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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8. 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관리자 2012-11-18 (일) 11:00 11년전 1164  

내게 능력 주시는 자

 

빌립보서 4장 10~14절

 

어떤 수도사가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20대에 세상을 바꿔보려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나이 40에 들어 제 삶을 돌아다보니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저와 가까운 이웃조차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내 이웃을 변화시키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 70줄에 들어 또 제 삶을 뒤돌아보니 제 이웃마저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께 제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제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제서야 제 이웃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마음을 먼저 바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참 아쉽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 문을 꼭 닫아걸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고만 합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마음의 문을 닫아 걸고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겠습니다.

내 마음을 변화시키려면, 다시 말해 주님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우리는 전적으로 자기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위대한 성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를 가장 하찮게 여길 때 하늘로부터 엄청난 평화가 온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면 부자유스럽다고 생각하고 나이가 많을 때나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으면 구속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 그 믿음 속에 바로 참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자유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청년 때까지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였고, 그 율법을 준수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율법에 대해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더욱 율법의 무거운 중압감에 눌려 살 수 밖에 없었고 그 내면의 공허감은 그 외적인 열심이 더하면 더할수록 더 크게 그의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32세에 대제사장으로부터 기독교인을 체포하기 위한 위임장을 받아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주님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받고 율법과 전통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만난 후 찾아온 감격은 과거에는 느껴보지 못한 너무 크고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상 바울처럼 율법주의와 종교적 계율에 얽매여 살다가 큰 자유를 맛본 이가 그렇게 많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 엄청난 자유를 얻고는 너무 기뻐 자신의 모든 것, 즉 자신의 학문, 물질, 지위 등 세상의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참 자유인이었기에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나 이방인 사회 그 어디에도 자연스럽게 복음의 핵심을 놓치지 않은 채 그들과 조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기회주의적이고 처세주의적으로 사람을 대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그의 헌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직도 율법주의적 세계관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율법주의에 매인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폐기처분하고 무시했으며, 심지어 방종에 이르는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 신앙만이 맞다고 절대시하기까지 하여 교회가 심히 분란상태까지 이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학문적인 자긍심과 종교적인 확실한 신앙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난 후 예수의 겸손과 자기절제를 보면서 그 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우리 주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흉악한 죄인의 사형장인 골고다 에서 십자가에서 죽는 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기 위주, 자기 중심의 사고로 삽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은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3절)

 

우리 주님은 자기 자신의 명예, 안일, 안전, 쾌락 같은 것을 돌보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머리 둘 곳도 없었으며 왕이 되시는 것도 거절하셨고 자기의 뜻을 구하지도 아니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의 발까지 씻으셨습니다. 또 명예를 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마음을 비우시고 명성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자기를 부정하는 생활이었으며 스스로 불쾌한 길을 걸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에게서 배워서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세속적인 우상을 채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자기의 정욕대로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형제의 필요와 약점을 돌봐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의 영원한 푯대요 믿음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그같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모든 만물의 주인이셔서 절대적인 자유와 무한한 권한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주님은 실로 부요하신 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의 가난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고후8:9).

우리 주님은 그의 영광도 권세도 다 포기하시고 철두철미하게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죄악의 노예요 하찮은 벌레만도 못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주님은 약하디 약한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대속 제물로, 화목 제물로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의 형제자매를 없수히 여기고 멸시한다면 우리 주님은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주님을 만난 뒤 어느 날 성 프랜시스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말이 뒷걸음을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말이었는데 그 말이 뒷걸음치자 프랜시스는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을 보았더니 한센병자 하나가 누더기를 걸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프랜시스는 그의 칼을 빼 말의 머리를 치고는 그 한센병자 옆에 앉고 그의 옷을 벗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프랜시스는 그 한센병자가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더러워하는 마음을 억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여 가슴에 앉고 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성도는 자기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사랑할 줄 아는 넓은 아량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성숙한 신자는 아직 미약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배타적인 시각으로 보지 말고 그를 용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가 신앙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섬기는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까지 사랑의 품으로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감사하여 우리의 이웃을 받아들이고 내 품을 펴서 이웃을 품어 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행복 가운데 하나는 타인의 장점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의 장점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행복해지고 그러다 보면 남의 허물이 덮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단점이 있기 때문에 단점을 보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장점부터 보면 나머지 일은 모두 다 덮어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남의 장점만 바라보면 이 세상은 이렇게 어둡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음악회에 가서 노래하는 처녀를 보고는 매료되어 그녀에게 구애해서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그녀의 맨얼굴은 너무 못생겼습니다. 날이 밝으면 그 못생긴 얼굴 때문에 정이 떨어지니, 아침에 잠이 깨면 아내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일어나 노래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아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 아름다운 목소리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아내를 탓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남의 장점을 생각하는 일을 삶의 중요한 덕목으로 규정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남의 장점만 보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약점을 신앙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능력 못지않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약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은사와 능력은 좋은 것이고, 약점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위대한 사람들은 약점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말을 잘 하지 못했고, 기드온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베드로는 변덕이 심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지중해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한, 열정 넘치는 주님의 탁월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습니다.

고후10:10이나 11:6 말씀에 보면 우리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후12:7에 보면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선교 사역을 감당함에 이 육신의 질병이 치명적인 장애와 약점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질병을 치유해 주시도록 세 번이나 기도했지만,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고 말씀하시면서 고쳐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약점이 있습니다. 장점만 있고, 약점은 전혀 없는 완벽한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우리는 약점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약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놀라운 은혜와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해 주십니다. 약점은 우리의 인생에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 약점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도 교만치 않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겸손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둘째,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인생의 성취와 발전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일본 ‘내셔날’의 창업자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자신의 인생 성공의 비결로 ‘가난하게 태어난 것, 허약하게 태어난 것, 배우지 못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것들이야말로 인생의 치명적인 약점들이라고 여길법한데도,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셋째, 약점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만듭니다. 약점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약함을 통로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나의 약함이 곧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가 된다는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약점을 내가 붙잡고 있으면 그냥 인생의 약점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겨드리면 내 약점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통로가 됩니다. 약점을 하나님께 맡겨드려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처럼 우리가 자기 절제와 자기 부정으로 하나님만을 위하는 성도들이 되고,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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