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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4.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자유의 절제

관리자 2012-10-14 (일) 11:00 11년전 1180  

자유의 절제

 

로마서 14장 13~16절

 

저는 우리 지역의 종교인들 모임에 참석하여 가톨릭의 신부, 불교의 스님, 원불교의 교무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는 만나서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가끔 돈을 거둬 불우한 이웃을 돕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제 시대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3.1독립운동을 종교인들이 모여 함께 했던 좋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분명히 가지면서도 국난을 당했을 때는 신앙을 초월하여 이 나라를 건지는 독립운동을 함께 했습니다.

그들은 공동선을 위해서 함께 생명을 걸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때는 기독교와 천도교와 불교가 함께 나섰습니다.

우리 지역에서의 종교인 모임은 우리 지역의 불우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함께 힘을 합치면 좀더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기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수 진영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 모임이 혼합주의적 성격을 띨 것이라고 경계하며 그런 자리에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런 모임에 가는 것 자체가 기독교 신앙을 불교와 가톨릭 신앙으로 혼합해 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순도 높은 자신들의 신앙에 불순물이 첨가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종교인 모임에 참석한다고 우리 기독교 신앙을 내려 놓는 것이 절대 아니며, 다른 종교와 섞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고 영생을 얻는다는 구원의 진리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꼭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과 서로 화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으면서도 갈등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거 남북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앗시리아에 각각 멸망당할 때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정착했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혹은 자진해서 화를 피해 해외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기원전 3세기부터 지중해 지역을 장악한 헬라 문화권 속에 살면서, 그들의 통용어인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해외에 살던 유대인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팔레스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혈통상 같은 유대인이지만, 헬라어를 모국어로 썼습니다. 이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망할 때, 끝까지 조국에 남아서 살던 유대인의 후손들로서, 히브리어를 계속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루살렘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한데 섞여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팎으로 볼 때, 히브리파 유대인의 숫자가 헬라파 유대인의 숫자보다 당연히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초대교회 내에서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대한 원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까닭은,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귀환한 헬라파 유대인들 가운데는 일가친척이 없는 가난한 과부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가 매일 구제와 봉사를 행하면서도 그들을 제외시키고 있었습니다.

즉, 구제와 봉사는 오직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원망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사도들은 헬라파의 조용한 항의를 받는 즉시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하고 구제 사역을 전담할 집사들을 세우기로 결정하고 이 내분을 잘 수습하였습니다.

바울 사도 또한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갈등을 신앙중심으로 잘 수습하였습니다.

한번은 바울 사도가 베드로와 함께 안디옥에서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유대 율법에는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방인은 더러운 죄인들이기에 함께 식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예수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 받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이방세계인 안디옥에서 교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아직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야고보가 조사관을 보냈는데, 그 조사관이 안디옥에 이르러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 누구도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견되어 온 조사관에게 발각되어 문제될 것을 의식하고 그 식사자리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또 거기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했고 바울과 함께 선교할동을 하는 지도자 바나바도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서 의로움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해명하고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2:16).

우리는 신앙에 관계 없는 주변적인 것으로 분열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소한 것으로 서로를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열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용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이래도 좋다, 저래도 좋다”고 해서는 안 되며, 그 분열을 수습할 확고한 신앙의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복음의 진리를 절대로 다른 그 무엇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수호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분열을 극복해야 합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수호하면서 3.1 운동 때 기독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불교인들과 연합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 받는다는 진리를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혼합해서는 안됩니다.

이 진리 때문에 바울 사도는 동족의 무서운 핍박을 받았고 평생을 고난 속에서 살았습니다.

바울이 수호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 속에 바로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매우 자유로운 만물의 영장이기에 다른 아무 것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매우 충성스러운 만인의 종으로 만인에게 지배받는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권력이나 금력이나 폭력 앞에서도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집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자유로운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사인규명 문제로 떠들썩한 장준하 선생은 정말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독립 운동을 하며 만주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의 비서로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서 싸운 탁월한 애국지사였습니다.

그는 고려대 총장이었던 김준엽과 함께 독립운동가 김구를 모시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저과 같은 한신대 동문입니다.

그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의 군사정권에 맞서 [사상계]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정면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와 서슬이 퍼런 박정희 독재정권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은 참된 자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의 자유란 바로 장준하가 누린 자유, 즉 진리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기독교인은 진리와 정의와 평화를 위해 마음껏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를 가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진리이시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폭력이 그는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권력이나 헤롯의 권력이나 유대 종교권력이 어떤 폭력을 쓰든 전혀 그런 것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교외에서 로마 권력에 의해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는 한없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세상 그 무엇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이웃을 위해서 절제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자유는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할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섬길 자유를 가지고 있기에, 이웃을 위해서 우리의 자유를 자발적으로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매사에 주위 사람들의 눈치만 살피는 수동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진리와 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 발짝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서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라면 이웃을 위해서 내 자유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음식 문제, 관습 문제, 여가 문제 등은 신앙의 중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는 신앙의 변두리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로 이웃을 정죄하고 교회를 소란케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입장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바울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고기를 먹는 것에 두 가지 관점이 있었습니다.

한편의 견해는 로마 사회의 시장에서 사는 고기는 이미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시장에 나오니 그것은 우상제물이기에 그것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의 일종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편의 견해는 정반대의 견해로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그 고기에 무슨 우상이 붙은 것은 아니니 먹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음식을 먹어도 괜찮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이 그것을 먹는 신자를 보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기에 먹을 수도 있는 사람은 먹으면 안 된다는 그 사람을 위해서 절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구원해 주셨는데 그들을 위해서 고기 한 점 절제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 사람의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데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야 되겠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상한다면 우리 주님의 마음도 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의 외식보다는 신앙의 중심을 향하여 우리 눈과 귀를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육화되려면 먼저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에 주목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행동으로 옮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금식은 신앙행위의 아주 전형적인 실천사항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금식이 진정한 신앙행위가 되려면 압제의 결박과 멍에를 풀어 자유롭게 하고(사 58:6),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는(사58:7) 금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금식이라는 신앙행위는 본질적으로 나를 희생하고 양보하여 다른 이에게 자유와 양식을 제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금식을 통한 신앙행위는 허세를 부리는 것과 같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금식으로 이웃을 향하여 구체적인 사랑의 증거를 표시할 때 우리의 신앙은 참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겉치레 뿐인 금식, 겉치레 뿐인 예배, 자기만 생각하는 금식, 자기만 생각하는 예배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우리 신앙의 뿌리를 튼튼하게 키워주지 못합니다.

금식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습니다. 곧, 수많은 기도시간을 갖고 있지만 유리방황하는 빈민을 자기 집에 들이지 못하는 것, 날마다 큐티시간을 가지며 말씀을 곱씹지만 굶주리고 헐벗은 이를 외면하고, 심지어 친척 중에 가난한 이가 자기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서든 핑계를 대고 숨어버리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신앙이 아닙니다(사58:7).

나아가 가난한 이들이 권력에 의해 압제에 시달리고 주변으로 주변으로 내쫓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애써 외면하는 일도 잘못된 신앙입니다(사58: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형제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삶을 헌신해서 우리 때문에, 나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하는 성도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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