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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슬픔이 기쁨으로

관리자 2011-04-17 (일) 11:00 13년전 1060  

슬픔이 기쁨으로

 

요한복음 16:20-24절

 

서기 32년 겨울, 로마 황제가 로마의 전 백성에게 로마의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처형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300여년 동안 천하무적이었던 로마군 12사단장은 그 칙령을 부하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수많은 전쟁터에서 용기를 보여 준 것처럼 이번에도 황제의 명령에 복종함으로 황제에게 우리의 충성심을 보여줍시다. 우리 사단은 내일 우리의 신전에서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나중에 한 장교가 사단장실에 들어와 “우리 부대는 전원이 다 신전 제사를 드리기로 했는데 40명의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이방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사단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아니,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에게 그런 말이 어디 있소? 만일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처형 한다고 말하시오.”

그런데 그들은 그 명령에 불복하고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40명의 기독교인 병사들은 발가벗겨져 얼어붙은 호수로 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사단장은 그들의 훌륭한 전공(戰功) 때문에 그 병사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철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호수 옆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고 제사를 드리기로 작정한 병사들을 위해 따뜻한 목욕 시설이 준비 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 병사들이 호수 가운데로 끌려가자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불어왔습니다.

목욕탕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은 호숫가에서 장작불을 피워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 보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에서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가면서 그 찬송소리는 점차 약해졌습니다. 그 보초병은 기독교인 병사들의 중얼거리는 기도소리 위로 천사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또 들렸습니다. 이번에도 그 천사의 소리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39명, 순교자 39명, 그리고 39개의 면류관이로다.”

그 때 한명의 그리스도인 병사가 뛰어와 목욕탕이 있는 호숫가에 나타났습니다. 그 모습을 본 보초병이 옷을 벗고 무기를 버리고 호수 가운데로 뛰어가면서 “여기 이 옷을 입으세요. 내가 당신을 대신하겠소.”

그 보초병은 자기 군복을 벗은 채로 얼어붙은 호수 가운데를 향해서 뛰었습니다. 뛰어가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40명, 순교자 40명 그리고 40개의 면류관이로다.”

다음날 아침 사단장은 죄수들의 시체를 끌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얼어붙은 시체들이 호수 가운데 쌓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보초병의 시체도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안 것은 잠깐이었지만 그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주님의 품안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한 세상을 살다가 갑니다. 우리는 우리나라를 위해 죽을 수도 있고, 우리의 공동체를 위해 죽을 수도 있으며, 우리 이웃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죽음들이야말로 누구나가 할 수 없는 값지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마땅히 이런 죽음들은 존경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죽음들보다 값진 죽음이 바로 주님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염려하여 당신이 떠난 다음에는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로는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신앙 안에서 기쁨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알고,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 영적인 복을 풍성히 받기를 바랍니다.

 

1. 성령 안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네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고발에 의해서 예수께서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게 될 때 제자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예수를 죽이는 사람들이 제자들을 가만 둘리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수제자인 베드로마저도 예수께서 가야바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한 소녀 앞에서 예수를 부인할 정도로 그곳은 무시무시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정도였습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곡하고,’ ‘애통’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기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죽이고 제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기 때문에 기뻐한 정도가 아니라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큰 ‘기쁨’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 기쁨이란 바로 성령이 오시는 기쁨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로마에 가면 지하묘지인 ‘카타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심해지자 성도들은 지하 동굴로 들어가 폭이 1m, 높이가 3m가량 되는 지하도로를 미로처럼 만들고 그 곳에 기도처와 은신처를 만들었습니다.

하도 복잡하여 안내자 없이 그 곳에 들어갔다가는 나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그런 복잡한 지하 동굴에 숨어서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다가 죽게 되면 벽을 파고 그곳에 묻었습니다.

현재 이탈리아에 산재해 있는 카타콤을 합치면 그 전체 길이가 880km에 달합니다. 그곳에 약 700만명에 이르는 시체가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로마 정권의 무시무시한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려 250년 동안이나 박해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자식에서 손자로, 손자에서 그 자식으로, 이렇게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두운 땅굴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가던 그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믿음을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과연 이들의 이 힘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재산과 명예와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 믿음을 지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확실하게 믿게 하여 그들이 그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그 어떤 위험을 당하더라도 기쁨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않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적인 것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기에 완전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결핍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한 희생과 고난은 그 완전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고난이 있어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2. 납득이 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기 위해서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상을 초월한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우 100세에 아들 하나 주시더니, 이제 아들이 장성하니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가 이런 요구에 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절대 선이고 절대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더라도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믿고 따르는 것이 신자의 참된 자세입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을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였으나 곧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순종하셨습니다.

인간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처사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납득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 예수는 하나님은 절대 선이며 절대 진리이신 것을 믿고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순종으로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이 납득이 가지 않아도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영국의 육상 선수인 에릭 리델(E. Lidell)은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 100m 금메달 후보였습니다. 그러나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 주일이라 예배에 참석한다고 100m 경주를 포기한다고 했습니다.

영국 국민들이 다 그를 비난했습니다. 광신자라고, 국민의 명예를 건 경기를 주일 예배 때문에 포기한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올림픽 선수단장이 설득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국 여왕까지 나서서 설득했지만 그는 주일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에 경주를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참으로 딱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400m 경주에 출전할 금메달 후보인 영국 선수가 부상으로 갑자기 뛸 수가 없게 되어 리델은 자기는 100m 선수였지만 선수단장의 명령을 받고 출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400m를 47.6초로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는 평생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납득할 수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놀라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들도 아무리 큰 고난이 앞을 가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3.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좋아하고, 만나 주기를 기뻐한다는 것과 아버지께 말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그 아이는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아버지가 다 주신다는 것을 믿는 아이는 아버지께 언제든지 나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나와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에게 무엇이 유익한 줄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 아십니다. 아버지는 사물을 바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식이 달라는 대로 다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안돼’ 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23절)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하신 것은 내 이름, 즉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를 하면, 다시 말해 주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아주 중요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을 부르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본질과 특성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첫째, 우리의 기도가 예수께서 원하는 동기와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정의와 평화와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관점에서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기주의적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하게 계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에 대한 전적인 믿음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는 다 응답된다는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아버지와 자녀로서 하나님과 우리는 ‘친밀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여, 즉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무조건 용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인 우리가 자식들의 소원을 거절하는 경우가 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소원을 거절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으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과 가장 친밀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살기에 그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우리는 기쁨으로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에 응답이 있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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