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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0.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원칙이 있는 사람

관리자 2011-07-10 (일) 11:00 12년전 1361  

원칙이 있는 사람

 

요한복음 18:28~32절

 

미국의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의 그린빌에 위치하고 있는 섬유기계 업체를 운영하는 대기업 총수인 존 홀링스워즈는 생전에 돈을 이웃을 위해서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의 재산은 엄청났습니다. 부동산 4만 5천 에이커(5천 140만평)를 포함해서 전 재산인 4억 달러(5천 188억원)를 그가 다녔던 대학과 교회와 YMCA 그리고 자선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는 1994년 미국의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500대 거부 가운데 208위의 부자로 오른 사람입니다. 본래 그는 30년 이상을 공장 뒤편의 초라한 집에서 살면서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는 마지막에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떠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유일한 혈육인 외동딸에게 한 푼도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 훌륭한 인생을 산 것은 그는 원칙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돈을 버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라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3장에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신상을 만들고 그 신상에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에 넣어 죽이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풀무불에 던져진 그 순간은 세 친구들이 벼랑 끝에 서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인생의 끝이었습니다.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었습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결박된 채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결박이 풀려졌습니다. 풀무불 가운데 떨어졌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여주셨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풀무불의 온도를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했지만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단3:27)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죽이려고 온도를 높였지만 그 온도는 하나님이 조절하셨던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시련과 연단의 온도는 하나님께서 조절하십니다. 불은 붙었지만 불에 타지 않도록 믿음의 절개를 끝까지 지키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믿음을 버렸다면 이런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 번 쯤 우상에게 절하는 것 쯤이야 어떻겠냐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면 하나님 말씀 안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상 앞에 절했다면 살아 부귀영화는 누렸겠지만 신앙인으로서 좌절감과 패배감과 죄책감으로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원칙을 세웠고 그 원칙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죽음도 그 신앙의 원칙을 빼앗지 못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눈 앞의 유익보다는 신앙의 원칙에 합당하게 살기로 뜻을 정했기에 그 원칙으로 살아갔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신앙의 원칙이 있습니까? 눈 앞에 있는 유익보다는 불이익이 다가오더라도 변치 않을 신앙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원칙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고 각자가 신앙의 원칙을 세워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1. 미움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일개 목수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급기야는 혐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결국에 광기어린 노호를 외치는 폭도로 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예수를 이성적으로 보지 못하였고 기본적인 인간성마저도 무감각해진 듯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모세의 율법의 지도를 받고 사는 이들이 이렇게 포악할 수 있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십자가에 죽이라고까지 합니까? 너무 잔인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2000년 5월 어느 날 대학 2년생 이은석이 자신의 부모를 토막내 살인하고 시체를 유기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죽이고 시체를 21토막 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지하철역 구내의 쓰레기통과 외곽 여기저기에 버렸습니다.

그 범인을 상담하고 심리를 연구한 이훈구 교수는 이 사건을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저명한 의사부부였습니다. 형 역시 일류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은석은 가정에서 언제나 천덕꾸러기였기 때문에 부모에게는 수치스러운 존재였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언제나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는 사랑에 굶주렸고, 가족이 알지 못하는 벽에 갇혀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나 부모를 미워하며 살았습니다.

그 집에서는 공부를 잘해야만 가족이고 자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문에 길이 빛나는 가족 구성원만 사랑받을 수 있다면야 어찌 그것을 가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문제아를 문제 부모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을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아들을 닦달하는 자기의 매에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서 애비의 순수한 사랑이 아님을 알고 그 순간부터 매를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있고 사랑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족에게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만 있으면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은 치유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미움이 있습니다. 이 미움 때문에 이 세상은 어둡고 캄캄합니다.

 

2. 증오는 균형 감각을 상실하게 합니다.

 

일단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들어오면 우리는 그 미움에 사로잡혀 정상적으로 볼 수도 없고 올바로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증오만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 율법에는 “이방인의 거처는 부정하다”는 것이 있고, 또 발효시키지 않은 빵만 먹는 절기인 유월절에는 발효된 빵을 결코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빵을 발효시키는 효모를 다 모아 불태웠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부정한 이방인의 거쳐요 효모가 섞인 빵이 있는 곳인 빌라도의 본영에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는 것에는 열렬했습니다. 이런 작은 율법은 지키면서 가장 크고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예수를 죽이려고 야단하는 것은 정말 한심한 일입니다.

우리들은 지극히 사소한 일에는 야단법석을 떨면서도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는 등한히 합니다.

유대인들은 작은 율법 문제에는 충실한 무리들이었습니다. 물론 작은 율법도 지켜야 합니다. 그 당시 율법인 부정한 이방인 집에 들어가지 말고 효모가 있는 집은 들어가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그분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치러 오신 예수를 함부로 대하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증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것이 도가 넘으니 증오하게 되었고 혐오하기에 이르러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균형감각을 잃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은 얻지만 큰 것은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천하통일을 향한 각축전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일입니다. 진나라 해왕은 인접한 촉 나라를 멸망시키고 싶었지만 험한 지형으로 침략이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 방법을 고민하던 왕은 촉 나라 제후가 재물에 욕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그는 소를 조각하고 안에 보물을 채워 넣고는 장정들에게 촉 나라 방향으로 밀고 가면서 길가에 황금덩어리를 떨어뜨리게 했습니다.

이내 “금동을 누는 소”가 있다는 소문이 이웃 지역까지 퍼졌고, 때를 맞춰 진 나라가 촉 나라에 화친의 예물로 황금 소를 보내고 싶은데 길이 없어 난감하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촉 나라 왕은 황금 소가 지나갈 수 있도록 도성에 이르는 길을 만들게 했습니다. 충신들은 모략일지도 모른다고 간언을 했지만, 제후는 보물에 눈이 멀어 다른 것은 안중에 없었습니다. 길이 완공되자 도성입구까지 사신을 맞으러 나갈 정도였습니다.

한편, 이를 지켜보던 해왕은 촉 나라가 닦아 놓은 길을 이용해 군사를 이끌고 가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고 결국 촉 나라는 제후의 탐욕으로 인해 나라를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소탐대실”(小貪大失)입니다. 바로 앞에 놓은 작은 이익에 연연하다 보면 더 큰 손실을 간과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매 순간 지금 하는 판단이 우리의 작은 이익을 향해 있지는 않은지 경계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간절히 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 목적을 위해서 원칙을 깨서는 안 됩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던 백성들입니다. 사사 시대에 주변 나라들은 왕을 세웠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기 때문에 왕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말기에 사무엘의 후계자인 아들 요엘과 아비야가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부정부패를 일삼으니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가서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8:5)라고 요청했습니다.

사무엘은 섭섭하게 생각했고 하나님도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선포한 사사는 기드온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삼백 명이라는 적은 군사를 이끌고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 사람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자 이스라엘 백성이 찾아와서 기드온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자손대대로 왕이 되어서 자기들을 다스려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간청에 대해서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8:23)고 하였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기드온과 같은 업적을 거두었다면 자기가 먼저 왕이 되려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백성들이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니 못이기는 척하고 이 간청을 받아들이면 큰 권세와 영광을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드온은 왕이 되어달라는 백성들의 간청을 거절했습니다. 테레사 수녀의 말대로 성공이 지배자의 왕관이 아니라 겸손히 섬긴 사람을 위한 훈장이라고 한다면 기드온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바로 왕이 되어달라는 백성들의 간청을 사양한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럼 기드온은 어떻게 백성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있었겠습니까? 기드온은 미디안 족속을 물리친 것이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드온이 자기들을 구원한 것이라고 했지만 기드온인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기드온은 원래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기드온이 한 일은 사사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한 것뿐이었습니다.

삼백 명의 군사를 택하신 것이나 미디안 사람을 물리치신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믿으면서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가이사가 왕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원칙을 깨뜨렸습니다. 자신들의 왕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원칙은 변할 수 없는 대원칙입니다. 그들이 가이사만이 우리에게 왕이라는 말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최대의 표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 말은 빌라도에게는 정말 대단한 고백이었습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종주국인 로마의 황제를 왕으로 부르지 않다가 갑자기 왕이라고 부르니 너무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신앙적인 원칙이나 민족적인 자부심도 다 버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약속을 지켜야 하고, 신의를 지켜야 하고, 신앙과 양심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신앙과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를 고발한 유대인들은 원칙을 버리고 신앙과 양심을 버리고 그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이렇게 원칙을 버리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에는 반드시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원칙에 따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가 신앙의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대로 살아 승리하시는 삶을 사시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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