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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당장로교회 새역사 60 주년 기념예배

관리자 2015-10-06 (화) 15:34 8년전 1712  

2015104(주일) 오전 11시 용당장로교회 새역사 60 주년 기념예배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 23 _ 26

제 목 :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의 은총과 평강이 올해 새역사 60 주년을 맞이한 용당장로교회 위에와 60 여년 동안 이 교회를 믿음과 사랑으로 지켜 오신 모든 성도님들과 하늘로 먼저 가 계신 성도님들, 이 교회를 목회해 오신 이두영 원로목사님과 사모님을 비롯한 역대 교역자님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용당장로교회를 위하여 피뿌려 헌신해 오신 심해석 목사님과 사모님 당회 장로님들과 모든 제직들 위에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성가대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용당교회의 원역사의 뿌리를 보니까 1925 년에 전남 무안군 이로면 용당리 1 구 박성환 성도의 집에서 현창애 전도사님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렸으니까 이제 2015 년 올해로 90 년의 역사를 지닌 교회입니다. 교단총회가 올해 100 회 기념총회와 기념선교대회를 가진 것은 기장도한국장로교의 역사를 공유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기장은 지금으로부터 약 2 년전 새역사 60 주년 대회를 가졌는데 용당장로교회는 올해 새역사 60 년입니다. 지나온 한국장로교 90 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60 년의 역사 속에서 용당장로교회는 수없이 많은 역사의 거센 풍파와 소용돌이 속에서도 흔적도 없이 사멸되거나 축소재생산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든든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오늘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예배를 드리게 됨은 무엇보다도 값주고 피로 사신 이 교회를 우리 주님께서 이 교회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적자와 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지나온 역사도 훌륭하지만 용당장로교회는 전임 이두영 원로목사님을 28 년 동안 모셨고 그 이후 1994 년에 담임으로 취임한 심해석 목사님을 올해로 22 년째 한결같이 모시면서 이 지역의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할 뿐 아니라 노회와 교단총회을 섬기면서 기장교단에 없어서는 안될 지체로서 든든히 서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 주님R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 교회가 선교 100 년을 향해 갈 때 주께서 브니엘의 태양으로 여러분의 미래를 환하게 밝게 비추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기관목사로서 말씀을 은혜롭게 전하는 좋은 강사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깊고 깊은 은혜는 여러분의 담임이신 심해석 목사님으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은 누가복음 22 19 절에서 20 절에 거의 같은 본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을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잡히시던 날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오래지 않아 자신은 잡혀가게 되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리라고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살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자신의 피라 하시고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혹은 나를 기념하라!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을 때 우리가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그 옆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음성과 표정에서 예수님의 심장의 고동으로부터 그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그 진정한 뜻은 그 핵심이 무엇이셨을까 짐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여서 제자들로부터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을 전달받았는데 오늘날 이는 예배에서 설교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 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무척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44 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46 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여기서 우리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 가운데 놓칠 수 없는 걸 하나 발견합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과 떡을 뗀다는 것이 각각 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이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그냥 한 번에 써도 될텐데 서로 따로 떼어 말씀한 것은 떡을 뗀다는 것 속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단지 식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떡을 떼셔서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다!하신 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기 위하여 함께 떡을 뗀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이 가슴 속에 새기기만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떡을 뗀다는 것을 단지 음식물을 먹기 위해 쪼갠다는 뜻이 아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셨음을 깊이 생각하고 떡을 떼는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떡을 떼면서 그렇지!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나누어 주셨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단지 떡만 떼어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지! 이 땅에 계실 때도 하늘의 말씀도 주시고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정도 나누어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어 병도 고쳐주시고 죽으시면서 까지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죽어 가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지! 자신의 몸을 분해하시고 해체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온전히 모두 다 몽땅 털어 다 나누어 주셨지!” 그렇게 생각하고 떡을 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만 하고 회상만 하고 기억만 하고 떡만 뗐습니까?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침내 자신의 삶을 떼어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의 물건을 내놓아 서로 함께 통용하기 시작하였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초대교인들은 마음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고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과 박해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나누며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나눔과 섬김의 삶을 자신들끼리에게만 해당시키고 그것을 세상사람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웃들과는 담벼락을 쌓고 살았더라면 사도행전 2 47 절의 현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머리 속의 기억으로만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화시켜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인카네이트(incarnate)하여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시키면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삶을 보고 세상사람들이 너도 나도 예수를 따르고 믿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로마제국 깊숙이 복음이 스며들어 약 300 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이 자신의 국교로 선포할 만큼 기독교는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고 영향력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종교화가 되면서 예배를 드리는 예전도 점점 복잡한 형식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 즉 예수님의 성찬은 예배와 예전 속에 담겨져서 긴 시간이 이 예전을 행하는데 할애되었습니다. 후에 로마카톨릭교회는 이 성찬예전의 의미를 신학화하여 <화체설>이라는 교리로 확립하였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카톨릭의 사제가 서품을 받으면 천국의 열쇠를 맡는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 위에 손을 얹고 축성하면 떡과 잔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하고 불사의 능력이 그곳에 임재하게 된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위해 기도할 때 그 떡과 포도주는 본질이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화체설입니다.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가 루터는 반박하였습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성례전은 마술이 아니다. 그래 사제가 축성하여 떡이 예수의 살로 변했다 치자! 그럼 제일 먼저 구원받은 이들이 교회성도들일 것 같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구원서열 1 위는 교회 안에 돌아다니는 쥐들일 것이다. 빵도 갉아 먹고 포도주도 찔끔거리면서 마실테니까! 성찬의 효과는 마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이는 그것은 헛것이다. 사제가 축성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상관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 가운데 예수님께서 살과 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실재설>입니다. 또 다른 종교개혁가인 쯔빙글리는 이에 반박하였습니다. “루터! 너는 성경 좀 더 읽어라! 예수님께서 제정의 말씀에서 뭐라고 하셨냐? 나를 기념하라 되어 있잖냐? 그러면 말씀 그대로 보면 성찬의식은 그날 그때를 상징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쯔빙글리의 성찬론은 한마디로 <상징설-기념설>로 정리가 됩니다. 루터의 <실재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 사이에 격론이 붙자 두 사람이 1529 년 마부르그에서 만나 회담을 합니다. 루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쯔빙글리 너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왜 빼 먹는거냐?” “이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주님의 말씀이고 그 분의 현존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징이라고 우겨대는 너 쯔빙글리와는 영영 이별이다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웠고 그 제자들이 세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들은 분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살과 사랑의 피를 주신 것인데 카톨릭교회와 종교개혁가들은 서로 교회를 나누면서 사랑으로 주신 것을 열불나게 서로 싸우는 소재로 사용하여 성찬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종교개혁사 칼빈은 둘 사이에 논쟁에 대하여 쯔빙글리도 맞고 루터도 맞고 내 생각으로는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 없다. 작은 컵에 바닷물을 다 담을 수 없다. 루터의 말대로 주님은 믿음으로 참여한 이 떡과 잔에 영으로 임재하시고 주님이 떡과 잔에 임재하시는 것은 신비이다.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와는 다르게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종교개혁가들의 성찬논쟁은 그 제자들에게도 이어져서 프러테스탄트의 교회들이 서로 핵분열을 하면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그 결과 루터파 교회와 개혁파 교회가 나누어졌으며 루터파는 독일을 중심으로 개혁파 교회는 네델란드와 영국을 중심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나누어져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데 우리 기장은 개혁파교회의 전통에 속해 있게 된 것입니다. 500 년 동안 예수님의 성찬을 가지고 로만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들 사이에 그리고 개신교들끼리도 서로 허벌나게 싸웠습니다. 서로 싸우는 과정에 이론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서로 죽이고 죽었는데 특별히 서로 신학의 이론이 다르다고 같은 개혁자들 간에도 화형을 처해 죽이는 등 참으로 못할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500 년 동안에 진행된 성찬논쟁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렀고 교회 안의 종교적 유물로만 기능하였지 예수님의 성찬의 깊으신 뜻을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하였고 성찬은 안에서나 자기들끼리 논쟁꺼리였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그 무엇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승천하시어 하늘보좌 위에서 이 땅을 바라보고 계셨고 계실 것입니다. 특별히 값주고 피로 사신 교회를 보시면서 이 땅에 계실 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우시는 것과 똑같이 울고 계실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라고 주신 성찬을 그 뜻과 정반대로 서로 싸우고 이단으로 정죄하고 서로 갈라서고 분열하고 서로 죽이는데 사용하여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보좌에서도 예수님은 얼마나 지상의 교회들이 서로 분열하고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서로 엄청난 살인을 하면서 죽고 죽이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을 것입니다. 지난 해 독일에 국제회의차 갔을 때 어느 도시에 기록관이 있어서 보았습니다. 카톨릭교회 신도들이 어느 날 밤을 기해서 일제히 개신교인 삼만 명을 칼로 돌멩이로 쳐 죽여 버립니다. 그 생생한 역사와 기록들을 나열하고 전시해 놓았던 기록관을 보았습니다. 믿는 바가 서로 다르다고!! 로마 카톨릭만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개혁자 칼빈도 삼위일체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셀베투스라는 이를 불에 태워 죽여 버립니다. 우리 한국장로교회들을 보고도 손수건을 많이 눈물로 적시셨을 것입니다. 장로교가 207 개로 나누어지면서 얼마나 많은 싸움을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왜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는 내 살이고 내 피라 하시면서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 말씀하셨겠습니까? 십자가상에서 피흘려 죽어가시면서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향해 뭐라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셨습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죽어가시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시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가슴의 뜨거운 온도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는 내 살이다 이는 내 피다 하고 주시면서 이를 기억하여 행하여라 하심은 예수님께서 무슨 화체설을 말씀하시고자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무슨 기념설이나 공재설이나 상징설이나 영적 임재설을 말씀하시고자 함이었겠습니까? 제자들과 저녁을 같이 하시면서 그야말로 내 살이다 내 피다 하신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내 생명을 내 사랑을 너희에게 나누어 준다 하심입니다. 나를 기억하고 이를 행하여라! 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나눔과 같이 너희 역시 너희의 생명을 나누어 주면서 살라!는 거룩한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계명에 오롯이 그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성찬을 주심은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어 우리를 사랑하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도 살을 나누고 피를 나누어 너희도 너희 생명을 나누어 너희도 너희의 소유를 나누고 너희 마음을 나누고 너희 존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나누며 서로 사랑하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떡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해 주신 말씀을 듣고 그 핵심을 찔러서 그저 떡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와 삶과 생명과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는 말씀을 무슨 이론으로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성찬의 삶을 세상 안에서 살아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성찬을 예전으로 그 정신을 흩어버린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성찬을 교회 안에서만 성찬을 그리스도인들끼리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초대교회 교인들을 칭찬하고 저들의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들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갔고 그럼으로 인해 예수님의 빛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그 빛이 비추어졌던 것입니다.

 

한 때 유럽 특별히 독일 신학계에는 <성찬의 사회화> 논쟁이 일었습니다. 이는 신학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두고 예수님의 귀한 말씀과 정신을 교회 안에다 가두어 두면 안된다! 성찬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신 그 정신을 오늘날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굶주린 이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이들, 집없는 이들, 전쟁과 질병으로 폭력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은데 이들 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의 떡을 그들에게 주고 예수님의 피를 그들에게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논쟁이 일었습니다. 성찬을 우리들끼리만 먹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이 아니다! 뒤이어 <세계를 위한 빵 Bread for the World>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성찬의 사회화는 예수님께서 성찬을 나누어주심을 예루살렘과 유대 안에만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만 유폐시킬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지고 나가자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금번 교단 총회 100 회 총회의 주제는 <이것을 기억하여 행하여라!> 이고 부제는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로 정하였습니다. 교단총회로서는 100회를 지나오면서 최초로 예수님의 성찬을 총회주제로 삼은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카톨릭교회는 매 예배 미사때마다 성찬을 거행합니다만 우리 개신교회에서는 성찬을 한달에 한번 하거나 부활절이나 새해 성탄절 특정한 때만 거행합니다. 어떻게 보면 카톨릭에 비해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횟수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을 받으면서도 그 깊은 뜻을 되새기면서 자신의 신앙에 반영하면서 살려하는 노력들은 우리 개신교회 교인들 사이에 구체화되어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성찬은 제도적인 면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 참여할 수 있고 세례와 성찬은 만국 그리스도인으로 편입된다는 의미이며 죄사함과 구원받았다는 증표다! 그런 정도의 의미로만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제도와 성례를 넘어서 이 성례 속에 예수님께서 담아 놓으신 보다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박봉랑 교수님께서 <기독교의 비종교화>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종교화되고 극단주의적 종교가 되면 오히려 지금 isis와 같이 세계의 독소가 되고 문제꺼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만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진리의 가르침으로 나아가 즉 세속 안에서 비종교화하여 생활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 산산수훈의 보배같은 말씀을 실천해 나간다면 세상사람들로부터 기독교는 짓밟히지 않고 많은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비종교화가 일어나듯이 성찬에 있어서도 비종교화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100 회 총회를 치른 이후에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주님의 깊은 뜻 앞에 엎드려 그 뜻을 성찰하고 그 뜻 아래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찬을 교회 안에서 하나의 의식과 예전으로만 수행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 뜻이 어디 있는지 포착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존재와 삶의 모든 것을 주시면서 우리와 함께 나누고 섬김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성찬정신으로 살아 더 베풀고 더 나누고 먼저 손 내밀고 더 용서하고 하늘의 축복과 은총과 사랑을 더 자주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더 적극적으로 나누며 손을 움켜지지 아니하고 아낌없이 펼쳐 하나라도 더 나누고 우리의 물질과 몸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눔으로서 우리 기장인들이 사는 삶의 현장이면 어디서든지 먹구름 속에서도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 이 답답한 세상 가운데 펼쳐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새역사 60 주년을 기념하는 이 예배에 나아오신 용당장로교회 성도님들도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펼쳐가는 한 분 한 분 귀한 존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60 이란 우리식으로 말하면 한 갑자를 도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한 갑자를 돌 때 달리 생각하자면 이제 새역사 60 년을 지나 선교 100 주년을 향해 갈 때 예수님의 귀하신 말씀과 뜻을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가지고 나가 실천하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참으로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용당장로교회 성도들이 있는 곳이면 용당장로교회 성도들이 일하는 곳이면 용당장로교회 성도들이 숨쉬고 활동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조그만 하늘나라가 움트고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향기가 날리고 열매가 맺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은총의 하나님께서 브니엘의 태양을 용당장로교회가 가는 앞길 위에 언제까지나 환하게 비추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고 모든 것을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거룩한 성찬의 삶을 쫓아 살 뿐 아니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성찬의 깊은 뜻을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새역사 60 주년을 맞이한 이 용당장로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눔과 헌신과 사랑의 삶을 사신 것처럼 이 땅과 세상 안에서 거룩한 성찬의 삶을 살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선교 100 주년을 향하여 더욱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찬송하며 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은총 베풀어 주시옵소서! 용당장로교회 성도들을 통하여 이 세상 안에서 하늘나라가 더욱 깊어지고 더 넓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03 21:39:53 총무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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