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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1.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의와 평강과 희락

관리자 2012-10-21 (일) 11:00 11년전 1137  

의와 평강과 희락

 

로마서 14장 17~18절

 

영국이 낳은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은 죽는 날까지 복음 선교에 힘쓰다가 외롭게 외딴 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사역을 할 때 열심히 그를 도왔던 웨인 우라잇이라는 흑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흑인은 자기 친구들을 모아 리빙스턴의 시체를 항구까지 걸어서 운반하여 배에 실었고 영국까지 운반하여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리빙스턴을 존경하고 그를 추모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선교사 리빙스턴만 칭찬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리빙스턴을 따라 평생 충성한 그 종을 존경하고 찬양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을 최선을 다해 사용하여 주님께 충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흑인 종도 자기가 받은 은사에 대하여 역시 최선을 다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예수를 믿고 전생을 아프리카 사람들을 섬기는 데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는 풍요로운 모국인 영국에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유롭게 살 수 있는 자유를 아프리카를 위해서 포기하고 오로지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규칙에 둘러싸여 살았습니다. 율법은 어떤 것들은 부정하며 어떤 것들은 정하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즉, 어떤 동물은 정해서 먹을 수 있고, 어떤 동물은 부정하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입교했을 때 모든 율법과 규칙들이 단번에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율법이나 규칙들로부터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오히려 방종에 가깝게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얻은 이 자유에 대해 영적인 책임, 즉 그 자유를 다른 이도 누려야 하기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자유와 형제 사랑 그리고 상호배려로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나된 우리가 분열을 일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가 고기를 먹었느냐?” “누가 채소를 먹었느냐?” “누가 정통이냐 비정통이냐?”고 물으며 서로를 배제하고 심판하고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행했느냐?”라는 질문만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바로 그 질문만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참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오직 성령 안에서 의롭게 살았느냐 묻습니다.

 

‘의’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로서 신약성경에서 넓은 의미로 '주님의 의무를 이행하는 자의 상태, 또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조건'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항상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이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케 되며, 성령의 영향 아래 의로운 행위로 그 자체를 나타냅니다.

칼빈은 “우리는 소용없는 돌 감람나무가 그리스도에게 접목되어, 그의 산 뿌리로 말미암아 우리로 열매 맺는 가지들을 만든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새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곧 의의 열매요,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이 의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인정 받는다는 의미의 ‘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단지 성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부름 받은 상태, 또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보일 수 있는 적절하고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행위는 인간이 스스로 이루어 낼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 안에서 성령의 힘 있는 역사로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성령 안에서 의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런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열심으로 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 땅의 욕심,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을 목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나라를 사모하는 열정으로 순수하게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그렇습니다. 의를 사모하는 사람은 결코 먹고 사는 문제, 이익의 문제를 가지고 형제의 가슴을 상하게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지 않습니다.

자기 문제 때문에 교회에서 덕을 거스르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신앙의 형제들에게 비방을 들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근본적으로 자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으로 형제들이 상처를 입는다면 그 형제를 위하여 우리는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에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언제나 이웃 관계에서 이웃에 대한 자비와 배려로 나타납니다.

한국의 성자였던 장기려 박사는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재직하며 사랑을 실천한 성자셨습니다.

장박사는 수술환자가 입원비가 없어서 퇴원을 못하고 있으면 원무과 직원들이 퇴원한 후 병원 뒷문을 열고 환자들에게 어서 이쪽으로 빠져나가라고 한다고 합니다.

사람에 대한 배려와 한없는 자비를 실천한 장박사는 참으로 의로운 성자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2. 성령 안에서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평강’이란 헬라어의 ‘에이레네’로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불편한 관계가 청산되고 하나님과 완전한 화평을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그러나 이 화평은 단지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가 아닙니다. 도리어 적극적인 의미로서 그 어떤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평화를 가리킵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반으로 사람들 사이에 창조적인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창조적인 평화를 가진 사람만이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창조적인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신앙의 주변적인 문제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

창조적인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주님이 당신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고귀한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을 하던 상호간에 평화를 누리고 교회 안에 건전한 덕을 세울 것입니다.

교회 안에 덕이 세워지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마땅히 교회 안에서 화목하게 하나를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말합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먹고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사랑과 친절로 주님을 섬기는 자는 또한 그 이웃을 세우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웃과의 평화와 교회의 건전한 덕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랑의 모든 의무를 총동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성도의 고귀한 삶의 모습입니다. 만일 성도들끼리 불화와 다툼이 있는 교회, 싸움과 빈정거림이 있는 교회, 분열과 균열이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할 권리를 상실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니라 세속의 하나의 집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가진 성도들은 이 땅에서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3. 성령 안에서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희락'은 헬라어의 '카라'로서 구원받은 성도가 갖는 거룩한 기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만이 누리 수 있는 ‘감격의 외향적 표현’이 바로 이 거룩한 기쁨입니다.

이 거룩한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상대적인 기쁨이므로 그 요인이 사라지면 기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은 사라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빌4:4).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환난 속에서도 기뻐합니다. 핍박 중에도 기뻐합니다.

스데반은 박해자들 앞에서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었고(행6:15), 바울과 실라는 매맞고 옥중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을 잃지 않았습니다(행16:19-25). 아무도 그 무엇으로도 성도의 이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그것은 안일과 사치와 부요에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이며 아침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누리는 기쁨은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로서 영원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으로 가진 자'(고후6:9-10)들이 갖는 기쁨입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언제나 모든 일에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기쁨은 그 기쁨의 원천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안에 있는 기쁨은 영혼의 샘에서 솟아나는 기쁨입니다.

영혼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외적인 상황과는 관계없는 기쁨이기 때문에 외적 상황이 어떠하든 그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기쁨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기쁨으로서 생수의 강의 원천인 성령으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이 내적인 기쁨은 빼앗을 수 없고 신자로 하여금 범사에 기뻐하게 하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이다.

느헤미야 선지자는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8:10)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신자의 기쁨은 곧 신앙의 힘입니다.

이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서 옵니다. 힘 있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신앙은 초보적인 신앙이며 연약한 신앙입니다.

신자의 제일 되는 의무는 복음의 전파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곳에 신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기쁨은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신자의 의무를 완성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먹고 마시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가지고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교회의 덕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참 자유인은 주님과 교회를 위한 삶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바꾸어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과 사람에게서도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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