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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28.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성령의 전으로서의 성도

관리자 2013-04-28 (일) 11:00 11년전 1250  

성령의 전으로서의 성도

 

고린도전서 3장 16-17

 

넬슨 만델라는 흑인 민권운동을 하다가 종신형을 받고 27년 동안 복역을 하다가 석방되어 남아프리카 대통령이 됨으로써 세계 인권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이 되어 클레르크 백인 정부와 협상으로 350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켰고 그것을 인정받아 1993년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참여 총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인종차별 정책에서 벗어난 흑인들은 지금까지 백인 정부에서 부르던 국가(國歌)를 바꾸기를 원했습니다.

백인들이 만든 흑인차별법을 없앤 것처럼 백인들이 만든 국가를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흑인차별법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은 흑인들은 아프리카 민족회의를 개최하는데 백인들이 만든 국가 대신 흑인이 만든 국가를 부르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새로 취임한 만델라 대통령이 참석하기 위해 입장했습니다. 회의를 전행하기에 앞서 사회자는 대통령께 국가를 변경해서 부르기로 했다고 보고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대통령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만델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전 여러분과 생각이 다릅니다. 지금까지 불러온 국가는 오랫동안 백인들이 불러왔습니다.

그렇다고 그 국가를 없애고 흑인들만의 국가를 부른다면 우리들은 백인들처럼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백인들만의 나라가 아니듯 흑인들만의 나라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나라를 위한답시고 국가를 바꾼다면 미래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걸어가야 할 길 즉, 백인들과 흑인들의 화합하는 길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만델라 대통령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델라 대통령은 국가 공식 행사에 백인과 흑인이 모두 좋아하는 전통악기로 음악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만델라는 역시 평화의 사람답게 골이 깊은 양진영을 화해시켰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넬슨 만델라는 세계 인류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갈등과 긴장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를 일구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어디를 가나 갈등을 만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유오디아와 순두개 같은 여인들이 바로 그런 이들입니다.

이들은 상당한 집안의 재력이 있는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도 아주 잘 섬기는 이들인데, 결국 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에 이들의 일생을 단 한 줄, 즉 ‘불화의 주역들’로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일생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될 때 무엇이라고 기록되기를 원합니까?

유오디아와 순두개는 평화의 파괴자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글레맨드는(빌4:3)는 평화를 만든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생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라고 기록될 수 있겠습니까?

호사류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인사류명)이라고 했습니다. 즉,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죽어 어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인류 최초로 유산균을 발견하여 인류의 삶을 기름지게한 파스퇴르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대의 하사관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제대 후에는 고향에서 조그만 피혁가게를 운영하며 자식을 키웠습니다.

전쟁 터의 참혹함, 잔혹한 기억들을 뼈 속 깊이 간직한 그는 그의 아들 어린 시절부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쉬지 않고 일러주고 다짐받고 깨우쳤습니다.

“얘야 너는 자라서 인류 복지에 기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거라.” 그 반대말은 “너는 살아가는 동안 사람을 해치고 괴롭히는 일에는 결단코 종사하지 말아라”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의 복지에 기여하는 일을 너무도 많이 성취하고 또 성취할 파스퇴르 연구소를 남기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미리 맞는 예방 접종의 원리를 발견하여 준 그의 덕택으로 지금은 각종 백신의 덕을 누릴 수 있습니다.

파리에 가면 그의 연구소가 소재하는 거리의 이름이 ‘파스퇴르 가(街)’입니다. 그는 이름을 잘 남긴 것입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16절).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있기 때문에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이란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위엄을 갖추시고 구름가운데서 강림하사 임재하시는 지성소 안의 속죄소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기에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을 지극히 거룩하고 영화로운 곳으로 여겼습니다.

성전이 거룩하고 영화로운 곳이기에 당연히 이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끊어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더럽힌 자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고(레15:31),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추방되는 형벌이(민19:20) 가해졌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몸이 이렇게 거룩하고 영화로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우리 몸이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기도 하고, 우리가 모인 교회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기도 합니다. 성전이란 무엇입니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에서 성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었습니다.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의 성전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그 안에 십계명 돌판을 담은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의 뚜껑을 속죄소라 불렀는데, 그 위에 두 그룹(천사)이 날개를 펴고 마주한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 두 천사가 마주보고 있는 그 중앙에 ”쉐키나“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 계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로 오면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전의 모형이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로 가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성전이라고 증거할 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몸, 그리고 그분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도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으로서의 우리 몸과 교회의 특징과 사명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 몸과 우리가 모인 교회는 무엇보다도 거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과 교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

둘째, 성전으로서의 우리의 몸과 교회는 또한 예배자와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전일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5).

셋째,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신자들의 모임에 불신자들이 참석할 때, 그들은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건물을 성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믿는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을 더럽히면 안 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분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문란케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고 경고했던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더럽히다’는 것은 ‘포테이로’로서 여자가 정조를 잃고 더럽힘을 당한 것을 말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혼인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혼인한 여인은 그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몸가짐을 삼가 정결하게 하며 또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생명도 불사하는 법입니다.

우리나라의 여인들은 예부터 자기의 순결성을 생명처럼 알았습니다. 특별히 성춘향은 여인의 정절의 상징입니다.

사랑하는 이도령이 한양으로 간 다음 도무지 연락이 없었는데, 새로 부임한 변사또가 갖은 방법으로 그녀를 회유와 협박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고문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지만 굽히지 않고 정조를 지켰습니다.이것이 우리나라 여인들의 정조관념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요사이 남녀의 정조관념이 희박해져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성적인 타락은 가히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난 번 우리나라 국회에 차별금지 법안이 국회법사위에 상정되었습니다. 그 법의 핵심은 동성애, 동성혼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이 법은 유엔인권헌장에 있는 모든 차별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근거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인간은 그 누구나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며, 동성애자나 동성혼자도 하나의 인간으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성애와 동성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보았을 때 ‘틀린 것’으로서 인정을 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올바론 혼인제도에 비추어 교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에 의하면 동성애자나 동성혼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가르치면 벌금이 가해집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가정 질서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안에 반대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가정을 살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세우는 신앙적인 일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열처녀 비유의 핵심은 신랑을 맞이하려는 처녀들의 준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믿음으로 주의 재림을 준비한 것입니다.

오직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핵심은 우리가 주님에 대한 정절이 먼저 준비되어야 합니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에서 신앙의 정조를 꺾고 더럽힌 사람은 주님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조금이라도 더럽힌 사람 또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자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성전으로서 거룩하게 살고 있습니까? 순결하게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 드릴 거룩한 산제물을 드리고 있습니까?

1세기 말에 안디옥 교회의 이그나티우스는 “신앙의 정절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썩어질 것과 바꾸는 자는 결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모신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제자답게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디서나 평화를 도모해야 합니다. 정결하게 평화를 도모하는 모습이 바로 한국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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