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십자가의 도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3.02.1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십자가의 도

관리자 2013-02-17 (일) 11:00 11년전 1073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8-25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고향 선배가 기독교를 폄하하는 말을 듣고 분노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선배는 우리 마을에서 공부가 뛰어나고 장래성이 있는 형으로서 평소 우리가 존경하며 따르고 있었는데 그 형이 후배 몇 사람 앞에서 기독교를 별 것이 아닌 종교로 폄하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어찌 할 것이 없어서 교회에 다니느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신에게 가서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것인데, 남자가 어찌 그렇게 허약하느냐? 젊은 놈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를 개척해야지. 성경과 찬송가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한심하다.“

그 말은 어린 청소년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서 그 말을 듣고 친구들 가운데 교회 출입을 끊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형이 보기에 기독교는 한심한 이들이나 믿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수십년 후 그 형을 만났는데, 그 형은 회사를 퇴직하고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저에게 “전목사의 활동을 지켜 보았는데, 참으로 자랑스럽더구만. 나는 얼마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있다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주님이 활동하시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겉옷을 벗어 길 위에 깔고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도다”고 외치며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억압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해 줄 것을 기대하며 당대의 슈퍼스타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뜨겁게 환영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던 그 군중들은 돌변하여 주님께 돌을 던집니다. 호산나를 목청껏 외쳤던 그 입으로 이제는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죽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각자가 바라는 기대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이유로, 이런저런 세속적인 이유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십자가 처형을 외치는 군중들의 비정한 얼굴에서 인간의 영악함과 간사함을 봅니다.

자신의 이익에 배치된다 하여 한순간 너무나 쉽게 모든 것을 저버리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탓하며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모습 속에서, 그날 예루살렘 군중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수의 사람이 원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옳게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장 손에 잡히는 세속적 의미의 성공이나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고 소수의 사람만 혜택을 보는 그런 이기적인 길이 아니라, 조금은 둘러가고 더디게 가며 설령 세상 사람 모두가 어리석다고 말을 해도, 참되고 옳은 길, 진심으로 모든 이를 살리는 길을 걸어가야 함을 당신이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그 어리석음의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세상이 보기에 가장 어리석고 힘없어 보였던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힘이었고 지혜였고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 수난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불편하고 힘들고 어리석어 보여도, 참된 자유 진정한 행복 그리고 모두 함께 주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기독교를 세상의 지혜를 기준으로 판단하여 미련하고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사항인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헬라인과 유대인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거의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철학적 사고와 수사학과 웅변술을 기초로 한 언변을 최고의 지혜로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고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도는 철학적 가치도 없고 기적도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을 가치 없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혜로운 자 같으나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미련하다’란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비상식적인 것 같고 비합리적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멸망할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 받을 사람들은 결코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당시 화려한 헬라 문명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신화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도는 그들의 불신을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뿐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도를 불신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첫째, 예수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목수의 아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그 천한 사람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하고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비웃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일평생 동안 집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험한 인생을 산 예수가 무슨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셋째, 그들은 이스라엘만이 선민이고 구원받을 수 있는데 어떻게 만민의 구주로 메시야가 올 수 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한 때는 예수가 혹시 메시야인가도 생각했는데 죄인들의 사형 기구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그들의 기대가 산산조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도를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의 생각은 인간적이요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예수의 그 위대한 십자가의 지혜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의 한계성과 미련함에 대해 말했습니다.

 

제가 어려서 고향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는데, 강사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교했습니다.

그때 후에 장로가 되신 집사님이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이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을 수가 있어? 세상에 어떻게 교회에서 저런 거짓말을 할 수 있어?”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 집사님을 믿음이 있는 분으로 알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때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적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세상적인 지혜만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메시야이십니다. 어찌 그분에게 불가능한 것이 있겠습니까? 세상적인 지혜로는 기독교 진리를 알지 못하며 세상 지혜로는 믿음이 무익하기 짝이 없습니다.

설교 서두에 말씀드렸던 그 선배는 학교 공부에는 우수한 사람이었지만 예수를 믿는 이들이 나약하다고 비난했던 것으로 보아 그 선배의 우수성은 오히려 멸망하는 지혜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예수를 믿고 저를 만나 미안해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 지혜를 초월한 하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늘의 지혜를 알아 일찍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보다 큰 축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십자가의 도가 ....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란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실로 수치와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메시야를 정치적인 메시야로 고대하던 유대인들에게는 허탈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철학적 지식에 능한 헬라인들에게는 참으로 미련한 말로 밖에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십자가의 사건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와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세미한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듯이 우리의 심령의 한가운데서 고요하게 역사하는 성령의 강한 내적 감동을 통해 우리는 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다가 성경에 나오는 십자가를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똑같은 십자가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십자가가 더 풍성하고 깊이 있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더 명확하고 풍성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십자가에 대하여 묵상하다 보면 일곱 가지 관점에서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밑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이 십자가를 지켜보며 비웃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무시하며 비웃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보는 십자가는 ‘어리석음’입니다.

 

두 번째는 ‘위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잔인한 십자가를 허락하셨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는 ‘매달려서 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십자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닫게 됩니다.

 

네 번째는 ‘옆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옆에 매달려 있다가 회개하고 구원 받은 ‘강도의 입장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소망 없는 죄인들에게 얼마나 큰 은혜의 선물이 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내 속에서 본 십자가’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자기 부인의 삶으로 인도하는지’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2,000년 전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나의 삶 속에서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여섯 번째는 ‘지고 가면서 본 십자가’ 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를 감상하는 자리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섬김과 희생의 자리’로 나아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세상 속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세상 속에서 증거 되어야 함을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도 헬라인들처럼 지식으로, 또는 유대인들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적으로 신앙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위에서 말한 십자가는 모두 다 어리석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음이자 수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과 수치를 들어 쓰셔서 구원의 역사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십자가의 이 어리석음을 구현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삶 속에 구현하지 못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물질적 축복이나 질병의 치유 등에 집착하곤 합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잘하니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질병에서 회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너무 기대하고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모르면 안 됩니다.

이 구원의 진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물밀듯 일어나 그 사랑이 나를 인도하게 됩니다.

 

미국 뉴욕의 짐 심발라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터버너클 교회에서는 예배에서 먼저 전교인들이 “성령이여 임하소서”하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은혜스럽다고 합니다. 성령의 임재로 전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같이 우리 교회도 성령의 임재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화가 없이 우리가 믿음이 전해지기 어렵습니다. 그냥 교회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긴장된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 우리들의 예배가 하나님이 흠향하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