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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6.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흔들리는 충성심

관리자 2011-01-16 (일) 11:00 13년전 1171  

흔들리는 충성심

 

요한복음 12:36~38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위기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위기를 만나 어떤 사람은 그것에 눌려 인생을 암울하게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더욱 더 행복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1930년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는 금을 캐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골드러시를 이루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이 너도나도 천막을 치자 천막천을 만들던 리바이스 스트라우스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에게도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빚까지 내어 만든 많은 천막천이 납품할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근심이 가득한 스트라우스의 눈에 바지를 꿰매고 있는 광부들의 모습이 띄었습니다. “그래! 질긴 천막천으로 바지를 한번 만들어 보자.”

그리하여 그가 수북이 쌓여있던 천막천으로 만든 바지가 시장에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푸른색의 이 튼튼한 바지는 '청바지'로 불리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트라우스의 청바지는 3년 만에 전 세계에 불티하게 팔리며 그를 세계적인 부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스트라우스 청바지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즐겨 입는 옷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만 이렇게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큰 위기를 맞아서도 그 위기를 극복하여 더욱 더 큰 은혜를 끼친 사람이 있습니다.

커싱(W. O. Cushing) 목사는 목회를 아주 잘했습니다. 날로 교회가 부흥되어 많은 사람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성대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할 수 없으니 정말 치명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 강단을 떠났습니다. 그때 커싱은 정말 실망하였습니다. 목사로서 설교를 할 수 없어서 매일 한탄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후에 커싱 목사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기도 중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시상을 글로 옮겼는데 그것이 찬송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300편의 찬송시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중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찬송이 나왔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419장)입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평안하다 그 사랑 끊을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거기서 살리

 

커싱 목사는 비록 강단에서 설교는 못했지만 찬송시를 통해서 1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은혜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커싱 목사는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더욱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최후의 길을 가시는 중에 두 제자가 실패했습니다. 하나는 가룟 유다로서 그는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불명예스러운 치욕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하나의 실패자인 베드로는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은 완전히 계획적이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냉혈적인 방법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하고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스승 예수의 강렬한 호소를 고의적으로 그리고 부정하게 뿌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배반은 무계획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배반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나약하여 순간적으로 예수를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본래 베드로는 예수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베드로는 생각했습니다.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요13:38)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자신을 안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아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께서 베드로를 얼마만큼 아시는 가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적으로 급하고 충동적이었습니다. 또한 불안정하였고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마음에 있는 바를 먼저 말해 버리는 버릇이 있을 정도로 성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에 군중들이 자신을 왕으로 옹위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아시고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하시고 당신은 혼자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탄 배가 큰 풍랑으로 인하여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밤 사경이었습니다. 사경이란 우리나라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입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풍랑으로 고생했습니다.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고생을 아시고 물 위를 걸어서 오시고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14:27)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14:28)고 요청했습니다. 얼마나 급한 사람입니까?

물론 예수께서 ‘오라’고 하셔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걷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처음이요 나중일 정도로 유일무이한 기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질이 급한 사람은 모든 일을 그릇 치는 법입니다. 실패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런 성질 급한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리입니까? 어떤 영웅호걸보다도 더 크게 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성격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우유부단도 다 아십니다. 우리의 성품의 모난 것도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족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들어 쓰십니다.당신의 은혜를 통해 우리의 연약함이 위대한 복음의 역사에 쓰임 받게 하십니다.

스펄젼 목사는 위대한 설교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목사가 한번은 아주 형편없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도 뭔가를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제 형편없는 설교를 축복해 주십시오”

그는 한 주간 내내 이 기도를 했습니다. 밤중에도 일어나서 그 설교에 관련된 기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은 그는 지난 주의 엉터리 설교를 보상하려는 마음으로 아주 멋진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노라 했고, 그 자신도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는 두 편의 설교에 대한 결과를 한번 알아보고 비교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으로 놀랄 만큼 달랐습니다.

첫번째의 엉터리 설교를 통해서는 41명이나 주님을 영접했지만, 두 번째의 그 멋진 설교를 통해서는 단 한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고후12:5)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 자신이 연약함을 느낄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며 영광 돌립시다. 주님이 쓰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해 주님께만 영광 돌리고 찬양 돌립시다.

 

2. 예수는 베드로의 사랑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베드로 일행을 만났을 때 베드로 일행은 예수를 기다리지 못하고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요21:6)는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대로 하자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자기들의 뜻대로 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을 떠나서 가정과 사업을 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베드로 일행이 해변가에서 조반을 먹은 후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21:15)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며 물으실 때의 사랑이란 어휘와 베드로가 대답할 때 사용한 사랑이란 어휘는 똑같이 사랑이라고 번역했지만 실제로는 다릅니다.

헬라 말에서는 사랑이란 종류가 네 가지입니다. 에로스, 아가페, 스톨게, 필레오입니다. 스톨게는 형제 간의 사랑, 동족 사랑 같은 겁니다. 필레오는 우정 같은 것을 뜻합니다. 에로스는 성적 사랑이고,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대답한 사랑은 ‘필레오’입니다. 우정 같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로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필레오’로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잡히신 날 모닥불 곁에서 큰 소리로 주님을 부인한 일이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요18:25-27).

베드로는 자신의 사랑이 필레오의 사랑 정도 밖에 못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감히 주님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할 자격이 없음을 알았고 또 그러한 것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자신의 부족한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그 고백을 듣고 “내 양을 치라”(요21:16)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작을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다 자신을 내어 놓을 때 주님은 우리를 써 주실 것입니다.

 

3. 예수는 베드로의 현재와 미래를 다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요13:36)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잡히시고 재판 받은 후 십자가에 죽을 때 계속 배반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정도로 나약했지만 예수께서는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유부단한 베드로가 후에는 위대한 주의 종이 될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마지막에 로마 교회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되 거꾸로 못 박혀 죽을 것을 아셨습니다. 베드로의 영웅적인 모습을 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현재의 부족한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미래에 우리를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무리 부족하고 천하고 보잘 것 없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새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부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별로 기대할 것이 없는 어부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은 파격적인 이름이었습니다. 베드로란 반석, 즉 바위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바위라는 것입니다.

반석이란 위대한 인물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었는데 후에 그는 정말로 반석이 되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세계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대단한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유독 더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에서보다는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았습니다. 그 유가 무엇일까요?

객관적으로 에서는 그 당시 사냥에 능한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거짓말과 속임에 능한 야곱보다는 오히려 에서가 더 정직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이 더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일까요?

왜 하나님이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사랑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한 심리학자의 글이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는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도 특별히 가깝게 느껴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자신의 생일파티에 너무 아파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없는 아이이고 크리스마스날 홍역을 앓는 아이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피아노 연주회를 망치고 받아 쓰기에서 매번 틀리는 아이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풋볼 경기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고 칠칠 맞아 자전거를 잃어 버리고 다닙니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는 거짓말을 해서 제가 야단을 친 아이입니다. 모든 어머니들은 가장 좋아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같은 아이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 순간에 당신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야곱은 거짓말과 책략에 능한 그저 안쓰러운 아이였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는 부족한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간절히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그런 믿음을 보시고 야곱을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게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그 사람이 약할지라도 들어 쓰십니다. 신자는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능력 주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주님이 다 아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별 볼일 없으나 미래의 반석으로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반석이 될 만한 능력을 주님은 주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위해서 새해를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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