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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30.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관계성 속에 사는 인간

관리자 2012-09-30 (일) 11:00 11년전 1180  

관계성 속에 사는 인간

 

로마서 14장 7~9절

 

우리나라는 좋지 않는 것이 1위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혼율, 자살율, 술소비량 등이 세계 1위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혼과 자살과 술소비가 세계 1위를 기록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 간의 관계가 파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에 들어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연장되어 초고령화 사회가 되어가고 있고, 주위에는 독신 가정도 많습니다. 점차 가정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아무도 없이 혼자 외로이 떠나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컬럼비아 대학과 루즈벨트 병원의 공동 연구에 의하면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 경우가 혼자 사는 사람이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보다 두 배나 많다고 합니다.

듀크 의과대학도 비슷한 보고서를 냈는데,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사는 사람보다 혼자 사는 사람이 심장병으로 빨리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콜레스테롤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운 적이라고 합니다.

식탁에서 영양소의 균형을 맞춰 여러 가지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인간은 가정과 직장 등에서 균형 있는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연구에 참여한 컬럼비아 대학의 한 박사는 “사람의 정서와 대인관계가 심장병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며 조사결과를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은 꼭 뱀이 숨을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갇혀 있는 뱀은 줄곧 두려워하기 때문에 먹이를 주어도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게 하려면 숨을 곳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도 뱀처럼 가끔 어디로 도망갔으면 하는 생각이나 숨어버렸으면 하는 도피의식을 갖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도피할 곳도 없어 자기 자신 안으로 한없이 숨어 들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고독입니다.

1979년 뉴욕에서는 일본의 유명한 사진작가의 카메라 사진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고독’이라는 제호의 사진전 이었는데 작가는 부제를 붙여 ‘한 인간의 고독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전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뉴욕의 뒷골목인 흑인들만이 살고 있는 거리였습니다. 불이 꺼진 석유난로가 있고 새벽녘에 뿌옇게 창가를 찾아오는 냉기만이 있는 한 칸 방에 한 노인이 흰 벽을 향하여 담요를 뒤집어쓰고 앙상하게 누워있는데 머리 맡에는 전화가 한 대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가 바로 사진의 초점이었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밀폐된 방안에 외부 세계와의 단 하나의 연결인 가느다란 이 전화선이 놓여 있을 뿐입니다.

어김없이 하루에 한 번씩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밤새 별 일이 없으셨습니까?” 이 전화는 자녀들이나 친구들이 아닌 ‘장의사’의 문의전화입니다.

전화의 응답이 없으면 이 노인이 간밤에 죽은 줄로 알고 앰블란스가 늦지 않게 찾아오도록 조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려는 전화선 하나 외에는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이 노인을 통해 현대인 갖는 고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전이었습니다.

고독이나 두려움은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들과의 긍정적인 관계 속에서 해결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존재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와 동떨어져서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개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공동체란 바로 관계의 망입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을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존재로 만들 수 없고, 이웃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바로 사회적 동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인간이 왜 사회적인 동물인지를 알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 복된 삶을 사사기를 바랍니다.

 

1. 인간은 자신을 과거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는 당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는 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한 다른 존재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조상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각자의 조상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람을 말할 때 그 사람 개인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하고 이름을 말했습니다.

누구나 조상이 있습니다. 인간은 한 집안의 혈통을 이어 받았고 그 집안의 전통과 유전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는 그 조상들이 만든 총화입니다.

물론 그 자신도 그 총화에 무엇인가를 기여하고 있지만 그는 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안의 전통과 유전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상상할 수 없는 지성을 쌓고 세상에서 큰 인물이 되었다고 해도 그에게는 조상이 그에게 물려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그가 있기 위해서 그의 조상들이 그에게 음으로 양으로 물려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다 이룩한 것처럼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현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내’가 현재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나 속에는 현재의 내가 모르는 과거의 수많은 선조들의 노력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내 안팎의 삶이 나의 동료들, 돌아가신 분들과 동시에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땀방울 위에서 얼마나 많이 이루어졌는가를 하루에도 수없이 깨닫는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부자는 그 부를 자신이 이루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부를 돌려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를 사회에 환원시키는 것은 자신의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현재의 부자가 된 것은 그 사람 자신만의 노력은 아닙니다. 그 부 속에는 공동체가 그에게 암묵적으로 기여한 것이 숨어 있습니다.

즉, 그 부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수많은 학자와 개인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현재의 개인의 부의 축적은 대부분 그런 축적된 사회적 자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단순하게 개인의 능력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부를 쌓은 이는 그 부의 상당 부분이 사회 덕분이므로, 부의 일정 부분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거나 기부하는 것이 옳습니다.

 

2. 인간은 자신을 현재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말과 행위로 인해 남이 기쁠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행동으로 남을 선하게도 할 수 있고 악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고상하게 할 수도 있고 천한 길로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불건전한 신앙생활 곧 경건하지 못한 언행들은 근본적으로 자녀들을 주님께 인도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혼자 살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는 우리 가정의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생활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보다 그 생활을 봅니다. 그래서 어른들의 생활은 자녀들의 시청각 교육 교재로서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깊은 영향을 줍니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이 보는 영상의 배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마디 말보다도 하나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자녀들이 신앙으로 들어서지 못했다면 이 시간 반성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정에서 하는 일, 세상에 나가서 하는 일이 자녀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말한대로 살고 있습니까? 언행일치, 신행일치해야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교회만 다니고 계십니까? 우리의 생활이 우리 자녀들의 신앙생활에 장애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자녀들을 움직일 정도로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내 말 한마디로 우리의 자녀들이 잘 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우리의 인적 네트워크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현재에서 우리는 도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 인간적인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의 굶주린 이들에게 우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유엔 통계에 의하면 세계 인구의 약 사분의 일 가량이 빈곤으로 말미암아 기아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60억 지구 인구 중 27. 2%에 해당하는 16억 2,0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있다는 보도입니다. 이는 하루에 약 40,000명의 어린이가 기아로 죽고 있는 꼴이 된다.

또한 빈곤인구의 61.6%가 아시아에 살고 있으며 나라별로는 인도가 제일 많은 빈곤 인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미래 학자는 지구는 약 110억의 인구가 살아도 넉넉하게끔 만들어져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소득의 불균형과 인간의 자연 파괴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빈곤이라는 자업자득의 고통을 초래했습니다.

기독교는 확실히 세계의 기아문제에 책임이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는 이 문제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아셨지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없어도 먹을 것을 주어야 하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간구가 비중 있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온 세계인들을 향해 그 날에 족한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남의 것을 빼앗을 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기도이며 나의 양식만 아니라 모두의 양식에 관심을 가지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3. 인간은 자신을 미래로부터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래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에 태어나는 세대에 이 땅을 아름답게 물려주어야 할 책임, 즉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사회적인 책임 있습니다. 그 책임을 망각하고 현재의 우리 세대의 욕망에만 모든 것을 맞춘다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으로 모든 것을 파괴시켜 버릴 것입니다.

아까 말한대로, 지구상의 약 16억 이상의 사람들이 빈곤에 허덕이며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필수품 - 식량, 물, 의약품, 거주지 등 - 이 부족하며 또 그들 중 수 천명씩 매일 굶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적합한 주택과 의복이 없으며 깨끗한 물과 의료 보호가 없으며 교육과 고용을 위한 기회가 없으며 또 그들 스스로 또는 그들의 가족 스스로 자기개선의 가능성이 없이 비참한 삶을 겨우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성적, 육체적 착취와 각종 아동, 여성 폭력과 질병과 사회적 차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억압과 착취를 당하며 각종 폭력적인 사회규범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억압과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현대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하여 아무리 노력하고 일을 해도 거의 최저수준의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더 이상 경제적이고 사회적 신분의 상승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조차도 경제적으로 불법과 부패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뇌물과 아첨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상황 또한 더욱 심해져 가고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 되어 가고, 곳곳에서 실업자가 넘쳐 나도 백화점에는 사람들로 아우성입니다.

우리의 어린아이들은 점심을 굶고 있어도 고급식당에서는 손님들로 가득합니다. 밤이 늦도록 불빛이 찬란한 술집들, 모든 가치 기준과 성공의 기준은 돈으로 통용됩니다.

돈 때문이라면 모든 수단과 방법이 정당화되며 사회의 정의와 도덕은 연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달래주는 하나의 위안거리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에게 이런 사회를 물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미래를 위해 이 땅을 복음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세대에 책임을 지고 이 땅에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대에 주님께서 주신 영적인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 책임을 사나 죽으나 아름답게 감당하여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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