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0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그리스도의 일꾼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3.06.02.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그리스도의 일꾼

관리자 2013-06-02 (일) 11:00 10년전 1212  

그리스도의 일꾼

 

고린도전서 4장 1-5절

  

지금 우리는 넷 사(四)자에, 포기할 포(抛)자를 써서 ‘사포시대,’ 즉 4가지를 포기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김포시대’입니다. 이것은 김장을 포기하고 사는 시대를 말합니다. 지금은 주문자 중심의 홈쇼핑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홈쇼핑 채널을 보고 김장 김치를 주문해서 먹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명’에서의 사(使)자를 써서 ‘사포시대’입니다. 이것은 사명을 포기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제는 사명에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 신앙생활을 해가고 있습니다.

셋째는 ‘혼포시대’입니다. 이 말은 혼인을 포기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마지막으로 ‘생포시대’입니다. 이 말은 생명을 포기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루에 43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자살 바이러스가 암보다 더 무섭게 우리 사회에 퍼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현대는 기존의 가치가 완전히 뒤흔들려 사람들이 안정감을 잃고 혼란에 빠지기 쉬운 시대입니다. 안정감이 없고 불안이 사회 전반에 늘 깔려 있기 때문에 사명에 따라 사는 이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는 기술 및 산업이 놀랍도록 발전하여 우리의 생활이 편리해지고 모든 생활이 합리화 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스마트폰에 노예가 된 현대인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압도당해 과학기술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최첨단 과학기술로 인해 인간은 전례가 없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술이나 제도를 다스리고 부리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제도가 인간을 부리고 인간은 그것들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모든 것을 신속화, 기계화, 자동화, 물량화, 규격화, 대중화 하곤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 인간 또한 기계화, 물량화, 규격화 되기 쉬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은 신속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속화 때문에 우리 인간은 시간을 두고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라는 것을 반성할 여유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과학은 또한 규격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규격화 때문에 인간도 필요에 따라 어떤 규격 속에 맞추어 찍어내거나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처럼 취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은 또한 대중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런 대중화 때문에 인간은 광고의 노예가 되어 결국 창의성을 상실하고 철저히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대량생산 라인의 한 공정에 부속되어 기계적으로 노동을 함으로써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습성이 사라졌고,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조차도 자기수양이나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일 속에서 자아를 실현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술과 마약에 취해 자기를 광적인 흥분으로 몰아가 보지만 그 내면에는 항상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내면의 불안감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환락에 취해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인의 실상을 바로 보고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참된 생명의 복음을 전해 현대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꾼이긴 하되 다른 일꾼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참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으로 온 세상을 생명의 나라로 바꾸어가는데 헌신하는 일꾼된 자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절)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확고히 뿌리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라 바울의 일꾼, 아볼로의 일꾼, 베드로의 일꾼 등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들 또한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를 섬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불러달라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의 한 파당의 지도자로, 즉 파워가 있는 한 정파의 지도자로 생각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냥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생각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일꾼이란 헬라어로 ‘휘페레테스’로서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말합니다.

노예가 어떤 사람인지는 영화에서 여러분이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한 번 배의 밑바닥에서 발목이 쇠사슬에 묶여 선장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노를 젓는 노예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들에게 있는 자유라고는 오직 선장의 명령에 복종할 자유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로봇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노예와 같은 일꾼이라고 자신을 표현한 것은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노예가 아닙니다.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하는 모습이 노예의 본분이라서 그 노예의 모습을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투영한 것입니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그럼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노예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구원의 방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절대로 순종할 것 밖에 없습니다.

바울에게서 볼 수 있듯이 실로 주의 사역자는 그리스도에게 띠 띠우고(요21:18) 종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사역자는 결코 성도들의 종으로 자신을 규정하면 안 됩니다. 일차적으로 주의 종이지 결코 사람들의 종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목회자를 자기에게 속한 일꾼으로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 또한 힘 있는 성도들의 말만 들고 그들의 눈치만을 보아서도 안 됩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주님의 종임을 알고 주님의 뜻에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들 또한 그의 주인은 목회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와 목회자를 존경하여 ‘우리 교회,’ ‘우리 목사님’이 늘 입에 배어 있습니다.

교회와 담임목회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측면에서는 좋은 데 잘못하면 그것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고 하나된 보이지 않는 교회와 최고의 목회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근본적으로 사랑해야 함에도 자기 교회와 자기 목회자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특정 교회의 특정 목회자에게 종속될 수 없습니다. 성도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담임목회자의 말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비밀이란 복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비결’과 같은 말로서 이방 종교의 신비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이 비밀, 즉 비결은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만 비밀리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은 그 비결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맡은 자’라는 말은 ‘청지기’로 번역되는 말로서, ‘집을 책임지고 다스리는 자’란 뜻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며 그 자녀들을 학교에 데리고 다니며 돌봐주고 노예관계 등의 일을 처리했습니다.

청지기도 역시 노예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노예 중의 노예로서 주인의 명령을 위임받아 노예를 책임지는 책임자이며, 가정의 대소사 또한 일정한 범위 내에서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사역자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전수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비밀스런 복음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책임을 맡은 자입니다.

정말로 큰 축복을 받은 자이며, 참 존귀한 존재입니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계된 대소사를 책임지고 일하는 자이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입니다.

목회자는 주님 앞에서는 성도들과 똑같지만 맡은 일이 그들과 다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과는 달리 주인의 비밀, 즉 복음을 맡아 일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역자들을 존경하되 배나 존경할 자(딤전 5:17)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자 또한 주님의 노예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절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노예는 자신의 일을 돌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도 자기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직 주인의 일만 해야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신부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사역에만 전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해 부부가 함께 사역합니다.

기독교의 목회자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전념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이 있는 것을 주님의 일에 전념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자식이 목회자를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는 아내와 자녀의 도움을 받아 더욱 더 주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아내와 자녀가 있는 것이 결코 주님의 일에 전념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회자는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약 목회자가 자기의 일을 돌보려면 그 사역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에게는 오직 충성만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는다면 성직자의 일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목회자가 순종하지 않고, 충성하지 않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성도들에 대해 권위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성직자는 오직 충성과 순종만 해야 합니다. 그가 맡은 일은 존귀한 일이지만 노예로서의 목회자는 오직 충성과 순종을 하고는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고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과 헬라 학문에 능통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모르는 바울을 별 것 아닌 것으로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아마 이들은 아볼로파에 속한 자들 같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말재간이 없고, 말이 어눌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볼로가 철학과 수사학 그리고 성경 지식과 언변에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볼로에 비교하면 바울은 너무 말주변이 없었습니다(고후11:6). 그리고 바울은 철학이나 학문적인 것으로 아덴에서 전도하였으나 실패한 후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고전2:2),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하니까 무식하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사역자를 자기들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은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교회에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이는 오직 주님뿐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4절).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정확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판단은 부정확하고, 오류가 있고, 실수가 있으며, 왜곡되어 있고, 아전인수격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을 판단한다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판단만이 정확하니까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치를 볼 것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만이 정확히 판단하십니다.

우리에 대해 사람들이 나름대로 판단하여 이러쿵저러쿵 합니다. 우리는 남의 판단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남이 우리를 나쁘게 평가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부끄럼이 없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하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