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09.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사랑의 빚진 자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2.09.09.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사랑의 빚진 자

관리자 2012-09-09 (일) 11:00 11년전 1286  

사랑의 빚진 자

 

로마서 13장 8~10절

 

미우라 아야꼬가 쓴 [빙점]은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평범한 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벌어다 주는 수입에 의존해 살다가 보니 자연히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궁여지책으로 자기 집에 작은 가게를 차렸습니다. 물론 그녀는 처음부터 돈 버는 일만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기독교인으로서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해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는 한편으로 그녀는 양심적으로 언제나 좋은 물건을 가져다가 최대한 값싸게 팔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그녀의 가게는 소문이 좋게 나기 시작했습니다.

가게는 날이 갈수록 점점 번창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 주에 한 번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다가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아예 트럭 채 물건을 주문해서 팔아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다가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는 아내를 보고 농담조로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 가게가 이렇게 잘 되는 것은 좋은데 이러다가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가게들은 다 문을 닫는 것은 아닐까? 그 사람들 다 가난한 사람들인데, 가게문을 닫으면 뭘 먹고 살지?”

남편의 말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저 많은 물건을 떼다가 값싸게 소비자에게 팔면 그것이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영세 가게들에 대하여는 전혀 배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깊이 생각한 후 가게 운영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물건의 수를 제한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가게에서 파는 물건은 아예 자신의 가게에 들여 놓지를 않았습니다.

손님들이 와서 없는 물건을 찾을 때는 친절하게 이웃 가게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돈은 과거에 비해 아주 적게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알지 못했던 기쁨과 평안이 그녀의 마음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틈틈이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자기에게 있는 문학적인 재능을 살려서 시간이 나는 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바로 유명한 [빙점]입니다.

미우라 아야꼬의 순수한 마음은 너무 감동적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경쟁사회에서 내 사업이 잘 되고 다른 사람의 사업이 안 되면 경쟁에서 승리한 것을 통쾌히 할텐데,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이웃 가게를 배려했으니, 너무 감동적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인간의 기쁨과 행복일 것입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의 몸과 재산과 명성을 자신의 것인양 잘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평화와 질서가 유지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빚을 졌다면 그 빚을 다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의식을 갖지 않게 되지만, 만약 사랑의 빚이 있다면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피차 그 빚을 갚기 위해 무한하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빚이란 성도들이 날마다 지고 날마다 갚아야 할 빚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 댓가를 다 치를 수 없는 무한하고 숭고한 빚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초대교회의 교부인 오리겐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가 항상 같이 있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니, 이 사랑의 빚은 우리가 날마다 갚고 영원히 져야만 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의 빚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입니까? 이 빚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 구속받은 그 순간부터 생겨나 우리의 어깨에 영원히 지워진 영광스러운 빚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빚은 사랑의 원천이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그 순간부터 우리에게 지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지은 빚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진 자입니다. 이를 깨닫고 우리는 무한정한 의무감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빚을 지지 않았다거나 다 갚았다고 자부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나 하나님께 영원한 사랑의 빚을 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빚은 갚으면 갚을수록 그 빚이 커지기만 합니다. 우리의 몸을 불사를지라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부채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지면 질수록 가볍습니다.

돈의 빚은 지면 질수록 무겁고 힘이 듭니다. 도덕과 윤리의 빚도 납덩이처럼 무겁습니다. 특히 율법의 빚은 사망의 그물입니다. 처음에는 후회의식, 그 다음에는 죄의식 결국은 저주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죄인들은 율법을 알든 모르든 율법과 양심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평생토록 갚아도 그 빚이 남는 것이 바로 율법과 양심의 빚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저는 아직 그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스트레스로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그 사랑의 빚더미에 깔려 질식했다는 소리도 듣질 못했습니다.

사랑의 빚은 지면 질수록 행복합니다. 간혹 교회에 봉사하고 주의 사역자들을 섬기는 분들 중에 사랑의 빚으로 시작했다가 인간적인 의무감으로 변질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했다가 주고받는 보상심리로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의 수준으로 내려와 버린 것입니다.

이런 분은 하나님의 품삯 계산에 불만을 품어 불평을 일으킨 일꾼과 같습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 온 사람과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의 품삯이 같다니 말이 안 됩니다.

그 분은 일한 삯을 계산하고자 합니다. 그러한 분은 사랑의 빚을 진 자가 아니라 일했기 때문에 당연히 보상받아야 세속적인 계산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사랑하는 일 외에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주의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하나님께 빌려주기도 하고 도와 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갇히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은 아직 율법의 채무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곧 하나님께 채권자가 됩니다.

율법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듯이, 우리 또한 사랑으로 그 율법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듣고 그 분의 사랑에 감사하여 빚을 진 빚쟁이부터 먼저 되어야 합니다.

일에 먼저 뛰어들어 평생 그 빚을 할부 갚듯이 갚아 천국을 차지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의 빚만 지고 자신의 존재 가치는 완전히 부도났다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 가는 곳입니다.

많은 사랑의 빚을 안고 있지만 그 빚을 도리어 즐거움으로 알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바울 사도는 처음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빌3:4-6).

그런데 그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당국으로부터 성도들을 잡아 결박하는 권세를 위임받아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 눈을 가리웠던 비늘이 모두 벗겨진 이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확인하고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만 율법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실상 유대인들은 이런 진리를 모르고 스스로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밤낮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율법은 613개 항목이나 되었습니다. 그것을 지키기란 너무 어려웠습니다. 또 그렇게 지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외식하는 사람이 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을 넘어 완성하는 방법을 주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613개 항목의 율법은 십계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줄인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 두 계명을 사랑이라는 한 계명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사랑을 실천한 그 사람은 십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나아가서는 613개의 율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이 사랑은 우리 성도의 최고의 법이요,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사랑의 채무감에서 사랑을 실천해 간다면 주님의 계명을 다 완성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계명과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3년의 공생애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에게 행하신 사랑의 연속이셨습니다. 예수의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곧 사랑의 실천이요 사랑의 완성이었습니다.

이런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도 이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굳게 걸어 잠근 이기주의의 빗장을 풀어 버리고 넓은 마음과 열린 손과 낮아진 허리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위해 우리의 열정을 불태워야 합니다.

실상 우리는 가난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어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큰 힘을 주실 것입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 이상으로 신앙인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토리 목사가 브라이튼이라는 곳에서 전도 집회를 하다가 그 집회 스텝들과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서빙하는 웨이터에게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사람들로 꽉 찬 레스토랑이라 장소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그냥 마음에 미루어 둔 채로 식사를 다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생각하니 그래도 한마디 전도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고 느껴져 웨이터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모습을 본 식당 주인이 나와서 혹시 무슨 일로 이처럼 기다리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써빙해 준 웨이터를 기다린다고 하자 침통한 표정을 한 주인이 말했습니다.

“손님, 이미 늦었습니다. 그 웨이터는 손님에게 봉사를 한 후에 이층으로 올라가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도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얼마 전 우리나라가 세계 자살률 1위라는 발표를 보고 우리들이 예수의 사람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설마 자살했을까라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사랑을 전하지 않아 자살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갚고 또 갚아도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 여전히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한 번 사랑의 짐을 져 본 사람은 그 사랑의 짐이 어렵지 않고 도리어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의 짐은 지면 질수록 행복하니,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빚을 진 자입니다. 우리는 빚진 자로서 충성스럽게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짐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사랑의 짐을 기쁘게 지시기를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