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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4.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자라나게 하시는 분

관리자 2013-04-14 (일) 11:00 11년전 1240  

자라나게 하시는 분

 

고린도전서 3:5-9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현자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자연과 우주를 만드실 때마다 ‘보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만물의 영장을 만드신 후에는 ‘보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어찌하여 없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완성품이 아니고 미완성의 존재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자기 스스로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보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하지 않았구나.”

그렇습니다.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가능성을 찾아 그 가능성을 실현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보기에 좋구나’라고 칭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3가지 벽이 있습니다. 첫 번째 벽은 바로 자신만의 시각과 색깔입니다. 이는 자라온 환경과 경험들이 성장하면서 자신만의 시각과 색깔을 만들어 모든 세상을 자기의 방식대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보고, 느끼고, 판단하는 것 등 모든 것을 자기의 방식대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시각과 색깔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

두 번째 벽은 바로 처리하지 못하는 감정입니다. 이는 삶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우리 안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있을 때 의식은 콤플렉스를 갖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남을 비판하고, 합리화하고, 현실 도피를 하는 등의 콤플렉스는 우리 안의 잠재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경험을 통해 삶의 결정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삶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은 바로 사실이 아닌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는 자신이 스스로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람들이 자신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진짜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한 채 벽을 만들게 되고, 다른 사람 또한 이 벽 때문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므로 진정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관계에 조건이 생기게 되고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다 보니 삶에 갈등과 불평이 끊임없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가치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 주어 자신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알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것으로 우리 내면에 있는 가능성을 실현시켜 하나님께 ‘보기에 좋구나’라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영육 간에 가장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온전하여 집니다.

신앙은 고난에 처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로 이루어질 미래의 가능성을 봅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 속에서 희망찬 미래를 봅니다.

누구에게나 두 개의 눈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눈을 가지고도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데는 마음의 선입관에 따라 판이하게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믿음보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판단했는데 그 결과는 10대 2였습니다. 신앙의 눈을 가진 자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눈을 가져야 할까요? 첫째, 신앙의 눈은 좋은 것을 좋게 봅니다.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면 믿음의 산물을 보게 됩니다. 신앙인은 좋은 것을 좋게 볼 수 있어야 하며 어두운 면 보다 밝은 면을 보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 신앙의 눈은 가능성을 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는 하루도 포기하지 않고 물이 동할 때 나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다렸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또 마가복음 1:16∼2:14에서 우리 주님은 어부들 속에서 가능성을 보셨으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셋째, 신앙의 눈은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보고 와서 믿음의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합니다. 이 눈이 바로 우리의 생활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눈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구약의 위대한 성군 다윗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받고 난 뒤 새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3)고 말씀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적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을 죽였으나 그만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추적을 당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몇 번 사울왕의 그물을 천신만고 끝에 피하다가 다윗은 사울왕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엔게디 동굴과 십 황무지의 하길라 산 등에서 두 번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라고 생각하고 사울왕에게 손을 대지 않을 만큼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런 신앙에서 우리는 거인다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다윗이 그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 끌려 간음죄를 졌고, 그것이 탄로나게 될까 두려워 그녀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 하라고 간접적인 살인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다윗이지만 그만 욕정에 이끌려 간접살인까지 했으니, 인간이 어디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이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고린도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생명을 다해 세워 놓은 고린도 교회를 바울 사도가 비운 사이에 파당을 만들어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아마 고린도 교회의 파벌 가운데 신학자이며 목회자인 아볼로파와 바울파가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였을 것입니다.

실상 아볼로와 바울은 서로가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건 목회 전선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내에 자신을 따르는 파를 만들고자 하지도 않았습니다. 감히 어떻게 그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나누는 분파 작업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파를 만들어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분쟁을 지혜롭게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도, 아볼로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교회 내에서 자신과 아볼로의 역할이 서로 달라, 교회에 기여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과 그것마저도 모두 결국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나 아볼로는 결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처음 복음을 전하여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행18:1-18). 즉,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의 씨를 심었습니다.

아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양육했습니다. 즉, 아볼로는 사도 바울이 뿌린 복음의 씨에 물을 준 것입니다(행18:24-19:1).

그런데 최종적으로 자라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어떻게 분명히 했는지는 이 말씀에 사용된 시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었고,’ ‘물을 주었으되’는 모두 ‘부정과거형’으로서, 바울과 아볼로가 한 것은 이미 지나간 것임을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라는 말씀은 ‘미완료과거형’으로서, 그 동작이 아직까지 계속되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이미 끝났으나 하나님은 계속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영적인 진리는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역사를 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처음 전한 이는 바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는 아펜젤러입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의 흔적은 이 땅 곧곳에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다른 주의 종들이 그들이 이뤄놓은 일을 계승했고, 또 그 후에도 많은 주의 종들이 구원의 사역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죽어도 복음의 역사가 계속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의 사역도 일정기간이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때 그때 일에 적합한 사람이 있으면 적합한 사람을 고용합니다. 그러나 그의 고용 기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그를 대신합니다.

복음의 사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다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다른 누군가가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은 바로 복음 사역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능력으로 최선의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폴 릴레이드 박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는 대 오케스트라와 같으며, 인간의 사회는 사람이라는 악기로 연주되는 조화와 사랑의 연주장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악기라면 우리는 각자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좋은 악기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사회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려면 먼저 인간 개개인이 좋은 악기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악기는 잘 조율되어 정확한 음을 내는 악기입니다. 조율되지 않으면 정확한 음을 낼 수 없기에 조율사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잘 조율된 악기와 같이 잘 조율되어 있는 사람은 세 가지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

1) 듣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소리를 내야 하며,

2)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고 잘 조화된 소리를 내야 하며,

3) 많은 사람이 듣고 즐길 수 있는 소리를 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시간이 나는대로 하몬드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힘든 봉사의 삶 속에서도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한 통신사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왜 그렇게 하몬드 오르간을 많이 연주하십니까?” 하고 묻자, “저는 제 삶의 본래 목적에서 탈선하지 않기 위해서 연주하는 것입니다. 이 오르간은 정확하게 자신의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웠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냥 자기와 자기 가정만을 위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악기인 이상 그 악기에 맞는 정확한 소리를 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에 맞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감당하고 스스로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일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도구에 불과한 사람이 영광을 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단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어찌 인간이 재림 예수가 될 수 있고 어찌 보혜사 성령이 될 수 있습니까?

이단의 교주들은 자신들의 본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들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우리 주님의 반열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돌본다 하더라도 식물에 적절한 햇볕과 비를 내려 자라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런 자연법칙은 복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전도를 통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또 말씀을 통해 제자훈련을 시켜도 근본적으로 진리의 햇볕을 비추시고 은혜의 단비를 내려 회개케 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시니다.

인류를 구원할 구원계획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함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최후에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구원 사역을 완성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 돌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때를 얻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복음 사역을 아름답게 감당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열매를 거두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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