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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신앙 고백적인 삶

관리자 2013-11-03 (일) 11:00 10년전 1138  

신앙 고백적인 삶

 

 

고린도전서 12장 1-3절

 

우리가 서울에서 제일 높은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높은 빌딩들이 보입니다. 요사이는 공해와 운무 때문에 그것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먼저 태양빛을 바라보다가 사방을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강렬한 태양빛에 의해 우리 눈이 영향을 받아 잠시 우리 눈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적인 것들을 멀리하고 영적인 것들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즉, 세상적인 것들에는 눈이 멀고, 영적인 것들에는 눈이 떠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세상적인 것들에 눈이 멀게 될까요? 태양을 보면 눈이 멀듯,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세상 것에 눈이 멀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십자가에 당신을 못 박는 원수들까지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세상의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에는 물질과 지위와 권세가 그렇게 귀하게 보였지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본 후로는 그런 것이 귀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의 삶을 바라본 후에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영적인 것만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의 눈에는 오직 십자가의 밝은 빛만이 그 심령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마땅히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챈트니는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5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보편적인 일입니다. 보편적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원받은 모든 자들은 모두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영구적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한 번만 지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의지적인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넷째,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고통당하신 것과 같이 봉사할 때도 몸이 아프도록 일해야 하고 내가 즐길 수 있는 시간도 드려서 수고해야 하고 쾌락에 쓸 수 있는 돈도 남을 위해 사용하는 손해도 맛보아야 합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곧 죽음입니다. 자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쾌락, 자기 욕심, 자기 이익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백 년 동안 아무리 부귀영화를 다 누리면서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비하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 우리 이웃이 영생을 누리게 하는 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3절)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바로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힘만으로 세상의 그 좋은 물질과 명예와 권력보다 예수를 더 좋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령이 함께 해야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기도할 때 반드시 이단자나 배교자에 대한 저주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예수도 저주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율법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저주스러운 형벌인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당한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를 저주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17년 전 여름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저는 택시를 타고 히브리 대학까지 갔습니다. 택시를 타면서 그 택시 기사에게 예수를 전도하다가 저는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제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사가 그만 택시를 길가에 세우고 내리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당황해서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장기간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에게 물어보니, 유대인들은 예수를 저주 받은 자로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예수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은 저주 받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저는 히브리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 이렇게 영적으로 눈이 어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저주하도록 만들었고, 만일 저주하지 않으면 유대교에서 파문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전에 자기가 기독교 신자를 박해하고 있을 때의 일을 아그립바왕에게 말하면서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행한 일들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행26:11).

유대교인으로서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온 정성을 다하여 박해하였습니다. 유대교인들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반감은 이루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인으로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자자손손 믿어 왔던 유대교에서 파문당하는 것은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고, 유대인 사회에서 매장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 어떤 종교를 믿건 그것은 한 개인의 선택의 문제이지, 한 종교를 선택했다고 해서 우리나라 사회에서 축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대 사회는 달랐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죽음을 감수하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정부로부터 예수를 저주하지 않아 죽던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저주하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기독교 박해로 유명한 트라얀 황제 때 비두기아 총독 폴리나는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저주하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이 체포되어 지방 총독 스트라데우스 크라드라투스로부터 “가이사를 신이라고 맹세하고, 그리스도를 모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폴리갑 감독은 “지금까지 86년 동안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섬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한 번도 상심케 하지 않으셨소. 나를 구원해 주신 왕을 내가 어찌 모독할 수 있겠소?“라고 말했습니다.

폴리갑의 이런 말은 성령께서 그의 마음 속에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헬라어로는 ‘키리오스’입니다.

로마 당국은 가이사를 키리오스라고 부르도록 강요했습니다. 즉, 로마 황제를 주님이라고 강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만을 주라고 고백하면서 순교까지 했습니다.

‘예수는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기 생에 있어서 최고의 충성과 최고의 경외심을 예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 선생은 본래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바리새인 출신으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석학이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명문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성장해서 그는 관원이 될 정도로 장래가 촉망받는 지도자였습니다. 거기에다가 유대교 신앙에도 정통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따르는 예루살렘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였던 스데반을 처형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제사장의 위임장을 받아 기독교 신자를 결박할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들어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와 같이 학문에 통달한 사람이 그의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린 것은 그가 만난 예수를 주님으로, 그의 왕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이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의식이 있습니다. 내 의식을 조정하고, 생각을 지도하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아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혼이라고 합니다. 자아나 영혼이 있기에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도 반드시 ‘나’라고 하는 것, 즉 영혼이 있습니다. 영혼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영혼은 우리 인간의 육신이 죽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없어지겠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있겠습니까?

과학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과학에서 물질이라는 것은 그 모양이 변하지만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신도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썩어서 화학적으로 변화할 뿐이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속사람인 영혼은 육신이 죽었다고 없어질까요? 결코 영혼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도 우리의 깊은 곳에 영혼이 있습니다. 이 영혼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바로 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은 바로 생명되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영혼을 구원할 방법이 없습니다.

존 맥닐 박사는 목회자 모임에서, 곧 급행열차가 지나갈 기찻길에서 술에 취해 깊이 잠들어 버린 사람을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 준 다음 참석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선뜻 대답했습니다.

“그를 기찻길에서 끌어내야 할 것입니다. 곱게 다룰 수는 없겠죠. 아마 불러서 걸어 나오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거칠게 움켜쥐고 질질 끌어내다가 마침내 지쳐서 그 옆에 앉아 있게 되더라도 온 힘을 다해 끌어낼 겁니다.”

맥닐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 상태가 바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모든 영혼들의 상태입니다. 기차선로에서 쓰러져 잠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 열차는 이제 곧 당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기독교 첫번째 황제였던 콘스탄틴 황제는 그의 대적 막센티우스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교외 다리 위에서 일전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 싸움이 있기 전날 밤에 콘스탄틴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큰 십자가를 보았는데 그 위에 승리의 깃발이 펄럭였습니다.

그는 그 환상을 본 후 십자가의 깃발을 만들어 그 기를 들고 나가 싸워 승리한 다음 로마의 온전한 황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는 그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하고 그리스도께 굴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깃발 아래에서만 세상의 모든 죄와 세상의 권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승리의 깃발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전 인류에게 소망의 줄을 던져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절망 속에서 헤매이는 인간들에게 소망의 줄을 던져 주었습니다.

십자가 뒤에는 분명 부활의 아침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된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우리는 항상 주님만을 바라보는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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