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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오직 주를 위하여

관리자 2012-09-23 (일) 11:00 11년전 1246  

오직 주를 위하여

 

로마서 14장 1~6절

 

1941년 7월말, 아우슈비츠 수용소 14동에서 포로 중 한명이 탈출했습니다. 친위대가 출동해서 도망친 포로를 추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탈출자가 24시간 안에 잡히지 않을 경우 그가 속한 14동의 수용자 중 10명이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다음 날 아침, 수용소 소장은 일렬로 늘어선 수용자들 중에서 처형시킬 사람들을 무작위로 골라냈습니다. “너, 너, 그리고 너!”

그런데 수용소장에게 지목된 한 사람 중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가 울부짖으며 애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제겐 아내가 있고 불쌍한 자식들도 있습니다. 제발..” 그때 누군가 대열을 벗어나 소장 앞으로 다가와서 소장에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 대신 제가 죽게 해주십시오.”

“너는 누구지?” 소장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16670번 막시밀리안 콜베 가톨릭 신부입니다. 결혼하지 않았기에 아이도 없습니다. 부디 저 사람과 바꿔주십시오.”

이 말이 소장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좋아,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사형수 리스트에서 울고 있던 가조우니첵크의 번호와 이름이 지워지고, 대신 콜베 신부의 번호와 이름이 올라갔습니다.

콜베 신부를 포함한 10명은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악명 높은 지하 아사감방으로 향했습니다. 콜베 신부는 죽음을 기다리는 다른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아사감방에서 콜베 신부와 함께 있는 죄수들은 누구도 저주하지 않고 비록 힘이 빠진 목소리지만 기도하고 찬송할 뿐이었습니다.

3일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한 사람이 죽었고, 나머지는 허기와 갈증으로 야위어가며 주말까지 살았습니다. 2주가 지나자 네 사람이 남았는데, 콜베 신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다음 작업을 위해 감방을 치우도록 해!” 소장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치운다는 말은 배설물과 냄새 제거를 의미했지만, 또한 겨우 숨만 붙어 아직 생존해 있는 수감자들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수용소 담당 의사가 감방문을 열었을 때, 3명의 동료를 먼저 보낸 후 혼자 남은 콜베 신부는 벽에 기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독약주사 앞에 뼈만 남은 팔을 내어 주었습니다. 1941년 8월 14일,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습니다.

가톨릭은 콜베 신부의 순교를 기려 1982년 10월 1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콜베 신부를 성자로 추서했습니다.

콜베 신부는 신학박사와 철학박사였고, 인기 있는 저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콜베 신부는 선교재단을 만들어 선교에 나섰고 일본 선교사로 6년간을 현장에서 뛰기도 했습니다.

또한 콜베 신부는 7백명이 넘게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수도원을 만들 정도로 당시 이름이 났던 신부였습니다.

독일의 나치군이 들어오자 그 수도원은 반나치의 중심부가 되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독재와 폭력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히틀러 정권에 강력하게 바른말을 하였고 폴란드 동포를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그만 체포된 것입니다.

이렇게 콜베 신부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내놓았는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이 당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권면한 내용입니다. 당시 로마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믿고 감사하면서 사는 이들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의식을 잘 준수해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전자를 믿음이 강한 자들이라고 했고, 후자를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고기를 잘 먹었으나, 믿음이 약한 자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사회에서 육류는 대부분이 우상제물로 바쳐졌던 고기였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이 제물로 헌납한 고기는 우상숭배 사제들을 통해서 시장으로 넘겨졌으며 그런 관계로 시장에서 사먹는 고기들은 대개 우상숭배에 쓰여졌던 고기였습니다.

그래서 열성적인 우상숭배자들은 고기값을 더 주고서라도 이런 고기를 먹기를 즐겼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의 음식법에 집착했던 로마 기독교인들은 육식을 금하고 오직 채식만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로마 교회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그 문제로 교회가 양극화되어 반목과 질시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로마 교회는 음식 문제로 서로 비난을 일삼고 남을 정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의 평화가 중요함을 역설했습니다.

그 당시 하인은 그의 주인만 그 하인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지 남이 남의 하인을 판단할 권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4절).

하인에 대한 상벌의 주체는 주인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제국에서는 하인의 생사여탈권은 황제조차도 가질 수 없고 다만 그 주인에게만 있는 고유권한이었습니다.

그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인인 우리를 세우고 넘어지게 하는 권한은 바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죄인이 죄인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의로움 자체이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구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7:1-5).

찰스 스윈돌 목사는 그의 산상수훈 설교집인 [은혜의 각성]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정당한 비판을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사실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데, 제한된 사실로 어떻게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 표정을 통해서 그 동기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기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 정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판단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 때에만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 맥락적입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명한 예를 봅시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다가 조수에게 “벽돌!” 하고 외치면 그것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공사장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칭찬받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겨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드러내기 힘든 장애를 가졌거나 남모르는 고통을 가졌다면, 우리의 비판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섯째,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상대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평가를 내린 것이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평가를 내려놓고 거기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열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습니다.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특별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이 일관성 없는 태도를 가졌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저명정치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파티에서 그 정치인이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 정치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 속에서 쉽게 험담과 비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곱가지 근거를 늘 생각하십시오. 남의 허물을 보았더라도 그 허물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에 동등하게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존재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자격이 없음에도 신앙 안에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난하고 평가할 자격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빈부격차, 지위고하, 그리고 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여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여 화목한 공동체를 이룰 때 교회 공동체는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말고 이 세상 그 어디에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형제들끼리의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 나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로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또 로마 교회 교인들 중 어떤 교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을 다른 날보다 낫게 여기고 그 날을 경건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모든 날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 역시 사도 바울은 신앙으로 지혜롭게 해결했습니다. 즉,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여”(5절) 지키고 싶으면 중히 여겨 지키고, 지키지 싶지 않으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규제하였던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자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도 각자 알아서 해야 될까요? 즉, 사도 바울의 권면에 따라 내가 지키고 싶으면 지키고, 지키기 싫으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날일까요?

결단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쓰인 ‘날’을 우리는 ‘유월절 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효력이 상실된 날’로 읽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제외한 이런 ‘날’에는 우리는 전적인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날에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도 가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가합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절).

그러니까 먹는 안 먹든 어떤 날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인 ‘먹는 것’이 있고 ‘지킬 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찬’과 ‘안식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에 따라 성찬과 안식일도 내 마음이 가는대로 안 먹어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다시 한번 말하자면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먹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 권면하고 있는 신앙의 자유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성찬과 안식일’ 이외의 음식과 날은 주님을 위해서라면 먹지 않아도 되고,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에는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습니다. 이 신앙의 자유를 여러분이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서로 비난하지 말고 서로를 섬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또한 신앙 안에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로움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온 몸을 바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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