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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관리자 2012-11-25 (일) 11:00 11년전 1142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

 

로마서 15장 14~21절

 

1798년 제너는 천연두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젖소에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가진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우두를 사람에게 주사하면 천연두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을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학회에서는 마지막 시험 단계에 들어갔는데, 당시 유명했던 영국의 의학자들을 비롯한 세계의 학회 회원들은 그를 비웃고 조롱하였습니다.

시골뜨기 의사가 의학의 ABC도 모르면서 하나님과 의학을 모독하고 있다고 야단이었습니다. 동물과 사람을 구분할 줄도 모른다면서 동물에게 적용한 것이 어찌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며 제너의 보고를 경멸했습니다.

당시는 인체 실험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때였고,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제너의 발견은 세상에 빛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가 “몇달 전에 어떤 사람에게 주사하였는데 들었습니다”라고 하면, 그들은 한 사람에게 임상실험한 것을 가지고 되겠느냐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제너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저는 23명을 실험했고, 낳은 지 열 하루 밖에 되지 않는 제 아들에게까지 실험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제너의 실험은 필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전 인류에게서 천연두를 없애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습니다.

위대한 일은 절대로 희생이 없이 이루지 지지 않습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나 사회생활에서도 내가 희생함으로 평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내가 희생해야 아름다운 가정, 평화로운 교회 그리고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 집니다.

우리들이 관계하는 공동체의 평화가 깨지면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특히 성도들이 속한 공동체가 평화로워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의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하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과 평화를 이루어야 하며 또한 세상 사람들과도 될 수 있는 한 평화의 관계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9절에서 ‘화평의 일’에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권면에 따라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하고 평화에 대해서 말하지만 실제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나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마음만 평화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돌파할 수 있지만 마음이 불편하면 작은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면 편지 한 장도 쓸 수 없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병도 속히 고칠 수 있습니다. 혈액순환도 잘 됩니다. 소화도 잘 됩니다.

의학계에서는 “모든 병의 70% 정도가 불안한 마음에서 온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머리가 맑아져 생각을 바로하게 됩니다.

손과 발이 바로 움직여 모든 일이 잘 됩니다. 마음이 평안해서 장사도 잘 되고 공부도 잘 되고 시험을 보아도 잘 봅니다.

심지어 부인들도 마음이 평안해야 음식도 잘 합니다. 마음이 불편한 부인이 음식을 준비하면 그것이 무슨 살로 가겠습니까? 마음이 평안한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텍사스 주립대 엔더슨 암센터에는 세계 최고의 암전문가로 손꼽히는 김의신 박사가 있습니다. 김 박사는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 밖에 모른다’는 믿음이 확고한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는 일이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박사에 따르면 암에 대한 면역력이 일반인보다 신앙인이 훨씬 높아 성가대원의 면역세포 수는 일반인보다 몇 십배도 아닌, 무려 1000배나 많아 그만큼 암을 잘 이겨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내 경험으로는 믿는 사람이 믿음 없는 사람보다 암을 이기는 힘이 강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중보기도를 받은 암환자가 그렇지 않은 환자보다 치료효과가 월등히 좋다고도 증언합니다.

이렇게 신앙인이 비신앙인보다 치료 효과가 좋은 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하나님 안에서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에 치료효과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옳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알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의 보혈의 피공로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과 공동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을 당신의 아들로 인정하자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셨듯, 우리 또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주의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인정 받을 때 변화되고 새롭게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어느 기독교 가정 사역 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자녀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받는 말은 “네가 제대로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43%)”라고 합니다.

또 부모가 자녀한테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것은 “나한테 해 준게 뭐 가 있어요?”(73%), “엄마, 아빠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요(47%)”라는 말이었습니다.

즉, 자녀는 부모가 인정해 주지 않고 무시할 때, 그리고 부모는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시당할 때 가장 분노합니다. 어린아이에게 ‘꼬마야!’ 라고 부르면 “난 꼬마가 아니예요”라며 당장 반발합니다. 본래 나는 무시당할 존재가 아닌데 무시하니까 불쾌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가장 힘이 되는 말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소중하단다”는 말을 듣는 것이요, 부모들은 “누구보다 우리 부모님을 존경해요,” “부모님을 사랑해요”라는 말을 자녀들로부터 듣는 것입니다.

또 남편은 “당신 밖에 없어요. 당신이 최고예요”라는 아내의 말을, 아내들은 “당신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축복이야”라는 말을 남편으로부터 듣는 것을 꼽았습니다.

조사 결과 모두가 인정받는 말이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정받는 말이야 말로 가장 힘이 되고, 듣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서로 화평하라는 권면 외에도 ‘서로 덕을 세우라’고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덕을 세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의 ‘덕’은 ‘건물을 세운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는 피차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덕을 세워 나가는 일이 마치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하기 위해 하나씩 하나씩 벽돌을 쌓아 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건축물이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세워줄 필요가 있으며 서로 영적 성숙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붙들어 세워주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유익합니다. 남을 붙들어 세워줄 때 나에게 엄청난 새로운 힘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시중의 고기를 먹는 것은 바로 그 고기가 제사 드린 음식이기 때문에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음식이 제사 음식이라고 해도 거기에 무슨 귀신이 붙어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다른 성도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면 그 음식을 절제하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20절)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끼리 상처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가 하나님 안에서 평화와 정의로 바로 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깨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이요 하나님의 농작물이며 건물입니다(옙2:10, 고전3:9).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의 평화를 방해하고 손상시키기 보다는 우리의 자유를 절제하고 살아야 합니다.

고기는 가끔 먹어야 힘이 생기고, 고기를 먹어야 육체에 생기가 도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형제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자기 육체를 돌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21절).

우리는 육체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을 자유로이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화평과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자유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솝 우화 중에 ‘파리와 좀나방’ 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파리가 꿀 항아리에서 꿀을 핥아먹고 있었습니다.

변두리에서 조금씩 빨아 먹으면 될 텐데 조금 더, 조금 더 하고 많이 먹으려고 깊이 들어갔다가 그만 꿀 항아리에 빠져 버렸습니다. 날개가 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속에 빠져 꿀만 먹다가 죽게 생겼습니다.

이때 좀나방이 그 위에서 파리를 보고 비웃었습니다. “야, 이놈아, 아니 조그만 놈이 변두리에서 빨아먹어도 충분한걸, 뭐 욕심을 내 그 안에까지 들어갔다가 그 모양이 되었느냐. 이 미련한 놈아.”

이윽고 해가 졌습니다. 주인이 등불을 키자, 좀나방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불 가까이 모여드는데 좀더 밝은 곳으로 좀더 밝은 곳으로 하다가 그만 등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꿀 항아리 속에 있는 파리가 “나보다 더 바보 같은 놈, 자기 욕망을 이기지 못하다니 불쌍한 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곤충의 세계의 우화이지만 욕심과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 해를 입는다는 경고입니다. 그런데 인간들도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산 사람들이 성경에는 나옵니다.

아합은 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사람인데 어느 날 신하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서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 탐심을 내다 병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아내 이세벨이 그것을 알고 불량배를 시켜 나봇을 모함하여 죽인 후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죽이고 빼앗았으니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21:19)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5번째를 맞는 주일입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가 지도자들의 욕심과 탐욕으로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을 때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를 변화시켰고, 그런 과정에서 개신교가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중세의 가톨릭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유명한 목사님들이 이기적인 생각으로 담임목사직을 세습하고, 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교권 다툼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등 교회의 위신과 명예가 추락할대로 추락했습니다.

그래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신교가 이제 그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다니,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입니다.

한국교회는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여 생명의 말씀이 교회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중세 가톨릭이 부패하게 된 것은 바로 설교단에서 설교하는 신부들이 자신들의 권세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 권세를 절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부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절제하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남용하여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권세를 절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본능을 주실 때 절제도 함께 명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절제하는 생활을 통해서 주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존경 받는 사도이기 때문에 대우를 받으며 높은 지위에서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위와 권한을 사용하기를 절제한 이유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적으로 중동 및 소아시아, 나아가 유럽 서방 전체나라의 사람들을 얻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이방인 지역에서는 이방인 같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 같이, 유대인에게는 동족으로서 행한 결과 인종 격차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활 습관이나 취미, 지식, 지위가 서로 다를 때 거리감을 두게 됩니다. 우리들이 전도할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바울과 같이 그들의 수준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이 필요 합니다. 대체로 편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사람일수록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절제에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습관화되면 자연스런 생활의 자세가 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이 절제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업을 도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절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업을 도모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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