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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9.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복 있는 사람

관리자 2012-01-29 (일) 11:00 12년전 1136  

복 있는 사람

 

로마서 4:1~12

 

북한을 연구하는 한 단체에서 나온 [북한 총람]에는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에 대해서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총람에 의하면 북한에 6.25 이후에 예배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가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위해서 두 개의 교회를 세우고 정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기독교연맹’이라는 단체가 있으나 북한 공산당의 지배를 받는 단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1957년, 북한에서 인민회의의 대의원을 선출하는데 웅천에서 2천 여명이 투표에 빠진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당국에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다가 주일날은 협동농장에도 빠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비밀경찰을 한 3백여명 동원하여 결석자들을 샅샅이 수색해 보아도 그들이 어디에 갔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그런데 뒤를 밟아 찾아가 보았더니 한 집에 3명 내지 5명씩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은 이만회 목사에 의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그는 그 동네에 이사를 와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의 지도하에 셋 혹은 다섯씩 세포 조직을 만들어 횡적으로만 관계를 맺게 하고는 주일이면 몰래 모여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수가 무려 5백여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비밀경찰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그 지도자들을 다 처형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자유스러운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데도 예배를 게을리 하는 이들이 있으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 저들이 왜 그렇게 목숨까지도 위험에 내맡기고 예배를 드렸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생각할 때 예배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고 생명을 바쳐 예수를 전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그 어떤 경우에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가치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은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가르쳤고, 유대교 경전인 탈무드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 할례를 받지 않으면 그의 모든 기도, 구제, 선행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가르치기까지 했습니다.이런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에 대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조차도 할례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 복음만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드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 바울은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위대한 성군 다윗을 들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을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했고 긍지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그들의 모범이었고 기준이었고 숭상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의 성막 뒤에 머물게 한 일곱 의인 중 첫 번째 인물로서 그의 의는 세 살 때 시작되었으며 모세의 율법을 미리 성취한 당대의 유일한 의인이다”고 하였습니다.그러므로 만일 행위로 의롭게 된다면 아브라함이야말로 그 행위를 내세울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3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과 ‘의’가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평가하고 계산해 주셨다는 것을 뜻입니다. 믿음이 의로 평가되는 이유는 믿음의 핵심과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곧 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상업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한 것은 그의 믿음을 보고 값을 지불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무거운 주택 융자금을 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실직하여 더 이상 융자를 갚을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몇 달 후, 수개월 분의 납입금이 밀리게 되지만 그 빚을 갚을 길이 전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빚은 늘어만 가고, 상황이 호전될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빚에 짓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 사람의 빚을 갚아주겠다고 제의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친구는 연체금을 다 갚고, 그 사람의 융자금을 다 갚을 때까지 매달 자기 계좌에서 납입금이 자동적으로 빠져나가도록 조처합니다. 그 친구는 일종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죄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고 있는 빚을 그때그때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소망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소망을 전적인 은혜로 허락하셨습니다. 그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갚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연체금만 지불할 것을 제안하여, 우리가 지불할 금액을 제날짜에 맞추어 낼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진 빚 전체를 다 갚아 주시겠다고 제안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빚을 모두 갚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놀라운 주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죄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짐을 대신 짊어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믿으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의가 됩니다. 이 십자가를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빚 전체를 다 탕감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의 행위가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타락한 인간은 본질상 죄인이라서 그 행위가 본질적으로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그런데도 믿음 하나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런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은 진정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예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야 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이 영광에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유대인들의 법 개념에 따르면 2인 이상의 증인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참된 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의 꽃을 피운 왕이요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인 다윗을 의인으로 내세워 자신의 주장이 참임을 증언합니다. 물론 다윗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은 정말로 의로웠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브라함에 못지 않게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많았습니다.그러나 다윗이 그렇게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았던 것은 그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쓴 그 위대한 시편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32:7-8).

다윗 같은 위대한 사람도 심각한 죄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확신하고 감격하여 이 시를 지어 읊으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다윗은 그의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최전방 전투에 보내 죽게 하고 그녀를 데려다 함께 살았으니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이런 것을 보면 인간은 정말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 같은 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에서 헤매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의 손길을 오직 믿음으로서 붙잡았습니다.그때 그는 용서 받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힘입어 왕권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그의 후손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습니까? 하나님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지 못하고 언제나 나만 위하는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데도 내일 때문에 너무 게르지 않았습니까? 또 불쌍한 이웃에게 선한 일을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잘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받고 구원 받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처럼 복 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용서 받은 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에 아침 일찍 6시에 부름을 받아서 일한 일꾼과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일꾼이 똑같은 품삯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 부름 받은 일꾼이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늦게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일꾼은 황송한 일입니다. 한 시각 밖에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래 주님을 믿은 사람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았습니다.우리는 정말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큰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좋은 행위가 많았지만 자랑하지 않았습니다.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서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6:14)고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 은혜에 따른 책임이 무엇인지를 잘 압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에 합당한 삶은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자신이 세상에 사는 이유를 자기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고 고백합니다.이는 자기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고 돌아가신 예수의 뜻대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때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구주라는 것은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은 따라가다 보면 때로 거친 광야와 같은 길을 걷게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 가기 싫은 길을 가야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미리 계획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0년의 광야 길을 걷게 하십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2-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낼 때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애굽에서 얻은 노예습성과 죄의 습성을 없애는 데는 무려 사십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통해 애굽의 죄와 노예습성을 모두 털어내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다듬어 내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들의 인생 중에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시는데 거기는 다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런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힘들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은 구원받기 전과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거짓말하고, 아직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의 죄의 습관들이나 악한 습관을 고치는 데는 광야생활과 같은 다소의 고난의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고난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 성화의 과정을 거치고 견뎌야 주님의 죽으심의 가치에 합당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인내해야하고 때로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을 잘 견디고 나면 저와 여러분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과 같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변화되어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금년 한 해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자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살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마음껏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피곤해지고,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며 기진맥진하여 약해진다면 얼마나 행복입니까?

 

슈바이처는 예수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 빚을 갚는 일을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바로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이런 복 받는 성도가 우리 교회에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올 한해에는 이 은혜를 보다 널리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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