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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

관리자 2011-06-12 (일) 11:00 12년전 952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습

 

 

요한복음 17:20~26절

 

양팔과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면서도 전 세계인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 닉 부이치치라는 호주 청년이 얼마 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다니면서 1,500회에 걸쳐 간증을 하면서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꿈과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전 세계인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바다표범처럼 팔다리가 짧은 테트라-아멜리아 이상, 즉 해표지증(바다표범의 물갈퀴처럼 팔다리가 짧은 증상)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회자였지만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그를 보고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넋이 나간 어머니도 그를 안아 줄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닉은 나면서부터 삶의 기쁨보다 좌절과 고통을 먼저 맛보았습니다. 그는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살을 믿음으로 극복하였습니다.

그는 자살 충돌에 시달릴 때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맹인을 고친 예수의 이야기를 읽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믿고 감사했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왼쪽 엉덩이에 붙어 있는 작은 발은 삶의 많은 부분을 도와주었습니다. 닉은 그 발을 ‘닭다리’라고 부르지만 그 발을 이용해서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축구면 축구, 수영이면 수영, 서핑이면 서핑, 골프면 골프, 다이빙이면 다이빙 등 모든 것을 해냈습니다.

닉은 부모님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신의 의지,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장애인이지만 좌절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늘도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곳에는 어디나 달려가 삶을 긍정과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격려합니다. 그는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는 “팔다리가 없는 나도 사는데 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십니까?”라고 위로합니다.

“난, 당신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이해합니다. 힘들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하고 격려합니다.

그는 오늘날 희망의 전도사가 되기까지 늘 고민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왜 제가 이런 장애를 갖고 태어났을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 다니면서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희망을 전하는 희망 전도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여기 닉 부이치치처럼 우리 속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요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그 모습을 모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을 통해서 복음이 증거되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는 것을 아시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예수의 기도, 이 대제사장의 기도 때문에 오늘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인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기도를 묵상하면서 지금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성도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남아 있는 열한 제자가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 되기를 간곡히 기도드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21절)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삼위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만 이유는 바로 성삼위가 하나로 일체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이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삼위는 서로 구분은 되어 있지만 그 구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셋으로 구분은 되어 있지만, 그 구분 속에서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 구분은 되어 있지만 그 구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구분되어 있지 않은 하나는 획일적인 것입니다. 획일적인 것은 참다운 하나가 아닙니다. 참다운 하나는 그 속에 다양한 것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고 구분만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로부터 고립되어 있기에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내 것만 고집하고 주위를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나’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너’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너’는 ‘나’를 ‘나’ 되게 하는 ‘너’로서 결국 또 하나의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가 진정으로 참다운 또 하나의 ‘나’가 될 때 ‘우리’의 세계가 열립니다. 이 ‘우리’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차이, 즉 서로의 담을 허물어서 경계를 낮춰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 속의 통일입니다. 구별 속의 조화입니다. 차이와 구별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통일과 조화만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삼위일체는 바로 차이 속의 통일, 구별 속의 조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삼위일체의 정신을 이 세상에서도 실현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남은 나와 ‘다른’ 존재입니다. 이 다름으로 해서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름으로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다름 속에서도 조화를 이룰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조화 속에서 나와 남의 차이는 더욱 아름다운 차이, 즉 나와 남을 더 살찌우는 차이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각기 구분되어 다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김씨, 이씨, 정씨 다 다르지만 그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처럼 우리들은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고 한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 안에서 한 소망을 가졌고, 한 세례를 통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엡4:4-6).

한 믿음이 이처럼 중요하기에 예수께서는 중보기도에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절).

따라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승천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전 세계로 퍼져 나갔지만 11세기에 동서 교회가 갈라졌고, 16세기에는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을 통해 서방교회로부터 개신교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 개신교는 수 없이 많은 교파로 나뉘어져 버렸습니다. 다양한 교파가 있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교회를 통해 다양한 형식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교파, 다양한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다양한 교회, 다양한 교파는 복음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됩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너무나 많은 교파나 교회로 나뉘게 되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삼위일체가 보여주듯이 중요한 것은 다양성 속의 통일입니다.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제도적인 조직을 하나로 만들어 통일시키는 것은 다양성을 억압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도로서 하나가 되기보다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연합하여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사랑 안에서 연합과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툼 속에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교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그 믿음 안에서 하나이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 성도들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과 똑같은 삶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가 그렇게 많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과 일치되게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일치된 삶을 사셔서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임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7)

예수께서 당신이 하나님과 일체가 된 것처럼 우리들도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당신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아 우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해야 합니다.

1941년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는 유대인 한 명이 도망가면 포로 가운데 10명을 사형시키도록 했다고 합니다. 마침 포로 한 명이 도망쳐서 포로 10명을 사형시키게 되었습니다.

독일군 사령관이 사형시킬 사람 10명을 고르는데, 10명 중 한 명이 자신은 아내도 자식들도 있으니 제발 살려 달라고 그 사령관에게 통사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사령관은 그 말을 무시하고 그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자신은 아내도 자식들도 없으니 그 사람을 살려 주고 자신을 데려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콜베 신부였습니다. 그래서 콜베 신부는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 1982년 10월 로마 교황청에서 콜베 신부의 추도식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노인이 자식들과 손주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오면서 “그 때 콜베 신부님이 나를 살리고 죽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콜베 신부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꿈을 감당하려고 우리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콜베 신부의 모습에는 하나님의 모습, 예수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들에게도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3. 성도들은 사명을 감당하여 영화롭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제자들이 또한 볼 수 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예수의 영광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는 예수께는 죽음의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각자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이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한 고생, 교회를 위한 눈물과 고통은 영광입니다. 이것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피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는 영광스럽게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외면하셨다면 부활의 영광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의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만일 언더우드가 한국으로 오는 선교사의 길을 피했다면 오늘의 영광스러운 한국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그 십자가를 져서 오늘의 한국 교회를 낳았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했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의 영광, 자신의 영예를 위해 우리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의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종이 크면 클수록 영광도 클 것입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영광도 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그 무엇이든지 순종해야합니다. 절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2:11-12).

우리가 주님이 주신 사명대로 살면 장차 올 기쁨은 상상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이 위대한 약속을 믿고 신자는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기도대로 하나가 되는 교회를 이루고, 우리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도록 하고, 그 어떤 고난이 와도 주님이 주신 거룩한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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