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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31.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관리자 2011-07-31 (일) 11:00 12년전 1332  

십자가 주변의 사람들

 

요한복음 18:33-40절

 

한국 교회의 성자였던 한경직 목사님이 영락교회를 은퇴하고 20여년을 남한산성에 작은 집을 짓고 사셨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이 인사차 찾아뵈었을 때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목사님들이 “아니, 예수 안 믿는 목사도 있는가?”라고 생각했겠지만, 기독교의 위상이 땅으로 추락하고 있는 지금 그 말씀은 되새겨볼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정말 예수를 진심으로 믿고 그분의 말씀을 준행했다면 한국 교회가 오늘과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정말 하나님께 부끄러운 것입니다. 도대체 사랑으로 낮아져서 작은 자를 섬기라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한 목사님이 이스라엘로 선교 여행을 갔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여리고 헤롯 궁전까지 걸었습니다. 약 6시간 정도 걸리는 계곡길이었는데, 가면서 예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묵상하였습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한낮 태양빛이 내려쬐는 시간에는 그늘에서 쉬지 않았을까요? 또 군데군데 있는 물웅덩이에서 제자들과 함께 물놀이도 하셨을 것이고, 예루살렘을 오고 가면서 피곤과 먼지에 쌓인 얼굴을 시원한 물줄기로 씻어내며 한걸음 한걸음 예루살렘을 향해 가셨을 것입니다.

그 목사는 최종 목적지였던 여리고의 헤롯 궁전터에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고대 유적지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카메라를 들이대지만, 피하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포즈를 취해줍니다. 헤롯 궁전터의 목욕탕 난간에서 뛰어 반대편으로 갔더니 다 같이 일어나서 박수도 쳐주었습니다.

 

그 목사는 오로지 예수의 행적에만 관심이 있었고, 예수의 행적으로부터 오로지 영적인 의미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다른 데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영적인 목사다운 모습입니다.

그 목사는 예수에게 관심이 있었지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웃음을 건성으로 흘려 넘기던 찰나 그 아이들의 발을 무심코 보고 놀랐습니다. 그 돌밭에서 아이들은 신발도 신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순간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예수의 진리를 찾고자 큰 돈을 들여 이스라엘을 왔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예수의 행적에서 영적인 진리를 깨우치고자 했는데, 그 아이들의 신발 없는 발을 보자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예수를 찾고자 했지만, 예수를 따르고자 했지만 정작 그는 신발을 신지 않는 작은 예수를 몰라 보고 예수의 행적에만 관심을 두고 그냥 웃음거리로 넘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신발을 신지 않은, 아니 신발이 없는 아이들이 작은 예수로 보였습니다. 그 목사는 순간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가나한 자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다”라고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손만 벌리면, 그리고 주변을 돌아본다면 언제든지 가까운 곳에서 도움이 필요한 작은 예수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엇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는 예수의 말씀이 그 목사의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집에 와서 당장 신발장을 살폈습니다. 신지 않고 있는 신발들 몇켤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내에게는 내일 아이들에게 줄 옷을 정리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에 갈릴리로 가면서 여리고에 들려 그 아이들에게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 목사는 신발 없는 작은 예수들의 부르트고 군살이 박힌 발에 신발 하나를 신겨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너무 감사했고, 가까이에 있는 예수를 두고도 너무나 멀고 먼 곳에서 예수를 찾은 것이 얼마나 영적인 위선이었나를 깊이 깨우쳤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을 때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 중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예수를 죽이는데 일조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빌라도와 군인들과 바라바를 잠깐 생각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의 사형을 결정한 것은 빌라도 총독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이태리에서 출생한 로마인으로서, 유대 총독이 되기 전의 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 외에는 모두 총독인 그의 관할 하에 놓여 있었고, 유대인 산헤드린 회의는 각종 재판을 관할할 수 있었지만 사형만은 총독의 승인 없이 집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탄원서를 보내 빌라도 총독의 부정부패, 그의 무례한 행위, 그의 약탈, 그의 다른 사람들을 모독한 행위, 그의 잔인성, 그의 사람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살해한 것, 그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탄원서를 올렸습니다.

그는 후에 로마로 소환되었으며, 비엔나로 추방되었고 마침내 자살로 일생을 마치는 비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재판할 때 예수가 죄가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18:31)고 했으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사형집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 빌라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경고를 듣고 예수를 석방하고 싶었지만 유대 군중들의 성난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에게 사형을 판결하라는 압력이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의 요청을 거절하면 그들이 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고, 또 그로 인해 불만을 가진 그들이 로마 황제에게 모함을 할 가능성이 있어서 빌라도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공의를 앞세우기 보다는 타협과 편법을 택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유대인들이 미움과 질투로 예수를 죽이려고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석방시키지 못하고 유대 민중과 타협하여 예수를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의와 평화보다 자기 자리와 이익 그리고 사람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빌라도는 좋은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으면서도 올바로 서 있는 아내의 말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정의를 버렸습니다. 예수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계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 악명 높은 사람으로 기록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우리도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여 그 뜻에 절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오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것을 쫒아야 합니다.

 

2. 예수의 사형을 집행한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때리도록 군인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미친 듯이 때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를 웃음거리고 만들기 위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좋다. 그렇다면 그 말처럼 왕복과 왕관을 씌워주마”고 하면서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요19:3)하면서 웃음거리로 삼았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아마 그들은 로마군 주둔지인 가이사랴에서 왔을 것이며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그냥 우연히 만난 죄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왕으로 만들어 조롱했는데 여기에는 역설적이게도 영원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롱하기 위해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조롱이 예수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영원한 왕이시고 왕 중의 왕이십니다. 군인들은 조롱삼아 예수를 왕이라고 하였으나 우리는 진실로 예수를 영원한 왕으로 알고 모시고 있으니 우리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아직도 영원한 왕이신 주님을 모르고 세상의 부귀와 공명만을 향해서 살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성경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영생하는 비결을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 계명으로 십계명 후반부에 있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는 자기는 그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요19:21)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재물이 많아 근심하여 떠나갔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부족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부자요 율법도 다 지킬 정도로 신앙생활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논리는 신앙보다 재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재물도 가지고 싶었고 영생도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재물과 영생을 값으로 따진다면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취해야 합니다. 예수처럼 값어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만을 향해야 합니다.

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 서로 앞 다투어 ‘좋아한다’, ‘사랑한다’하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처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습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뛰기 시작했는데, 한 청년이 그 여자를 거의 따라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돈을 한 움큼 쥐어 그가 오는 길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보고는 처녀를 쫓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줍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처녀는 멀리 도망가 버렸습니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녀를 가까이 쫓을 때 마찬가지로 돈을 떨어뜨렸습니다. 역시 이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처녀를 그만 놓쳐 버렸습니다.

그들이 계속 달리는 동안에 세 번째 청년이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따라갔습니다. 이때 처녀는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을 몽땅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 구혼자는 돈으로 인하여 처녀를 단념하지 않고 계속 달렸습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제일 바라는 상을 위하여 뛰어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제일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가장 값진 선물인 영생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예수의 최후에 바라바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에는 한 사람의 죄수를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아마 바라바는 상당히 알려졌던 죄수였고 도적이었고 그 도시의 어떤 폭동과 살인에 관계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비열한 좀도둑이나 밥도둑 같은 도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젤롯당(열심당원)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는 도적과 살인을 했을지라도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건지려고 하는 독립 조직의 일원이었기에 백성들로부터 동정을 받기도 하고 존경까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민중은 예수보다는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는 그들은 예수보다도 폭력 혁명가인 바라바를 선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제도적인 악과 싸워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에게도 이런 정의를 위한 투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고 하셨습니다.

바라바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이 석방 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존 옥선햄(John Oxenham)의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그 모습에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불타올랐습니다. ‘십자가를 내가 져야하는데 예수께서 지다니 ..... 저분이 나를 살렸어. 저기에 달려야할 것은 저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야. 저 사람이 나를 구했어’”

그렇습니다. 바라바는 세상의 혁명가였지만 예수의 은혜로 구함을 받고는 감격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역사가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을 때 생명을 구하는 책임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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