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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4.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개천에서 용난다

관리자 2013-02-24 (일) 11:00 11년전 1014  

개천에서 용난다

 

고린도전서 1:26-31

 

어떤 사람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무능력했고, 자신의 이름만 겨우 쓸 줄 아는 사실상 문맹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어머니는 그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준 자애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9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새어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다행히도 새어머니는 친자식처럼 그를 사랑해 주셨고 그의 재능을 알아보시고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문맹이었지만 재미있게 말을 하는 이야기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로부터 말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어머니로부터는 신앙교육과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배웠습니다.

그는 뱃사공 점원, 장사꾼, 우체부, 출장기사 등을 거쳐 마침내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주의회의원과 주상원의원을 거쳐 1860년 11월에 미국 제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세계 정치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에이브라함 링컨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보면 그가 어떻게 해서 그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위대하데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개천에서 난 용입니다.

2011년 6월 MBC에서 <개천에서 용 찾기>라는 제목으로 짧은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 부모님 세대는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고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공부시켰습니다.

그 시절 가난하게 살기 싫다던 청춘들이 공부 혹은 사업으로 자수성가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났다'라며 본보기로 삼고, 그들처럼 성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20세기를 지나 어느새 21세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한국은 OECD 회원국이 되었고, 얼마 전에는 G20 의장국이 될 정도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가난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너무 변해버린 걸까요?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이 났습니다. 1950년대 이전에 한국은 어수선한 해방정국을 맞이합니다. 사회는 좌와 우로 나뉘어 대립했으며, 깊게 팬 이념 갈등으로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경험합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국은 초토화되었습니다. 기간시설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전쟁고아와 과부가 넘쳐났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큰 시련을 겪은 한국은 1960~1970년대를 거치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정책으로 외화를 벌어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급성장에 따른 폐해도 뒤따랐습니다. 노동자를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풍토가 조성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정권은 폭력으로 국민을 억압하며 공포를 조장했습니다.

어려운 시절, 한국 사회에서 부모의 희생으로 용이 나오는 일은 적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거쳤지만 학업에 힘을 쏟아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과 사업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 사법시험을 통과하여 변호사가 되었다가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 된 고 노무현 대통령도 그중에 한 사람입니다.

1980년대 학업 신화, 즉 어려움 속에서도 공부에 매진함으로 영광을 누린 사람들의 미담이 뉴스에 곧잘 소개되곤 했습니다. 이후 1990년대에도 신화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학생들은 사법고시생의 합격수기, 명문대 입학수기(특히 서울대)를 읽고 희망을 키웠습니다. 그 때문인지 사법고시 합격자 발표일이나 대학입시 합격자 발표일이면 뉴스에선 '개천에서 용이 된' 사람들을 찾아 보도하곤 했습니다. 과외를 받지 않고 교과서로만 공부해서 서울대에 수석 합격했다는 신화가 해마다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요사이 개천에서 용 나는 신화가 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출발선이 달라진 사회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외를 받지 않고 자력으로 명문대에 합격하는 '학력 신화'가 깨진 원인은, 소위 스카이(SKY)라고 부르는 대학 입학생들의 대부분이 부모의 재력을 바탕으로 공부한 명문 고등학교 출신들이라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같은 출발선에서 공부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선행 교육을 받고 출발하는 부잣집 아이와 과외는 고사하고 밥걱정을 해야 하는 학생 사이에 경제적 간격이 너무나 커져 버렸습니다.

동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바람직한 경쟁은 발전을 이끌 수 있지만, 엄청난 차이를 시작점으로 하는 불평등한 경쟁은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하며 희망 없는 사회를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곧 발전과는 거리가 먼, 사회적 정체와 양극화를 촉발합니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힘든 요즘에도 불구하고 개천에서 용 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그 방법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개천에서 용이 나는 가문을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나님의 신비스런 경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아름답게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소개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26절).

고린도 교회를 포함하여 그 당시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지혜로운 자도 아니었고, 능력이 있는 자도 아니었으며, 문벌이 좋은 자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이었으며 ‘세상의 약한 것들’이었습니다. 즉, 학식과 명예, 그리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무지렁이들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무지렁이와 다름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27절).

초대교회에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덴의 관리였던 디오누시오(행17:34), 그레데 지방의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행13:6-12), 그리고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지방의 귀부인들(행17:4, 12), 고린도의 재무관 에라스도(롬16:23) 등이 바로 신분이 높고 지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대부분은 신분이 낮은 비천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AD 178년경 셀서스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지독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저들의 집에 가보라 양털깎이, 제화공, 세탁업자와 같은 비천한 자들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박쥐 같은 무리 혹은 집에서 기어나오는 매미, 늪 둘레에서 토론을 하는 개구리, 시궁창 모퉁이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있는 벌레와 같은 자들이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형편없는 자들로 치부되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경계와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대개 신분이 높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신분이 낮은 교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노예들입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에 약 6만명 정도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법적으로 노예는 살아 있는 도구로서 물건이지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늙은 노예를 못 쓰게 된 연장처럼 보고 버렸습니다. 주인은 노예을 마음대로 고문할 수 있었고 노리개로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또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또 노예들은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해도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주인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고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형제자매임을 증거하고 노예들 또한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동등하게 누려야할 존엄한 존재로 대우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는 주인도 죄인임을 가르쳤고, 하나님 앞에서는 노예도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우리 기독교는 인간의 가치를 최고로 존중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존중하는 종교로서, 어떠한 차별도 용인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고 그 어떤 차별도 인정하지 않기에 기독교는 구한말 신분차별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일반 백성들의 마음에 쉽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 왔을 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바로 그 당시 사회에서 천대 받던 부녀자들과 노동자, 농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분사회 속에서 차별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그 신분사회를 벗어날 수 없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절망 속에 빠졌있었습니다.

그 때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들어온 것입니다. 억눌린 사람들은 기독교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기독교에 귀의하였습니다.

독립신문을 만들어 우리나라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킨 서재필 박사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갑신정변을 일으켜 일가족이 멸족당하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미국으로 밀항하여 그곳에서 기독교로 귀의하고 의학공부를 하여 미국 의사가 되어 미국에서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게 억압과 착취를 받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미국에서의 의사를 포기하고 고국에 돌아와 독립운동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그는 패가망신하였지만 예수를 믿어 새로운 사람으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고 성령의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불트만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죄는 자기 주장 혹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약함과 지혜없음, 무능함, 그리고 무력함을 알 때 그를 쓰십니다. 좋은 가문, 높은 학문, 좋은 배경이 있는 사람은 결코 자기 부족과 무능함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은 쓰시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를 쓰시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먼저, 우리 주님은 지혜이십니다. 헬라 사람들의 지혜는 철학입니다. 그 철학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십자가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혜는 바로 그 철학자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에게 참 지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지혜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주님께 순종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 주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바울 사도가 쓴 ‘의’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는 의로움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신칭의’라고,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는 의로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의로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은 거룩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과 함께 걸어 갈 때만이 우리는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항상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찬송가 430장).

우리 주님과 함께 걸어갈 때 주님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유명한 철인인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은 눈이 아프면 안과의사를, 이가 아프면 치과의사를 찾는데 영혼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에게는 결코 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을 과거의 죄로부터, 현재의 무능함으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장래의 공포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내 죄로부터, 내 악한 습관으로부터, 세상의 악한 사상으로부터 해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고 지식적으로 부족하고 배경이 없어도 우리 주님이 쓰시면 귀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붙잡힘을 받는다면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과 같이 위대하게 쓰임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분이 낮아도, 지혜가 없어도, 능력이 없어도 신앙 안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런 나약함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할지라도 그 나약함을 들어 영화롭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역사에 귀히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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