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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성령의 능력으로

관리자 2013-03-03 (일) 11:00 11년전 1214  

성령의 능력으로

 

고린도전서 2:1-5 

 

올해로 3.1 운동이 일어난 지 94주년이 되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은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시작되는 독립선언문을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낭독하며 독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삼일 만세운동은 한 번으로 끝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고, 해외의 동포들도 참여했습니다. 삼일운동에 참여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총칼 앞에 쓰러지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1920년까지도 계속 되었고 우리나라 외에 미국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간 동안 총 피해 집계는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 46948명, 불에 타버린 교회가 47동, 민가가 715동, 소학교 2동 등이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제일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은 교회와 목회자와 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집회를 교회와 교역자들이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당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일 정도로 기독교는 만세운동에 그 어떤 종교보다 앞장섰습니다.

그 때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을 하며 “저는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맨손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겁내어 총과 칼로 법석을 떨었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고 외쳤습니다.

삼일운동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적인 압박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의하고 나선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용기를 평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독립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에 한국교회는 그 어떤 단체보다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혹자는 삼일 만세운동과 같은 자주 독립운동이 어찌 기독교 운동이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삼일운동과 같은 민족운동은 우주론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과는 합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기에 하나님은 한 민족이라도 억압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민족이 외세로부터 독립하여 자주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민족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어떤 민족이 외세에 의해 주권과 문화를 상실해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침략자들에게 굴종하지 않고 민족적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3.1 운동은 한국 기독교가 나서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이기 때문에 성경적인 정당성이 확실합니다.

그 당시 기독교는 전 국민의 겨우 2% 밖에 되지 않아 아직 뿌리도 깊이 박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 어떤 종교보다 적극 참여하여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나 한국교회는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삼일운동에 교회가 적극 참여한 것이 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한국교회는 민족의 희망이요 등불로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민족의 문제에 교회가 나서야 합니다. 민족의 문제에 나서서 민족 간 평화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당연한 섭리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를 위해서 그의 평생을 쏟아 부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에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전생을 복음 전도 사역에 바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아덴에서의 전도에 실패했습니다. 아덴은 철학자들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바울은 철학적인 논증을 좋아하는 아덴 사람들을 만나 철학적 토론을 통해서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만 그 토론이 논쟁으로 그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이 철학적인 토론을 좋아하여 화려한 언변으로 복음을 전하였건만 웬일인지 그 능력 있는 십자가의 도는 거의 나타나지 않아 뒷맛이 씁쓸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떤 인물의 초상화에서 인물 주변의 온갖 아름다운 장식과 화려한 배색으로 인하여 인물은 퇴색하고 주변의 풍경이 더 부각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들 중에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는 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토요일에 그 교회 여집사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자신의 남편이 내일 교회 예배에 참석한다고 매우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알기로 그 남편은 일류 대학의 유명한 철학교수였습니다. 그 목사는 어떻게 설교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준비한 설교는 이성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는 설교인데, 이 설교를 했다가는 그 교수가 자신을 무식하다고 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 목사는 그 밤에 한잠도 못자고 철학서적을 여러 권 읽고는 철학적인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목사는 “이 설교를 들으면 놀라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배를 마치고 그 교수와 악수를 하는데 그 교수가 “목사님, 성경 말씀을 들으러 왔는데 철학 강의를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 목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부끄러워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지낸바 되었으나 3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끝 날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가지고 있는 폭발력은 이 세상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신앙이 아니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사실을 증거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진리는 추상적일 수가 없고 사변적일 수 없습니다. 이 구원의 도를 쉽고 분명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 전도 후에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절)고 말했습니다.

아덴에서의 실패 후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왔는데, 고린도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단순하게 전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도 아덴 못지않게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전함으로 큰 성과가 있어 고린도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만 순수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십자가와 부활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으로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전 인격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식의 면에서 석학이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고 명망가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신만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을 때에 두렵고 떨렸다고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엄청난 것이어서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고 자신감을 가질 수 없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복음 앞에서 두렵고 떨며 겸손하게 복음을 감당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유한 자들이 아니라 우리같이 부족한 자들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실력과 경험으로 사람을 어느 정도는 감동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구약의 선지자인 스가랴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는 지식과 언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였습니다.

그 때 고린도 교회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많은 지식들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기대해야 하는 것은 오직 성령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세상의 지식과 언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지하고 십자가의 도를 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무모한 것 같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언뜻 보아 세상의 지혜로는 어리석은 것 같아 무시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함으로 그의 선교활동은 크게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다른 모든 지식과 지혜의 방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올바로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주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국제 CCC를 창설한 빌 브라이트(Bill Bright) 박사는 열정적 복음 전도자로 특히 자신과 전 재산을 바쳐 복음을 전파한 목회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원래 촉망받는 사업가였습니다. 사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고 꽤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주님의 제자로 살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 자신 뿐 아니라 그의 전 재산을 주님께 드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로 계약서까지 작성, 큰 감동을 줬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1997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지는 그가 CCC 사역 뿐 아니라 1996년에 받은 템플턴상 상금과 은퇴연금까지 선교단체에 기부하고 은퇴 후에도 검소하게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은혜 있고 능력 있는 복음 전도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그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세상적인 삶에서 해방시키고 능력 있는 복음 전파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십자가의 체험, 부활의 능력뿐입니다.

전도자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길을 분명하게 증거하기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길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영적 진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도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증언하기를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했습니다.

즉, 세상의 어떤 뛰어난 지혜나 지식, 세상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전할 수도 없기 때문에 미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자가 전해주는 전도로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십자가의 체험이 필수인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십자가의 체험은 어떻게 옵니까?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성령의 역사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정말로 내 육신 속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아야 되고 체험해야 됩니다. 내 스스로 힘으로 살려고 하고 내 능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이며 타락이고 하나님 앞에서 허망한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열매를 맺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을 수 없는 죄악의 열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자신을 죽이고 성령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또 예수님과 연합하여 부활을 체험하는 체험 속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험 속에 바로 전도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3.1 독립운동이라는 큰 민족적 사역까지 감당하여 한국의 주류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때 생명을 바친 우리 믿음의 선열들의 뒤를 따라 오늘의 교회가 더 힘을 얻어 우리나라를 살리는 에너지가 되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당신들의 생명까지 바쳐 온 몸으로 증거했듯이 나라를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신앙에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고, 우리의 자녀와 이웃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와 부활은 은혜를 전해 나라를 바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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