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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육신에 속한 사람

관리자 2013-04-07 (일) 11:00 11년전 1268  

육신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3:1~4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청동조각상은 아주 유명한 조각 작품입니다. 근육의 섬세함이 잘 표현된 이 작품 속에서 과연 남성은 고개를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물론 이 작품을 만든 로댕만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이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높이 186cm 석고상이며, 1880년도에 완성되었습니다. 본래 이 작품은 ‘지옥의 문’이라는 커다란 작품의 윗부분에서 놓여 그 문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 한 남자의 고뇌하는 모습을 그린 단테의 [신곡]에서 그 기본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원래는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의 윗부분에 놓여 있었지만 1888년에 로댕이 독립된 작품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의 삶은 바로 고뇌하는 삶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고뇌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삶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원간 하나님 앞에 설 텐데, 그 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책망받을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냥 생각이 없이 살다가 그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할 것입니다.

본문은 두 종류의 인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로 ‘신령한 자’입니다. 이는 영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생활하는 자를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헬라어로 ‘사르키노이스’로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이는 영적인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세속적인 삶을 벗어버리지 못하여 아직도 육적인 생활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사르키노이스,’ 즉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르키노이스’라는 말은 ‘육신’을 의미하는 ‘사르코스’에서 온 말로서 바울이 자주 사용한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육신에 속하였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문자 그대로 우리의 육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쓰인 ‘육체’라는 말은 ‘세속적인 삶’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죄로 얼룩진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살지 알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된 삶을 살기 때문에 책망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죄를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 정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기독교는 죄를 소극적인 의미로 ‘선의 부재,’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 정도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죄는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반역이요 불순종입니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 죄의 악독함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로 향하는 강의 지류에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떠내려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음덩어리에는 동사한 양이 붙어 있었다. 그 때 창공에서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발톱을 양털 깊숙이 박고 고기를 뜯어먹기 시작했습니다.

독수리는 죽은 양고기를 먹느라 점점 폭포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독수리가 폭포의 굉음을 듣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천길 낭떠러지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날개를 펴 창공에 날아오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독수리가 폭포에 이르러 날개를 펴려는 순간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양털 속에 깊이 박힌 발톱이 얼어서 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독수리는 양의 시체와 함께 폭포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쾌락의 양고기에 취해 영혼이 죽는 줄도 모른 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죄악에 박힌 발톱이 빠지지 않습니다. 죄는 달콤하지만 결과는 참혹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죄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반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구약에는 613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모세의 십계명에서 10개로 축약되고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두 가지로 압축되었으니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마22:37)인데, 이것을 다시 한 말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구약 613개 율법을 엑기스를 뽑아 정제하면 한 덩어리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하라 한 것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며 죄의 본질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 즉 당파심이나 분쟁과 분파 싸움을 열심히 해서 사도 바울의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형제를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치열한 당파싸움을 벌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장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파당싸움이 있다는 것은 교회의 거룩함을 해치는 것으로서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려면 그 사람의 이웃관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불화하여 늘 싸움을 하며, 말이 많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를 할 줄 모른다면 그러한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출석해 교회 중직을 맡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화합을 잘하며 사랑과 일치의 정신으로 교제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길 위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그의 이웃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바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이웃과 가까이 있다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과의 관계를 잘해야 합니다.

찰스 그리첸톤는 큰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어린 딸을 하나 두고 있었는데 너무 귀여워했습니다. 그가 사업을 하는 목적은 바로 그 아이를 위해서였습니다.

그에게 그의 딸은 큰 자랑이요 미래의 희망이었습니다. 딸은 그에게 우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는 날 그 딸이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찰스는 그 딸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슬픔 때문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그렇게 슬퍼하며 비탄에 잠겨 있을 때 문득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찰스야, 너의 딸 플로렌스는 지금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잘 있단다. 그렇지만 지금 너는 네 이웃의 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말을 들은 찰스는 “저는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앞으로는 이웃의 딸들을 위해 일하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그 다음해 가출한 소녀들이 그들의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자선단체에 거금을 내놓았습니다.

또 그 다음해에는 더 큰 돈을 내놓았고, 그 다음해에는 아예 자신의 사업을 포기하고 그 일에만 전력하여 전 세계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능력을 증거하는데 삶을 바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신앙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상태는 어느 정도입니까? 아직 신앙적 유아기를 벗어나고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아직 신앙이 어려서 세상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파당싸움을 했고 심지어는 성적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는 철학적 지식이나 수사학 그리고 웅변에 능하였으나 영적인 진리를 깊이 체득하지 않아 신앙면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도 고린도 교회와 같이 신앙적 유아기에 불과합니다. 양적으로는 성장하였기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외적으로는 어른이 되었지만 내적으로는 성령의 일을 도모하지 않아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우리 교회 또한 속은 없이 키만 훌쩍 커버리지나 않았나 자문해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만 성장해서는 안 됩니다. 내적으로 신앙을 착실하게 쌓아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만의 비젼을 이루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1) 북한과 세계 선교의 센터가 되어야 하고,

2) 지역사회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며,

3) 통일 시대를 위해 우리 민족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양성해야 하며,

4) 한국교회의 모범이 되는 교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 비젼은 어린아이 신앙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어른이 되어야 책임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이 한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19-23).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을 ‘열매’로 표현하지 않고 그냥 육체의 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타락한 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은 본래부터 타락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령의 열매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이 행하시는 결과로 우리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맺혀지기 위해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즉 예수 믿고 성령 을 받았지만 성숙한 성도가 되어 열매가 맺혀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역경과 고난을 헤쳐나가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경건의 훈련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체의 일을 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성령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 선한 일을 행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일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늘 항상 성령에 사로잡혀 육신의 소욕을 모두 끊어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때 성령의 열매들이 저절로 풍성하게 맺혀질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선행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하나님께로 우리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돌이키는 결단의 삶, 회개의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차를 잘못 탔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차를 갈아탈 생각은 하지 않고 기차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했습니다. 즉 기차 안을 청소하고 노약자를 도와주며,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사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기차 안의 승객들은 그의 선행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종착역은 그가 목적했던 곳이 아닌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기차 안에서 선행을 베풀 것이 아니라 기차를 갈아탔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회개는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성령의 일을 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일은 곧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 없이 선행을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께로 근본적으로 방향을 돌려 영적인 일에 매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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