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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5.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포로가 된 자유인

관리자 2013-08-25 (일) 11:00 10년전 1159  

포로가 된 자유인

고린도전서 9장 1-14절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창시자인 칼 마르크스는 독립 변호사로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자였으며,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성격은 교양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본 대학에서 유행하였던 반항적인 문학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술꾼이었으며, 걸리는 그 누구와도 싸우는 무절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반골이었으며, 반항적인 기질이 강한 완고한 성격을 가졌으며, 그런 성격 때문에 마음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그는 극도로 욕심이 강해 늘 1인자가 되고 싶었고, 2인자가 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 남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지적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기 말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면 아주 작은 것마저 자신을 위해 배려했으며, 타인에 대해서는 그들을 경멸하고 혐오하였고 불신하였습니다.

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로서 타인과 어울리지 못했음에도 민중의 해방을 외쳤습니다. 민중과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데 민중의 해방을 외친 것입니다.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이 극도로 독선적이며 배타적이고 부정적이고 투쟁적이며 증오심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해 기독교를 세계화 시킨 사도 바울도 본래는 마르크스처럼 독선적이었고 증오심에 가득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의 귀족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바리새인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유대의 최고 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공부했기 때문에 유대교에 매우 정통했으며, 유대교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심 때문에 그는 그 당시 아직 기독교가 유대 사회에서 인정 받기 전에 교회를 핍박하여 스데반을 즉결심판으로 죽였습니다.

그런 그가 기독교인들을 처치할 권세를 얻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전 인생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수호해야 할 책임을 진 젊은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 결국 그는 유대 율법과 유대 전통에 매인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쳐 유대교의 노예가 되어 버린 그는 초대교회 평신도 지도자인 스데반을 죽이는데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하여 다메섹으로 가서 숨죽이고 숨어 있는 신자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군사들을 데리고 원정을 갔을 정도로 그는 율법과 전통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를 만난 후 그리스도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가 방종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나 도리어 그리스도 예수께는 매인 사람들입니다. 즉 우리는 예수의 복음에 붙잡힌 복음의 포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는 포로지만 이 세상 그 무엇으로부터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자유는 무한한 자유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어떠한 것일까요?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해 루터는 “크리스찬은 가장 자유하다. 세상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은 가장 충성스러운 종이다. 세상 누구에게나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크리스찬의 자유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를 허락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자유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식의 면허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책임이 수반된 자유를 갖고 사는 것이 크리스찬입니다. 사랑이 뒤따르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란 12사도처럼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임명받았거나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직접 사도로 임명 받지도 않았으며, 부활도 목격하지 못했기에 사도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도라는 말을 매우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도의 의미를 넓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말씀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구원받았으니 이것이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증거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사도로서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또한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증거한 사도로서 교회에 대해 여러가지 권리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해 애를 썼으니, 고린도 교회가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해 일을 했으니, 적어도 고린도 교회가 그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은 기본적인 도리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신명기 말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신25:4)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농사를 짓는 소가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사역자 또한 교회를 위하여 일을 했으니 교회로부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즉, 교회는 교역자를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또한 당연히 고린도 교인들의 부양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천막제조기술을 배워, 같은 기술을 가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동역을 했습니다.

바울은 전혀 교인들에게 생활비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일하면서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 당시 아직 교회가 굳건히 서지 못한 어린 교회였을지라도 다른 사도들은 아내와 함께 다니면서 교회 사역을 하면서 교회의 부양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부양 받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12절).

바울은 그 당시 성도들이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의무조차도 복음 전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생활비마저도 사양하고 스스로 일해서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세상 모든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가정도 없었습니다. 결혼하지 않았거나, 또는 오직 복음으로만 사니까 아내와 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사람에게 가정은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직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이마저 포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까? 고린도후서 11:23-27를 보면 그가 받은 고난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모릅니다.

그는 수없이 투옥되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 로마에서 감옥살이를 했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았고, 가죽 채찍의 끝에 납을 매달아 때리는 로마의 형벌인 태장을 세 번이나 맞았습니다.

이 태장은 로마의 형벌로 맞으면 불구자가 되거나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그런 형벌을 세 번이나 맞은 것입니다.

또 여행 중에 당한 여러 위험과 동족의 박해와 위협과 추위로 인해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5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 평생 소원이었던 로마 선교를 위해 로마에 가서 2년 동안 옥살이를 했습니다.

로마 감옥에서는 누구하나 돌볼 사람이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몸에 덮을 옷 하나 가져다 줄 사람이 없는 그 추운 로마 감옥에서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는 전생을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삶을 주님을 위해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는 왜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을까요? 그도 성도들의 부양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포기했고 엄청난 고난을 받았던 것은 주의 복음의 장애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이 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복음 가운데 무한한 자유를 얻었지만, 복음을 위해 그 자유를 누리지 않고 도리어 복음의 종이 되었고, 복음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어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얻은 이 영원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 영원한 자유를 나의 행복만을 위해서, 나의 가족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행복과 세상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주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영원한 자유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자유를 복음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복음에 미쳐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가 무엇엔가 미쳐서 살아갑니다. 돈에 미쳐서, 명예, 권세에 미쳐서, 스포츠에 미쳐서, 예술에 미쳐서, 즉 자신의 사는 영역에서 미친 것도 모른 체 살아갑니다.

이렇게 미치지 않으면 지금은 어떠한 분야이든 최고의 실력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아무것에도 미쳐있지 않다면 그는 무능한 자일 것입니다.

당신이 어느 한 방면에 최고가 되기를 원한다면 미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수년 내에 최고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종인 우리는 무엇에 미쳐야 합니까? 우리는 바로 복음에 미쳐야 합니다. 복음에 미치지 않고서는 우리는 사단의 종이 되어서 언제나 어둠 속을 살아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도 체면이나 자존심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세웠다면 하나님은 그를 쓰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왕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전도했고, 병든 자, 장사꾼, 지식인, 가난한 자, 심지어 죄수들까지 가리지 않고 전도했습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 최대의 명령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소원하는 일일 것입니다. 전도는 결코 아름다운 말로나 지식으로, 미모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 전하는 일에는 반드시 핍박이 뒤를 따라 다니기 때문입니다.

미친 자는 여건에 관계없이 취해 사는 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주변의 여건에 관계없이 오직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할 것입니다.

서울 합정동에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복음의 땅 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입니다. 양화진에 자리한 기념관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은혜 보답의 차원에서 이곳에 외국인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선교사들의 묘비는 생명력 넘치는 메시지가 되어 방문객들의 영혼을 두드립니다.

묘비명에 담긴 애절한 사랑도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옵니다. 안락한 삶을 마다하고 한국을 찾아온 벽안의 선교사들의 모습과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바랜 묘비명들이 예리한 표상처럼 저의 가슴을 파고듭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A. K. 젠슨).

“나에게는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 캔드릭).

그리고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비명이 다시금 방문객들의 눈길을 잡아당깁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자신들이 잘 알지 못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너희가 은혜로 값없이 받았기 때문에 너희도 값없이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이나 아펜젤러처럼 복음에 매인 자가 되어 전 세계에 복음을 증거하거나 선교사를 후원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를 복음 전파를 위해 바치고 주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충성된 종이 되어 복음 증거에 우리의 전 생애를 바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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