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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하나님의 심판대

관리자 2012-10-07 (일) 11:00 11년전 1172  

하나님의 심판대

 

로마서 14장 10 ~ 12절

 

이스라엘 공항의 검색대는 거의 완벽하게 소지품을 조사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제국의 공격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공항 검색대의 검색은 삼엄하기조차 합니다.

특히 출국하는 승객을 철저히 조사합니다. 비행기를 납치해 공중 폭파시킨다면 큰일이기 때문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1996년 히브리 대학에 가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였는데, 제가 서 있는 줄의 맨 앞에서부터 무엇을 그렇게 조사를 하는지 줄이 좀처럼 줄어들지를 않았습니다.

어쩐지 좀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폭발물을 숨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별의심이 없이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도통 그 줄이 줄어 들지를 않았고, 제가 검색대에 섰을 때는 비행기의 출발 시간에서 2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은 급하기 짝이 없는데, 검색대 직원은 저를 붙잡고 하나하나 꼼꼼히 조사를 했습니다. 저의 가방을 열더니 그 속에 있는 물건이라는 물건은 다 꺼내 놓고 하나하나 조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출발시간이 몇 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도 화가 나서 “여보시오, 이게 무슨 짓이입니까? 출발시간이 몇 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려고 이러십니까?”

그러나 그 직원은 태연하게 “비행기가 출발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 제 책의 한 장 한 장을 다 넘기면서 철저히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정말 저는 그때 화가 머리 끝까지 났습니다. 겨우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해 보니 출발시간에서 20분이나 지나 있었습니다.

비행기는 거의 시간을 지키는 법인데, 어쩐 일인지 비행기가 아직 출발을 하지 않아 겨우 제가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한 이들도 여러 명이었습니다. 제 뒤에 서 있었던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저는 가끔 그 때의 경험을 생각합니다. 그때 왜 저를 그렇게 조사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생각하지 싫은 기억입니다.

그 때 저를 포함한 승객들이 그 검색대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초조한지 모릅니다. 무엇을 가지고 꼬투리가 잡히지 않을가 하고 말입니다.

저는 결코 걸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30여분을 조사를 당하였습니다. 정말 이스라엘 공항의 검색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재판관이 아니라 재판받을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재판받을 우리가 어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겠습니까?

비판할 권리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사람이 그 심판대 앞에 설 또 다른 사람을 판단할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얼마나 남에 대해서 판단합니까? 입만 열면 남에 대해 험담합니다. 여당, 야당이 하는 것을 보아도 의원들이 너무 편협합니다. 정부나 여당에서 무슨 일을 하면 야당은 무조건 반대합니다.

제가 보기에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잘못된 것을 비판해야 하는데, 잘한 것은 칭찬하지 않고 무조건 비판만 하니, 어찌 큰 정치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큰 정치인들이 나와야 됩니다. 너무 작은 정치를 하는 것 같습니다. 여야를 아우를 수 있는 정치가들이 나와야 합니다.

성경은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남을 비판하고 심판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절).

사람은 다 관계성 속에서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 살면서, 세상에서는 자연환경과 관계를 맺고, 이웃 사람들과는 공동체가 되어 삶을 살아갑니다.

이 관계를 떠나면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홀로 고립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입니다.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공회당 한 구석 즉 쥬피터 신전에서 가장 먼 곳에 판사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도시 집정관이 앉아 재판을 하였습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은 그 도시 집정관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 재판은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딴 사람의 덕을 볼 수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부모 때문에 형벌이나 정죄를 면하기도 합니다. 남편은 그 부인이나 자녀 때문에 동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재판정에서는 그 누구나 홀로 서게 됩니다. 위대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장례식에서 그 관위에 그 사람이 받은 박사학위 가운이나 국가에서 받은 훈장 등을 잘 정돈하여 놓지만 그것을 가지고 심판대 앞에 서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도 없이, 즉, 부모님도 아내도 남편도 자녀도 없이 홀로 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믿음과, 우리가 쌓아 올린 인격과 헌신 외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믿음을 언제나 점검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어떤 일에 있어서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프로야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허구연 야구 해설가라는 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이 야구경기에서 해설을 할 때 보면 굉장히 해박한 야구 지식을 가지고 있고 야구를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래서 프로야구가 생긴 1982년부터 지금까지 죽 야구 해설을 해오고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이런 분이 야구 감독을 하면 참 잘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35살의 젊은 나이에 한 때 청보 핀토스라는 팀의 감독을 맡아 최연소 감독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해설을 하는 것을 보니까 감독을 하면 잘할 것 같아서 삼미 수퍼스타즈라는 구단을 인수한 청보 핀토스는 35살의 허구연을 우리나라 최연소 감독으로 영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감독이 되고 난 후 성적을 보니까 15승 40패 2무승부입니다. 이 분이 원래 청보하고 3년 계약을 했는데 첫해에 성적이 너무 나빠서 전기리그도 다 채우지 못하고 강제휴가라는 명목으로 감독 지휘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는 우여곡절 끝에 이 분이 다시 방송 해설위원으로 복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분이 복귀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 번 다시는 실전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다시 말해서 야구감독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저는 이론가로서 야구 해설을 잘하는 것과 실제로 운동장에서 게임을 이기게 하는 것과는 별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서 저는 목회자로서 야구 해설가가 되기보다는 현장의 코치나 감독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는 야구 해설가는 해설을 아무리 잘해도 그 시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코치나 감독이나 선수는 직접 운동장에서 뛰어다니고 땀을 흘리고 경기의 승패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는 지금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은데’,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등 이런 저런 해설만 하고 실제적으로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는 해설가로서의 목회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보면 교회에는 해박한 해설가는 참 많습니다. 교회는 이래야 하고, 목사는 이래야 하고, 직분자는 이래야 하고, 믿는 자는 이래야 하고 등등.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영적인 지식이 실제적인 삶 속에서는 별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면서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기대를 입술로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까지만 알고 끝난다면 야구 해설가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가나안 땅에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이제 앞에 있는 요단강만 건너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를 메고 가나안 땅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을 건너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가나안으로 갑니다. 그 첫 번째 관문은 홍해를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은 40년 후에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너는 것과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물론 둘 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넜습니다. 그런데 둘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홍해를 건너는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출애굽기 14장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것이 홍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있고 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물이 저절로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지막 관문인 요단강 앞에 섰는데 요단강은 저절로 갈라지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홍해와 요단강의 차이입니다.

요단강은 저절로 갈라지기는커녕 성경에 보면 이 시기는 요단이 곡식을 거두는 시기인데 이 시기에는 물의 양이 많아서 항상 언덕에 넘치는 시기였다고 합니다(수3:15).

이 때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말합니다.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수3:6). 그러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는 것,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 입술로 선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믿음과 그 신뢰와 그 기대와 그 선포를 바탕으로 일어서서 발걸음을 떼는 것입니다. 즉, 믿음에 기초해 실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 역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주인이 먼 나라에 가면서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또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배로 남겼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부탁에 성실히 임했습니다. 조금 치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로 가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부탁을 엄중히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야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종 은사와 재능을 주셨습니다. 예언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위로하는 은사, 다스리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등 각종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은사를 살려 최대한으로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서 봉사해야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의사로서 아프리카 오지, 문명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가서 의술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캘커타 빈민 지역에 가서 그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깝게는 수원 농천교회의 문장로님이 계십니다. 문장로님은 증소기업을 운영하는 분으로 경기도 화성에 은퇴 목회자 안식관을 지어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은퇴하시는 목회자들의 노후를 책임지고 모시는 일을 합니다.

농천교회 담임목사였던 백형기 목사님이 어느 날 “자기가 은퇴하면 미자립 교회에서 은퇴하시는 노목회자들을 모시는 안식관을 세워 그분들을 모시는 일을 했으면 한다”는 설교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그 일을 계획하고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돈이 많아서 한 일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고 하신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예’하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그 안식관에는 은퇴 목회자 30여 가정을 모실 시설이 되어 있고 여러 가정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그곳에 계신 은퇴 목사님 내외분을 우리 교회에 모시고 위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는 ‘바로 가지’ 않았고, 그냥 갔습니다. 별로 그렇게 유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나만 한 달란트냐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무시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을 파고 그곳에 감추어 두었다가 주인이 오니 파서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며 책망하고, 그것을 빼앗아서 열달란트 가진 종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30)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이 지옥으로 보낸 것입니다.

실상 그 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달란트를 받았고, 그 달란트로 장사는 안했어도 함부로 취급하지 않고 땅에 묻어 놓았다가 주인의 심판대에 가지고 갔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보면 그렇게 악한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도 하지 않았고 자신의 것을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달란트를 잘 보존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엄중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달란트로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교회와 사회에 봉사하시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심판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설 때 혼자 설 것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산 사람들은 특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우리를 위해서 우리 주님이 서실 것입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그 분을 위해서 산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만이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곧 설 것입니다. 죽음이 다가옵니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날을 위해서 주님을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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