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4일(주일) 오전 11시 용당장로교회 새역사 60 주년 기념예배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1 장 23 절 _ 26 절
제 목 : 성찬의 깊은 뜻, 세상 안에서!!
□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의 은총과 평강이 올해 새역사 60 주년을 맞이한 용당장로교회 위에와 60 여년 동안 이 교회를 믿음과 사랑으로 지켜 오신 모든 성도님들과 하늘로 먼저 가 계신 성도님들, 이 교회를 목회해 오신 이두영 원로목사님과 사모님을 비롯한 역대 교역자님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용당장로교회를 위하여 피뿌려 헌신해 오신 심해석 목사님과 사모님 당회 장로님들과 모든 제직들 위에 귀한 찬양을 주께 올린 성가대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 용당교회의 원역사의 뿌리를 보니까 1925 년에 전남 무안군 이로면 용당리 1 구 박성환 성도의 집에서 현창애 전도사님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렸으니까 이제 2015 년 올해로 90 년의 역사를 지닌 교회입니다. 교단총회가 올해 100 회 기념총회와 기념선교대회를 가진 것은 기장도한국장로교의 역사를 공유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기장은 지금으로부터 약 2 년전 새역사 60 주년 대회를 가졌는데 용당장로교회는 올해 새역사 60 년입니다. 지나온 한국장로교 90 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60 년의 역사 속에서 용당장로교회는 수없이 많은 역사의 거센 풍파와 소용돌이 속에서도 흔적도 없이 사멸되거나 축소재생산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든든한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오늘 신령과 진정으로 감사예배를 드리게 됨은 무엇보다도 값주고 피로 사신 이 교회를 우리 주님께서 이 교회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고 적자와 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 지나온 역사도 훌륭하지만 용당장로교회는 전임 이두영 원로목사님을 28 년 동안 모셨고 그 이후 1994 년에 담임으로 취임한 심해석 목사님을 올해로 22 년째 한결같이 모시면서 이 지역의 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할 뿐 아니라 노회와 교단총회을 섬기면서 기장교단에 없어서는 안될 지체로서 든든히 서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 주님R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 이 교회가 선교 100 년을 향해 갈 때 주께서 브니엘의 태양으로 여러분의 미래를 환하게 밝게 비추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기관목사로서 말씀을 은혜롭게 전하는 좋은 강사가 아닙니다. 말씀에 대한 깊고 깊은 은혜는 여러분의 담임이신 심해석 목사님으로부터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은 누가복음 22 장 19 절에서 20 절에 거의 같은 본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을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붇는 것이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잡히시던 날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오래지 않아 자신은 잡혀가게 되고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리라고 분명히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시면서 자신의 살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자신의 피라 하시고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혹은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을 때 우리가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그 옆자리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음성과 표정에서 예수님의 심장의 고동으로부터 그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주신 그 진정한 뜻은 그 핵심이 무엇이셨을까 짐작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여서 제자들로부터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을 전달받았는데 오늘날 이는 예배에서 설교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 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는데 무척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44 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절입니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46 절을 보겠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 가운데 놓칠 수 없는 걸 하나 발견합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과 떡을 뗀다는 것이 각각 있습니다. 떡을 떼는 것이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이라면 그냥 한 번에 써도 될텐데 서로 따로 떼어 말씀한 것은 떡을 뗀다는 것 속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떡을 뗀다는 것은 단지 식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떡을 떼셔서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내 몸이다!” 하신 것을 깊이 가슴에 새기기 위하여 함께 떡을 뗀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이 가슴 속에 새기기만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떡을 뗀다는 것을 단지 음식물을 먹기 위해 쪼갠다는 뜻이 아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자신의 생명을 나눠주셨음을 깊이 생각하고 떡을 떼는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떡을 떼면서 “그렇지!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살과 피를 아낌없이 다 나누어 주셨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단지 떡만 떼어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지! 이 땅에 계실 때도 하늘의 말씀도 주시고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정도 나누어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시어 병도 고쳐주시고 죽으시면서 까지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죽어 가시면서도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지! 자신의 몸을 분해하시고 해체하시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온전히 모두 다 몽땅 털어 다 나누어 주셨지!” 그렇게 생각하고 떡을 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만 하고 회상만 하고 기억만 하고 떡만 뗐습니까?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침내 자신의 삶을 떼어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의 물건을 내놓아 서로 함께 통용하기 시작하였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초대교인들은 마음도 나누고 기쁨도 나누고 예수님 때문에 받는 핍박과 박해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다 나누며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만일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나눔과 섬김의 삶을 자신들끼리에게만 해당시키고 그것을 세상사람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웃들과는 담벼락을 쌓고 살았더라면 사도행전 2 장 47 절의 현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47 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머리 속의 기억으로만 국한시키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화시켜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인카네이트(incarnate)하여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전환시키면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삶을 보고 세상사람들이 너도 나도 예수를 따르고 믿게 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로마제국 깊숙이 복음이 스며들어 약 300 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이 자신의 국교로 선포할 만큼 기독교는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고 영향력있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종교화가 되면서 예배를 드리는 예전도 점점 복잡한 형식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말씀 즉 예수님의 성찬은 예배와 예전 속에 담겨져서 긴 시간이 이 예전을 행하는데 할애되었습니다. 후에 로마카톨릭교회는 이 성찬예전의 의미를 신학화하여 <화체설>이라는 교리로 확립하였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카톨릭의 사제가 서품을 받으면 천국의 열쇠를 맡는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 위에 손을 얹고 축성하면 떡과 잔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하고 불사의 능력이 그곳에 임재하게 된다. 사제가 떡과 포도주를 위해 기도할 때 그 떡과 포도주는 본질이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화체설입니다.
□ 이에 대하여 종교개혁가 루터는 반박하였습니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지 말아라! 성례전은 마술이 아니다. 그래 사제가 축성하여 떡이 예수의 살로 변했다 치자! 그럼 제일 먼저 구원받은 이들이 교회성도들일 것 같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구원서열 1 위는 교회 안에 돌아다니는 쥐들일 것이다. 빵도 갉아 먹고 포도주도 찔끔거리면서 마실테니까! 성찬의 효과는 마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찬에 실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믿음이 없이는 그것은 헛것이다. 사제가 축성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상관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믿음 가운데 예수님께서 살과 피로 현존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실재설>입니다. 또 다른 종교개혁가인 쯔빙글리는 이에 반박하였습니다. “루터! 너는 성경 좀 더 읽어라! 예수님께서 제정의 말씀에서 뭐라고 하셨냐? 나를 기념하라 되어 있잖냐? 그러면 말씀 그대로 보면 성찬의식은 그날 그때를 상징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쯔빙글리의 성찬론은 한마디로 <상징설-기념설>로 정리가 됩니다. 루터의 <실재설>과 쯔빙글리의 <상징설> 사이에 격론이 붙자 두 사람이 1529 년 마부르그에서 만나 회담을 합니다. 루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쯔빙글리 너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왜 빼 먹는거냐?” “이것은 해석의 여지가 없는 주님의 말씀이고 그 분의 현존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상징이라고 우겨대는 너 쯔빙글리와는 영영 이별이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싸웠고 그 제자들이 세운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들은 분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살과 사랑의 피를 주신 것인데 카톨릭교회와 종교개혁가들은 서로 교회를 나누면서 사랑으로 주신 것을 열불나게 서로 싸우는 소재로 사용하여 성찬을 예수님의 가르침과 반대로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