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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7.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세상속의 이방인

관리자 2011-03-27 (일) 11:00 13년전 1269  

세상속의 이방인

 

요한복음 15:18-27절

 

미국의 뉴올리안즈에서 말가리다 부인은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방은 가난한 흑인이 많이 살고 있어서 좀처럼 기부금이 모아지지 않아 갈수록 고아원 운영이 어려워졌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말가리다 부인은 가만히 앉아서 고아들을 굶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하든 고아들에게 좋은 소식을 주기 위해서 검은 옷을 입고 이곳저곳으로 모금통을 가지고 다니다가 어느 술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테이블 사이를 돌면서 부드러운 미소와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어 달라고 권유했습니다. 얼굴을 돌리는 사람, 마지못해 동전을 주는 사람들 중에서 갑자기 한 주정뱅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시끄러워. 남은 술마시는데 분위기 깨지 말고 어서 꺼져!” 그러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맥주잔을 부인의 얼굴에 던졌습니다.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잔은 부인의 얼굴을 때리면서 박살이 났고 부인의 얼굴에서는 피가 났습니다.

술집안의 손님들은 모두 깜짝 놀라 숨을 죽이고 부인을 쳐다보았습니다. 부인은 천천히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의 피를 닦아냈습니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진 잔의 유리조각 하나하나를 주워서 두손으로 받쳐들고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컵은 저에게 주시는 선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아원의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요?” 그러자 장내가 조용해지며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한 신사가 일어나 모자를 벗고 정중하게 부인의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언제 준비했는지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부인에게 내밀며 말했습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돈을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소란이 있은 다음 부인은 조금 전의 주정뱅이가 앉았던 테이블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주정뱅이의 테이블 위에는 작은 메모지와 함께 그의 지갑이 통째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 메모지에는 “미안합니다. 이 돈을 불쌍한 고아들에게 써주십시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말가리다 부인은 기독교인의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가리다 부인처럼 신자는 자신이 고통을 받더라도 그 고통으로 인하여 기뻐할 이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고통으로 인해 구원 받을 우리 인간의 큰 기쁨을 먼저 생각하였듯이 우리의 고통으로 인해 행복해할 이웃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정권에 의해 밧모섬으로 귀양가기 전에 썻던 내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때 당시 교회는 로마로부터 엄청난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비참하게 순교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가를 생각하고 어떻게 그 환난을 이겨나갈 것인가를 묵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1. 초대교회는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계를 세상과 교회로 구분하고, 세상과 교회는 타협이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이란 세상에 속하든지, 아니면 교회에 속하든지 둘 중의 하나에 속하지 중간상태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끊임없는 핍박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교회가 아직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 핍박이 대단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무슨 큰 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러서 핍박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초기에는 사람들이 ‘로마의 정신’을 기렸고, 로마의 정신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평화롭고 정의로운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의 정신’이 후에는 ‘황제의 인격’을 숭배하는 데로 발전했습니다.

이때에 로마 제국은 영국에서 유브라데, 다뉴브 강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 광대한 영토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통합의 원리로 ‘황제숭배사상’을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다른 민족의 종교를 완전히 없애고 황제숭배를 절대신앙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단지 로마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1년에 한 번씩만 황제를 위해 소량의 향을 태우고 ‘가이사는 주님이시다!’ 라고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렇게 한 후에 얼마든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 숭배가 아시아 지역에 파급되면서 유일신을 섬기는 교회와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주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숭배와 황제를 주로 부르는 일을 거절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자 로마 당국은 기독교인들을 ‘불충한 백성’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황제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을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막13:9).

초대교회시대는 교회에 대한 많은 핍박이 있었고 수 많은 사람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성 폴리캅이 있었습니다. 그가 순교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러온 병졸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준 뒤 화형대 앞에 섰습니다. 그때 호민관이 폴리캅에게 지금이라도 배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나는 86년동안 그리스도를 섬겨왔고 주님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왕이시요,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하겠는가?” 하고 화형의 장작더미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화형을 집행하는 형리에게 외칩니다. “그대들은 한 시간 가량 사르고 없어질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하여 장차올 심판의 불을 모르는가? 왜 이리 지체하고 있느냐 어서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라.”

그는 아주 평화롭게 찬양을 불렀으며,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서는 천사들이 그에 화답하였습니다.

이렇게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것은 그들의 비타협적인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비타협적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가 섬길 분은 없습니다.

예수만을 섬긴다고 해서 신자가 다른 종교인 불교나 원불교나 유교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함께 연대하여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 받았다는 진리는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2. 신자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만 하나님을 떠나서, 즉 하나님을 멀리하여 조직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떠났으니 어두움의 세력이 왕권을 행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어두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절).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 속에 살고는 있으나 세상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속세를 완전히 떠나서 사는 자는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에서 우리는 속세의 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에 거처를 정하고는 있지만 언제나 천국을 바라보며 살기에 천국가는 그날까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의 나그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타락한 세상의 풍습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타락한 세상에서 구약의 에녹이나 노아는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서 살았던 신앙의 선배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의 세상에서 이방인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시다가 홍수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를 지었는데 12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때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겠습니까? 그것도 120년 동안이나 지었으니 정말 미친 노인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였고, 마침내 무서운 홍수가 왔습니다.

노아와 그 식구들은 그 땅의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도 노아처럼 세상이 가는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명예보다는 내 모든 것을 주님께 걸고, 그분에게 드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서 노아처럼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땅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이 사는 길입니다.

 

3. 세상은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전도에 힘쓰는 교회가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전도해 보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 가운데 노동을 하며 전도하는 자비량 회교 선교사가 많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런 열심 때문에 지금 세계가 회교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주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진리인 것을 알면서도 전하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전하는데도 사람들이 냉담한 것이 두려워서 전하지 않는 신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영적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조물주이시고, 그분이 독생자 예수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이 진리를 다른 종교인들은 너무 배타적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비난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 배타적인 기독교를 믿고 전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은 본래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열심히 충성하였지만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자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그가 신자들을 박해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그의 눈의 비늘이 벗겨져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예수의 복음을 모르는 이 세상에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의 비늘이 벗겨져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도록 우리는 기도하며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19세기 미국의 부흥 전도자 무디 목사는 수십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고, 특히 주일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운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음을 전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하루는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으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옷을 입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밤중에 거리에 서서 말씀으로 권유할 대상자를 찾는데, 한 술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다가가서 “예수님을 아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술주정꾼은 '예수'라는 말을 듣자마자 화부터 벌컥 냈습니다. 무디는 기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후 3개월이 지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 예전의 그 술주정꾼이었다. 그 술주정꾼이 고백하기를 그날 밤 예수님을 아느냐는 말에 크게 화를 냈으나 그로부터 그 말이 내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예수를 믿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씨는 무디가 뿌렸으나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형체도 없는 작은 씨가 박토에 뿌려져 뿌리를 내려 계속 자라게 하신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리 때문에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승리하려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에 따르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는 세상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언제나 신자는 성령에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 속하였으니 성령 충만함을 받아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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