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0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세계 선교의 꿈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2.12.0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세계 선교의 꿈

관리자 2012-12-02 (일) 11:00 11년전 1103  

세계 선교의 꿈

 

로마서 15장 22~ 29절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헤밍웨이는 부귀와 명성을 다 가졌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여성을 찾아서 네 번이나 결혼을 했지만 네 번 다 이혼하고 61세에 심한 우울증으로 자살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건전지의 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처럼 공허하다.”

겉만 번지르르한 허수아비 삶은 우리에게 삶의 공허와 허무만을 안겨주기 일쑤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처럼 지위와 명예와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다 가졌음에도 우울증과 같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삶을 잘 살았어도 조금만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은 허무와 무의미와 공허로 꽉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텅 빈 자화상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그 허무감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하루에 46명씩, 일년에 1만 6천명이나 자살한다고 합니다.

특히, 연예인들의 자살이 늘고 있는데, 그들은 의식주 때문이 아니라 삶이 가져다 주는 허무와 무의미를 이기지 못하고 텅 빈 자화상 때문에 몸서리치다가 자살까지 하는 것입니다.

“배우의 삶이란 사방이 유리로 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 여배우가 우리나라에서 유명 연예인으로서 살아가는 고충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부와 명예, 사회적 특권까지 갖게 된 그녀를 부러워 하지만, 정작 연예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당연한 것들을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까운 슈퍼에 갈 때도 늘 두꺼운 화장을 하고 가야하고, 영화 한편 보러 갈 때도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해야 하고, 친한 사람과 커피 한잔 마셔도 스캔들이 터지고, 말 한마디 실수하면 100만 안티에 악성 댓글 수백 개 달리는 등 유명 연예인들은 수많은 고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온통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잘 보이고 싶다는 욕망, 사랑 받아야 한다는 욕망이 온통 그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한번 얻은 인기를 놓치지 말아야 된다, 실수하면 안 된다, 이번 드라마에서 떠야한다, 스캔들이 터지면 안 된다, 아무리 힘들어도 스케쥴 펑크 내면 안된다, 늘 예쁘고 아름다워야 한다, 세월이 흘러도 미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그들을 놓아 주지 않습니다.

인간이면 늙어가고 살이 찌고 여드름도 나고, 인간이면 아프고 힘들고 우울하고, 인간이면 바보 같은 실수도 하는 것이 당연하건만 대중들은 그들의 사소한 움직임도 지켜보며 가혹하게 비평합니다.

한 번 인기가 떨어지면 대중들은 그들을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넌 자질이 없어.” “넌 연기를 너무 못해.” “넌 못생겼어.” “네 망가진 몸매를 봐.” “넌 늙어가고 있어.”

현대인들에게 연예인은 내 곁에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미디어 속에서 팔리는 하나의 예쁜 ‘상품’일 뿐입니다. 사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 버리고, 그것을 이기지 못해 많은 연예인들이 자살까지 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연예인들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부귀영화는 일순간이고, 권세를 아무리 누려 봐도 삶이 허무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은 텅비고 공허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현시대의 우상숭배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나 다름없는 자신들만의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믿고 그들만의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웅덩이가 물을 가두지 못하고 터질 웅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공허한 마음을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것들로 채워서는 그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로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그 공허를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 세상의 문제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한창 그가 활동했을 때 그는 에게해 연안 국가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후반기에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황제가 살고 있는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를 방문한 다음 그들의 협력을 얻어 그 당시 땅 끝이라고 생각했던 스페인(서반아)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선교의 열정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열정을 하나님을 버려서 인생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스페인에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가 스페인에 대한 선교의 꿈을 키운 이유는 스페인이 유럽 대륙의 끝이요 당시 문명 세계의 가장 외곽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땅 끝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에 가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끝이 바로 스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또한 그 땅 끝인 스페인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된 우리들도 저 북방 얼음산과 저 남방 산호섬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 복음 증거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교회는 나눔선교재단을 설립하여 그 기초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전 생을 복음 선교를 위해서 산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의 역량을 다해서 복음 선교사역에 나서야 합니다.

스페인은 로마 제국에 탁월한 인재를 배출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 황제의 스승이요 스토아 철학의 대가였던 세네카, 세네카의 사위이자 유명한 서사시인이었던 루카누스, 당시 유명한 웅변가인 퀸틸리아누스 등이 모두 스페인 출신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최고의 지성들이 나온 나라, 스페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오랫동안의 꿈이었던 로마교회에 가서 세계의 중심부에 주님의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펄럭이게 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세계 방방곡곡에 교회를 세우고자 열망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처럼 우리도 선교의 꿈을 꿔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선교사를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미국으로부터 복음을 받았으니 우리가 다른 나라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교회는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정 가정이 선교헌금을 매월 한 번씩 꼭 드립니다. 매해 그 선교비의 액수를 올려 한 가정이 선교사 한 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파견한 안옥희 선교사는 필리핀에 가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활동하다가 암병까지 얻었으나 지금은 완쾌하여 다시 왕성하게 복음의 씨를 필리핀에 뿌리고 있습니다.

조영기 선교사는 이슬람 국가에 가서 생명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복음 전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눔선교재단이 앞으로 세계 각국에 선교사를 보낼 날이 있을 것을 기도하고 우리 모두 헌신적으로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또 바울은 스페인 선교에 대한 꿈만 가지고 그것만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선교를 준비하는 한편으로 다른 교회가 처한 곤경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에 기근이 극심하다는 보고를 들은 바울은 바로 로마로 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그들을 돕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헌금을 했는데, 바울은 그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의 평생 소원이 바로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선교를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루고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상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그에게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은 핍박과 배척의 피로 얼룩진 곳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기만 하면 체포하여 그를 처지하려는 율법주의자들이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성도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이방 교회에서 모금한 구제금으로 그들을 도와야 했기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바울에게 선교보다 더 큰 주님의 명령은 없었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형제들의 굶주림 문제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주님의 큰 명령이었기에 그는 선교를 잠시 중단하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입니다.

우리들도 복음 선교와 함께 우리 주변의 굶주린 이웃, 특히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 끊임없이 나서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하루에 백원씩 헌금하는 돼지저금통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해 북한을 돕는 운동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로마에 갈 때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29절)을 가지고 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무슨 구제금을 가지고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충만한 복’입니다.

이 복음의 특별한 축복은 세상을 살리는 생명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가정을 살리고 국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축복이 우리 성도들에게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만이 생명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철두철미한 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그대로 전한 참된 선지자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표현이 349회나 언급되고 있는데, 그 중 157회가 예레미야서에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가감없이 전하는 선지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말씀을 전하기보다 사람들을 의식하고 그들의 기분에 맞추어 듣기 좋아하는 소리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17장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먼저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3)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고 멸시를 당하게 되며 흙에 기록되니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누구에게 소망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이 결정되고 장래가 좌우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자의 특징은 삶의 여러 가지 문제와 환경으로 인하여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조급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소망 중에 사는 사람은 오늘 어떤 문제 때문에 절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시다.

또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입니다. 건강도 음식의 맛도 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좋은 물을 찾기 위해 세계가 야단입니다. 생수는 건강과 생명의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성경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며 썩은 물을 생수로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17장 14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나를 고치소서, 나를 구원하소서”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전인적인 치유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피난처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곳을 공간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만이 피난처임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심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목숨까지 각오하고 땅 끝인 스페인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의 선교 열정을 본 받아 온 정성을 다하여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