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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선으로 악을 이기라

관리자 2012-09-02 (일) 11:00 11년전 1181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장 19~21절

 

인도의 성자 선다 싱은 소년 시절에 예수를 영접하고 인도 방방곡곡을 누비며 예수를 전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낫칸나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산길을 지날 때 마침 추수하느라 몹시 바쁜 농부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다 싱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깊은 산중에 저들이 언제 예수의 복된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선다 싱은 그 농부들에게 다가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심술궂은 농부가 남의 일을 방해한다며 돌을 집어 던져 선다 싱의 머리에 맞게 되었습니다.

돌에 맞은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다 싱만 정신을 잃은 것이 아니라 돌을 던졌던 농부도 갑자기 자기 머리를 감싸고 발버둥을 치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돌에 맞은 선다 싱의 머리는 아무 상처도 없이 깨끗했지만 농부의 머리는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본 다른 농부들이 저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 구나”라며 두려워 떨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선다 싱은 이 광경을 보고 쓰러져 있는 농부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 농부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기 때문에 추수하지 못한 그 농부를 위해서 낫을 들고 벼를 베기 시작했습니다.

정신을 차린 농부와 그 자리에 있는 다른 농부들이 선다 싱의 행동을 보고는 감동하여 저녁에 선다 싱을 자기 마을로 데리고 가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선다 싱이 전하는 복음을 전해 들은 그 마을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선다 싱은 자신에게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 도리어 선한 행동으로 보답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관계에 성공하여 복음까지 전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한 사회학자가 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 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평상시 인간관계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위의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하찮다고 생각할 만한 그러한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챙겨서 여러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어온 것을 봅니다.

그들은 특히 세 가지 방문을 잘 했는데 입의 방문과 손의 방문, 발의 방문, 그 세 가지입니다.

입의 방문은 전화나 말로써 사람을 부드럽게 하며 칭찬하는 것이고 용기를 주는 방문입니다.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마음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병들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찾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고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입니다. 칭찬은 할수록 늘고, 편지는 쓸수록 감동을 주며, 어려운 이는 찾아갈수록 친근해집니다.

인간관계에 감동을 주는 사람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1.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했습니다(19절).

 

예수께서는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셨는데, 본문의 바울 사도 또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악을 행했다고 그대로 우리도 그들에게 똑같은 악을 행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법정에서 범죄자를 법의 공정한 심판에 맡기는 것을 금하거나 죄인에 대한 공정한 법의 적용을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죄인의 복수를 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공정하게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노하여 우리의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공의로 갚으시도록 맡기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진노하게 되면 마귀가 틈을 타게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풀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내가 화를 내면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밀어내고 내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마귀에게 내어주는 꼴이 됩니다.

마귀는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데, 우리가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면 우리는 신앙적으로 완전히 파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신32:3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오 통치하는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는 모든 문제의 재판장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순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의로운 심판을 하십니다.

다윗은 나라의 군왕이며 장인인 사울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3천명이라는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다윗을 쫒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울 왕을 처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이 엔게디 광야에 있는 양 우리의 굴에 숨어 있었는데, 마침 사울 왕이 뒤를 보러 그 굴로 들어 온 것입니다.

다윗의 군사들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사울 왕을 치자고 했는데,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을 함부로 대적할 수 없다고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또 한번 살려준 일이 있습니다. 다윗이 유대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십 사람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뽑은 3천명을 데리고 십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렀을 때 사울은 자고 있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워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과 동행했던 아비새는 하나님이 원수 사울을 다윗의 손에 넘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단번에 창으로 찔러 죽이고자 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원수를 갚으려 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범죄 하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율법은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합니다(레19:18). 원수를 갚는 권한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친히 복수하실 것을 믿고 사울의 목숨을 살려 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울을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를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기초하여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2. 사랑을 베풀되 말과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20절).

 

우리에게 원수가 있을 때 우리는 그에게 친절을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베풀어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원수라고 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우리가 그를 진정으로 용서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원수 같은 사람이 어렵게 되면 “아하, 하나님께서 이제야 내 소원을 들어 주시는 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때, 즉 우리가 그를 굶겨 죽일 수 있고, 짓밟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오히려 그를 먹여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잠언 25장 21-22절 말씀을 봐야 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씀을 보면 숯불을 사람 머리에 놓는다는 말씀은 우리 원수와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과연 무슨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을 강하게 역설합니. 바울은 우리가 원수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다면 “우리가 숯불을 원수들의 머리 위에 쌓아 놓는 격”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원수들 머리 위에 뜨거운 숯불을 놓으라는 권면이니 우리에게 용서하라기보다는 오히려 복수하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고대 근동의 가정에서는 오직 화로에만 불을 담아 놓는데, 그 화롯불이 난방용뿐 아니라 간단한 음식 조리용으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화롯불을 절대로 꺼뜨려서는 안 됩니다. 불이 꺼지면 식구 중 하나가 화롯불을 옆집으로 가지고 가서 불을 빌려와야만 합니다.

옆집에서 불을 빌려서는 이마 높이까지 쳐들고 집으로 향합니다. 옆집에 사는 부인이 마음씨가 좋은 사람일 때는 화로에 숯불을 가득 채워줍니다.

원수가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우는 것은 불이 꺼진 화로에 생명의 숯불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즉 궁핍한 사람이나 가정에는 생명 그 자체와 다를 바 없는 음식이나 따뜻함을 가득 채워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 것은 지상 최대의 관대함의 상징입니다.

잠언의 지혜자나 오늘 본문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이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원수들에게도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원수까지도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라 생각됩니다.

첫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미움과 원한, 증오, 적개심에 대한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풀면 그들의 차갑고 강팍한 마음이 불에 녹듯이 변하여 우리의 새로운 친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이 된 상황에서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최대의 원수가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은 정말 무서운 집단입니다.

KAL기를 폭파하고, 아웅산에서 폭발 사건을 일으켰으며, 금강산에서 남한 여행객을 쏘아 죽이고, 천안함을 폭파하고, 연평도를 포격하는 등 상대하기 어려운 집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사랑의 돼지저금통으로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도울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녹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큰 마음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씨앗이 되어 남북통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어 그들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 원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질 것입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사랑으로 도와주고 친절을 베풀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3.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21절).

 

악을 악으로 보복하는 자는 결국에는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사람은 악을 정복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악에게 지면 안 됩니다.

아랍의 테러리스트들은 자기들의 원수인 이스라엘을 미국이 지원하는 것에 보복을 하기 위해서 2001년 9.11사태를 일으켜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려 2천여명의 선량한 시민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이 사건은 다른 보복으로 이어져 아랍 세계 곳곳에서 주동자인 알카에다 빈 라덴을 잡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까?

그 누군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고통을 주면 필연적으로 복수와 원망의 마음이 불끈 솟아 오릅니다. 이렇게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 악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 감정의 노예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악을 그 누가 저질렀어도 분노하거나 역정을 일으키거나 평화를 깨뜨리는 마음의 번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의 잘못에 복수하려고 하는 감정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그런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길이 참으시고 십자가를 지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게 됩니다. 그 사람은 큰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마음에 한량없는 평안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나도 모르게 그 분노를 참지 못할 때 엄청난 일이 일어 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입니다. 길이 참으셔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케 하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 또한 분노를 사랑으로 바꿀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악을 선으로 이기는 믿음을 스데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악을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순종하고 옛 생활을 동경하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또 그들은 성전을 우상시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갇혀 계실 수는 없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자기 조상들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고, 메시아를 죽이고, 말씀을 불순종한 죄악을 날카롭게 책망했습니다. 스데반은 공회의 위협 속에서도 생명을 걸고 그들의 죄악에 도전하여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책망을 들은 유대인들은 회개는커녕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쳤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자기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께 드리신 마지막 기도와 같습니다(눅23:34).

우리도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을 만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들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스데반처럼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긴 스데반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또한 주님의 공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선으로 악을 이긴 신앙의 위인이 우리나라에도 있으니, 그분이 바로 손양원 목사입니다. 1946년 여수반란사건이 터졌을 때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손동인, 손동신)을 안재선의 총탄에 무참히 잃었지만, 살인죄로 사형에 처해질 그를 살리고자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예배에서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등, 9가지 감사기도를 올렸습니다.

아들의 장례식에서 도대체 이런 감사가 나올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죽도록 원수를 미워하기보다 죽도록 사랑하기로 작정한 손양원 목사의 사랑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와 허물과 실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 다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사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나눠주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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