! 로마 카톨릭만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개혁자 칼빈도 삼위일체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셀베투스라는 이를 불에 태워 죽여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내 살이고 내 피라 하시면서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 말씀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의 주신 살과 피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생명이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특별히 십자가 상에서 아낌없이 우리에게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피흘려 죽어가시면서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향해 뭐라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죽어가시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가슴의 뜨거운 온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는 내 살이다 이는 내 피다 하고 주시면서 이를 기억하여 행하여라 하심은 예수님께서 무슨 화체설을 말씀하시고자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무슨 기념설이나 공재설이나 상징설이나 영적 임재설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겠습니까? 제자들을 모여 놓고 저녁을 같이 하시면서 그야말로 사랑의 만찬을 하시면서 내 살이다 내 피다 하신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내 생명을 내 사랑을 너희에게 나누어 준다 하심입니다. 나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여라! 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나눔과 같이 너희 역시 너희의 생명을 나누어 주면서 살라!는 거룩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계명에 오롯이 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성찬을 주심은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어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도 살을 나누고 피를 나누어 너희도 너희 생명을 나누어 너희도 너희의 소유를 나누고 너희 마음을 나누고 너희 존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떡을 떼어 나누면서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해 주신 말씀을 듣고 그저 떡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는 말씀을 무슨 이론으로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성찬의 삶, 거룩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성찬을 삶으로 살았습니다. 성찬을 교회 안에서만 성찬을 그리스도인들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 교인들을 칭찬하고 저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바로 그 기록이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제가 총회본부에서 일합니다만 우리 교단의 역대 총회장님 중에서는 자신의 신장과 장기를 내놓으신 분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 봉사했던 송암교회 기원형 목사님은 나중에 총회장이 되셨는데 그 이전에 한 교우가 신장이식수술을 받아야 할 형편에 이르자 지체없이 바로 자신의 신장 한 개를 떼어 주셨습니다. 교단 총회장이셨던 김옥남 목사님께서도 신장을 떼어 주셨고 박원근 목사님께서도 떼어주셨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유재천 증경총회장님께서는 교회에서 주시는 퇴직금을 모두 개척교회를 세우는데 다 희사하시고 자신의 재산 나머지를 한신대학교에 기증하시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는데 소천하신 다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이외에도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신 것입니다.

한 때 유럽 특별히 독일 신학계에는 <성찬의 사회화> 논쟁이 일었습니다. 이는 신학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두고 예수님의 귀한 말씀과 정신을 교회 안에다 가두어 두면 안된다! 성찬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그 정신을 오늘날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굶주린 이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이들, 집없는 이들, 전쟁과 질병으로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은데 이들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떡을 그들에게 주고 예수님의 피를 그들에게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논쟁이 일었습니다. 성찬을 우리들끼리만 먹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다! 뒤이어 <세계를 위한 빵 Bread for the World>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찬의 사회화는 예수님께서 성찬을 나누어주심을 예루살렘과 유대 안에만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만 유폐시킬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지고 나가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금번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교단총회 100 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100 회 총회의 주제는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 이고 부제는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로 정하였습니다. 교단총회로서는 100회를 지나오면서 최초로 예수님의 성찬을 총회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카톨릭교회는 매 예배 미사때마다 성찬을 거행합니다만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성찬을 한달에 한번 하거나 부활절이나 새해 성탄절 특정한 때만 거행합니다. 어떻게 보면 카톨릭에 비해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횟수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을 받으면서도 그 깊은 뜻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에 반영하면서 살려하는 노력들은 우리 개신교회 교인들 사이에 구체화되어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성찬은 제도적인 면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고 세례와 성찬은 만국 그리스도인으로 편입된다는 의미이며 죄사함과 구원받았다는 증표다! 그런 정도의 의미로만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제도와 성례를 넘어서 이 성례 속에 예수님께서 담아 놓으신 보다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박봉랑 교수님께서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종교화되고 극단주의적 종교가 되면 오히려 지금 isis와 같이 세계의 문제꺼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만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가르침으로 나아가 즉 비종교화하여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 산산수훈의 보배같은 말씀을 실천해 나간다면 세상사람들로부터 기독교는 짓밟히지 않고 많은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비종교화가 일어나듯이 성찬에 있어서도 비종교화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금번 100 회 총회를 치른 이후에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주님의 깊은 뜻 앞에 엎드려 그 뜻을 성찰하고 그 뜻 아래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찬을 교회 안에서 하나의 의식과 예전으로만 수행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 뜻이 어디 있는지 포착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존재와 삶의 모든 것을 주시면서 우리와 함께 나누고 섬김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성찬정신으로 살아 더 베풀고 더 나누고 먼저 손 내밀고 더 용서하고 하늘의 축복과 은총과 사랑을 더 자주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더 적극적으로 나누며 손을 움켜지지 아니하고 아낌없이 펼쳐 하나라도 더 나누고 우리의 물질과 몸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눔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작은 천국을 이 땅 안에서 이루어가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아오신 100 회 총회를 준비하는 여러분들과 우리 영강교회 성도님들도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펼쳐가는 한 분 한 분 귀한 존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거룩한 삶을 쫓아 살 뿐 아니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100 회 총회를 맞이한 우리 기장인들이 여기 있는 우리들이 영강교회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눔과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 역시 성찬의 삶을 살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금번 100 회 총회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한없이 영광 돌리는 총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복되신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9:53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