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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8.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은혜에 따르는 영적 책임

관리자 2012-01-08 (일) 11:00 12년전 1141  

은혜에 따르는 영적 책임

 

로마서 3:1-8절

 

외국의 어느 유명한 의과대학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퇴임식이 있던 날 동료의사들과 제자들이 퇴임식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한 평생 의학발전을 위해 힘쓴 노교수의 공적에 박수를 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먼저 사회자가 노교수의 약력과 경력, 그리고 갖가지 학문적 성과들을 한참동안 읽어내려 갔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히 사회자의 말을 듣는 동안 노교수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습니다.

사회자는 말을 끝낸 뒤 노교수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노교수는 두 손으로 박수를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 뒤 입을 열었습니다.

“자 여러분, 모두 앉아 주십시오. 오늘 이 자리는 나의 퇴임을 알리기 위해 마련된 자리입니다. 매우 부끄러운 자리입니다만 몇 가지 할 말이 있어 굳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겸손하게 말을 꺼낸 노교수는 지금까지 의사로서 범한 갖가지 실수들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환자를 오진했으며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그는 상세하게 예를 들어가며 설명했습니다. 노교수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매우 놀라고 당황스러워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이렇게 나의 의학적인 과오들을 고백하는 것은 의료인들의 책임이 얼마나 무겁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주위에서 인정받긴 하였지만 나는 실수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여러분! 실로 우리 의사들의 힘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부디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마지막 선물입니다.”

자기 실수를 낱낱이 고백하는 노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많은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그 사람이 감당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망각하거나 그것을 회피했을 때 치르는 사회적인 비용은 막대한 것입니다.

의사가 의사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거나 회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하철 운전수가 운전수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거나 회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총을 든 군인이 군인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거나 회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모르고 그 책임을 망각하거나 회피하는 것을 넘어 그 책임을 ‘오해’한 것은 물론 그 오해한 책임을 너무나 지극정성으로 감당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까지 바꾸게 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오늘은 유대인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다른 지를 알아보고 은혜를 책임있게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사도들의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선언하는 사도들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동족인 유대인의 공격 앞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투옥과 매맞음과 추위와 배고픔을 당하면서 복음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이민족들의 통치를 받아온 역사적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끔찍한 역사를 고려하면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박해한 것은 ‘인간적으로는’ 이해할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동안 400년 동안 억압을 당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 아래 8년을 보냈습니다. 모압 왕 에글론의 압제 아래서 열여덟년을 보냈습니다.

하솔 왕 야빈을 20년간 섬기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미디안에게 압제 당한 7년도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블레셋과 암몬 족속에게 압제 받은 햇수가 열여덟년이었습니다.

삼손 당시에는 블레셋 족속의 압제아래 40년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야곱으로부터 사울 왕이 나타나기까지 500년 동안 압제를 받았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합쳐서 120년 동안 독립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압제아래 살았습니다.

바벨로니아의 압제 아래서 70년을 노예처럼 살았습니다. 메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200년을 살았습니다. 알렉산더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셀류크스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헤롯왕의 압제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줄 메시야 간절하게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은 무엇보다 먼저 모세와 같은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바로 왕과 그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큰 권능으로 맞서서 애굽 왕과 그 신하들을 굴복하게 했고,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잠기게 했으며 아말렉을 무찔렀고, 미디안을 굴복 시켰으며 바산왕 옥과 아모리왕 시혼을 죽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권능으로 인도해 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또 여호수아와 기드온 같은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물의 흐름을 멈추게 하고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는 권능을 가지고 여리고와 아이를 비롯하여 가나안에서 31명의 왕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지켜 내었습니다. 기드온은 불과 300명을 이끌고 미디안의 대군을 무찔러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켰던 인물이었습니다.

또 다윗과 솔로몬 같은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때려잡았을 뿐만 아니라 어디로 가든지 항상 승리하는 장군이었고 일생에 패배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중에서 다윗과 같은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엘리야는 큰 권능을 가지고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들과 맞서서 이겨 내었던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또 말라기 선지자가 언젠가는 엘리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을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 같은 메시야를 고대했다.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볼 때 그들이 바라고 기대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예수님을 바라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를 물리치고 개선장군이 되어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할 줄 알았는데, ‘나귀’에 앉아 입성하다니, 그런 초라한 일개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라고는 도저히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승리와 영광의 메시야만을 고대했습니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초라한 메시야는 몰랐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수용하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던 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겸손한 메시야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겸손하게 마굿간에서 태어나셔서 목수의 아들이 되셨고, 하나님이시면서도 위풍당당한 백마가 아니라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고, 하나님이시면서도 왕 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가장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몰랐기에 사도들을 배척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2. 율법은 사망으로, 은혜는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고, 자랑스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당신의 말씀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즉 유대인의 나음이 ... 무엇이냐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어느 민족보다 먼저 받음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덧입을 수 있는 기회를 그 어떤 민족보다 먼저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을 오로지 형식적으로 준행했고, 그 형식을 넘어 율법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율법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셨고, 은혜와 사랑으로 그 율법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율법과 은혜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악을 대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출애굽기 21장 24에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고 율법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율법은 행한 대로 보복하라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마5:38-39).

주님은 은혜의 시대에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원수는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 주신다고 하셨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레위기 19장 17절을 보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고 그 벌을 즉시 내려 주어 견책, 즉 잘못을 꾸짖고 나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율법의 시대에는 원수를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라 하였으나, 은혜의 시대에는 완전히 사랑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셋째, 심판이 다릅니다. 신명기 22장 21절에 보면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거든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버지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고 율법은 명시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시대에서 음행한 여자는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이는 심판을 당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시대에서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고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어서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혜의 시대입니다.

넷째, 저주와 복이 다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율법의 시대에 율법을 행하지 않을 때에는 늘 저주가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시대에서는 주님의 십자가로 인해 저주에서 해방이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저주를 받으셨으니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들인 우리는 저주를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죄가 달라집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요, 은혜는 죄를 사함 받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에 로마서 3장 20절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용서하고 구속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사망으로, 은혜는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로마서 7장 9-10절에 보면 율법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명확히 나타냅니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율법은 죄를 주고, 그 죄로 인하여 우리는 사망에 이르지만, 은혜는 용서를 주고 우리는 그 용서로 인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은혜에도 책임이 따릅니다.

 

유대인들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먼저 받았기에 특권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율법으로 이방 민족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제사장적인 역할을 감당했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그 율법을 교만의 도구로 삼아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의 교훈집인 탈무드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역시 사람의 모양으로 지으신 것은 유대인들이 그들을 종으로 부릴 때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할 정도로 민족의 우월성을 앞세워 오히려 세계의 이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배타적인 국수주의에 빠져 버린 것은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써 율법을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을 받았지만 우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의 복음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마치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것과 같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율법을 잘못 사용하여 선민의식이라는 극단적인 민족 우월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의 복음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 은혜의 복음을 유대인들처럼 잘못 사용하면 주님으로부터 유대인들과 같은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특전을 받았으나 그 특전에 따르는 책임을 망각하고 그 특전을 잘못 사용하여 교만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은혜라는 특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특전에 따르는 책임을 망각하고 그 특전을 잘못 사용하면 자만에 빠져 유대인들과 똑같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특전을 받고도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를 몰라 교만에 빠져 민족적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척도를 사용하여 ‘남’을 비난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척도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기는 쉬운 법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 척도를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도 십자가의 은혜라는 특전을 받았음에도 그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를 모르고 교만에 빠져 민족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자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극동의 가난한 나라, 은둔의 땅인 한반도에서 사는 우리들도 이 은혜의 복음을 받아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복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인재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으로 만족하면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그 축복의 촛대가 옮겨질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이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이 구원의 복음을 세계에 전하는 선교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지 않고 그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에도 책임이 따르지만, 은혜에도 마찬가지의 책임이 따릅니다. 값없이 주신 은혜를 방종하여 탕진하지 말고 올바른 책임의식으로 감당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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