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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십자가 사건

관리자 2013-03-24 (일) 11:00 11년전 1323  

십자가 사건

 

누가복음 23:39-40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슬하에 오직 공주만을 두고 있었던 그 왕은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말타기와 활쏘기였는데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으로 왕이 한 문제를 그들에게 냈습니다. “저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라. 기간은 100일이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나무를 구하려고 제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그 젊은이들 중에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 나무를 구하다가 찾지 못하자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의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페로는 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나무 십자가뿐이다.” 그 후 페로는 지혜로운 왕이 되어 오랫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건을 만들었음에도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멸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은 그들이 십자가보다는 지혜의 학문이라는 철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엇인가?’로 출발합니다. 오직 인간에게 집중하고 인간을 알려고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속적 삶을 지향하는 인본주의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말들이고 헛된 속임수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지향하는 복음이라면 ‘십자가로 이기셨다’는 말은 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죄를 드러내면서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죄를 해결하는 힘이 될 수 없고 오직 십자가만이 죄를 해결하는 참된 능력이며 힘이라는 것을 증거할 뿐입니다.

신자는 십자가 안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은 자이며, 또 십자가 안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산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사모해야 할 것은 세상의 지혜와 힘이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는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이 십자가가 주는 영적인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고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부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 인간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는 인간이 육신으로 행하는 그 어떤 것도 의가 되지 못합니다. ‘이신칭의’ 즉, 십자가 안에서는 오로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그 믿음 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가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세상의 힘을 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로 인해 힘을 얻을 뿐입니다. 신자에게는 십자가의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는 갈보리 산에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을 구원하러 온 구세주인데도 인간으로서도 가장 모욕적인 십자가에서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것입니다.

두 강도는 살인과 폭동을 일으킨 자들로서 그 당시 율법으로는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 그들과 동류로 치부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으니,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판 또한 인간이 하는 일이라 오류가 없을 수 없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재판은 누가보아도 명백히 오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악을 도리어 인간을 구원하는 사건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께서 그 흉악한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되신 것은 전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대속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3:13).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해결해 우리 인간을 구원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하고 순결하신 분이었지만 인류의 모든 죄를 함께 끌어 안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죄 값을 치루는 가장 저주 받은 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시간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하고 절규했습니다. 이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나무에 달려 생살이 찢어지는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크면 자기 아버지 하나님께 “당신의 아들인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했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진 고통은 그 옆의 강도들이 진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는 대속의 십자가인 반면, 그 옆 강도들의 십자가는 마땅한 응벌의 십자가였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그 근본부터가 여느 십자가의 무게와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천근 만근’이라는 말로, 즉 양을 나타내는 무게로는 잴 수 없는 무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온몸으로 모든 인간의 죄의 무게를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에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등 본연의 의미를 잃고 십자가가 일개 장식품이 되어 가고 있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세속적인 태도에 어느새 우리도 동화되어 우리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냥 인간적인 마음에서 예수가 불쌍해 감상적으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감상적인 태도만을 지녀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감상적인 눈물을 흘리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바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대속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더러운 죄가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소멸되어 가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악의 끔찍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중한 것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겁고 중한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들 중에 예수의 십자가을 바라보면서 ‘죄가 깊은 곳에 은혜 또한 깊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 번도 전율을 느껴 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자기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또 한 여인은 자기는 일생 이렇다 할 큰 죄는 짓지 않았지만 자질구레한 잘못은 많다고 했습니다.

목사는 큰 죄를 지은 여인에게는 “당신은 당신이 들 수 있는 가장 큰 돌덩이를 가져 오시오”라고 말했고, 일생동안 이렇다 할 큰 죄를 지은 기억이 없다는 여인에게는 “자디잔 돌멩이를 치마폭에 가득 주워 오시오”라고 말했습니다.

한참 후에 두 여인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여, 한 여인은 커다란 바윗돌을 낑낑거리며 옮겨 왔고, 다른 여인은 새알만한 잔 돌을 치마폭 가득 주워왔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 돌멩이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고 오시오.”

큰 바윗돌을 가져온 여자는 다시 낑낑거리며 바윗돌을 제 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어디서 가져온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알만한 잔돌을 치마폭에 가득히 주워온 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목사는 일생 동안 별로 큰 죄를 짓지 않고 자질구레한 잘못만 저질렀다는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거요! 하나님께 지은 죄도 바로 이런 것이요. 하루하루 이러저러한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께 죄책감 없이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많은 죄를 짓고도 회개 한번 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 여인은 큰 죄를 짓고 이렇게 통회하고 자복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함께 하실 것이요.”

목사는 그러면서 큰 죄를 지은 여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두려움과 자각이 없다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직도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저 흉악한 강도 사이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그 모진 고통을 감당하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 주시네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눈보다 더 희도록 성결 얻으리

나 믿노라 나 믿노라 그 보혈 공로를

흠없어도 피흘리사 날 구원하셨네(269장)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주변의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노라고 조롱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 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열 명의 한센병자도 일시에 고치시고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고 죽은 나사로도 살려 내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시간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시간이었기에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의 모든 능력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했습니다.

또 주님은 당신의 그 전능하신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마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내려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매달린 한 강도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고 예수께 호소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강도는 지금 여기서 빠져 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영생을 열망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원은 영원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세상에서의 영광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돈 잘 벌고,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세속적인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신앙은 영생을 소원합니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앙을 지키며 순교하신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강도는 십자가에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갈구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보면서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 헌신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처럼 우리도 죄 값을 받아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다 지불해 주셨으니, 우리는 우리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를 지고 가정에서 희생하고 교회에서 헌신하고 세상에 나가 주님께서 맡긴 사명을 책임지고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바로 그 때만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에게 증거하여 그 이웃 또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온 누리에 증거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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