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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9.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관리자 2013-05-19 (일) 11:00 10년전 1320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마태복음 17:1~8절

 

미국에서 남북전쟁 때의 일입니다. 치열한 전투 중에 한 병사가 탈영했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서 백악관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어가 수가 없었습니다. 그 늙은 아버지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백악관을 떠나 길가 벤치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늙은 노인을 보고 있던 한 소년이 그 노인에게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그 소년은 그 노인이 지금 막 쫒겨난 백안관을 향하여 들어갔습니다.

노인은 허겁지겁 그 소년을 따랐습니다. 그 소년은 헌병에게 “이 분은 나와 동행하는 분입니다”고 했습니다.

소년의 그 한마디로 초소 두 군데를 무사히 통과한 노인은 링컨 대통령을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소년은 링컨 대통령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하셨습니다(계1:17-18).

예수께서는 음부의 문 곧 죽음의 문을 열어 우리를 영원한 나라인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지나온 발자국을 되돌아보았습니다. 험난하고 힘들었던 여정이나 가파른 고개 길에는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찍혀 있고 평지와 낮은 구릉의 편안한 길에는 마치 나란히 걷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돌아다보며 항의하듯 물었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왜 낮은 구릉과 평지에는 당신께서 저와 동행하여 주시고 거칠고 험난한 길에서는 제 혼자 걷게 버려 두셨는지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주님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편안한 길에서까지 진실로 나를 신뢰하고 필요로 했다면 아마 그 길의 발자국도 하나 뿐이었을 것이야.

그러나 너는 힘들고 험난한 길에서만 나를 찾았고, 그 때마다 나는 너를 업어서 다녔단다. 그리고 험난한 길이 끝나면 너는 날 멀리했지. 그 때마다 나는 네 곁에서 걸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란다.“

이렇게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과 언제나 동행하여 주님의 은혜 안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시자 예수께서 변형되고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찾아와서 주님과 더불어 대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 선지자들 중에 선지자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분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런 훌륭한 분들이 주님과 함께 있는 장면은 가히 천국의 모습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율법의 전수자인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선지자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있고 또 서로 대화한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따르고 있던 주님이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감동할 따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체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적을 수 없이 보았지만, 이번 경험처럼 그런 영적인 체험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

사람들은 신비스런 것을 경험하면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또한 신비스런 경험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그런 청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유대 사회는 로마의 지배와 헤롯왕의 폭정과 존경받지 못하는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의 지배로 편안한 삶을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것들을 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냥 은둔해 살면서 편하게 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기독교적 태도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과 사회를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장소적으로 ‘여기’ 머물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정적이 아닙니다. 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를 뛰어넘어 ‘저기’를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저기, 즉 저 산 아래, 슬픔과 고통과 비애와 죽음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적인 만남을 통해 신비적인 체험을 했으면 저 아래 슬픔과 눈물이 있는 곳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산 위에서의 부흥회와 산기도를 통해 신비적인 은혜 체험을 하는 데에 치중했습니다. 산 위에 머물러 은혜만 체험하려고 했지, 산 아래로 내려가 받은 은혜를 삶으로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산 아래로 내려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한 곳에 머물라 하지 않고 ‘가라’고 하십니다. 은혜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고인물이 썩는 법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모여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적극적으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나가 전도하고 복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주저앉아 하나님의 은혜와 복만을 누리려고 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우리들만 누릴 것이 아니라 빚진 자의 마음으로 북한과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시각은 독특해야 합니다. 여기 현재적인 자리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계의 일감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미래를 향해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에 머물러 세상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뒤로하고 은혜에만 젖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염려와 근심을 넘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구약에도 있는데, 그들이 바로 르우벤과 갓 자손입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여정 도중에 차지한 땅에 정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진 많은 가축 떼를 기르기에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습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의 선택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충분히 이해가 되는 선택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곳으로 가느니, 지금 살기 괜찮은 곳이 나타났을 때 빨리 그곳에 정착하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때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때는 그곳이 살기 좋은 곳인가 좋지 않은 곳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곳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부르신 곳이라면 가야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우리의 눈에 보기에 좋은 곳을 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를 따라 가야합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 죽으신, 예수님의 도를 따라 가야합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르우벤과 갓 자손의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거절당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가야 합니다.

또한 베드로는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결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곳에 집을 세 채나 짓겠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실상 집 한 채 짓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목회자로 평생에 교회 하나도 못 짓고 마는 이들이 많습니다.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세 채나 짓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하는 부질없는 소리입니다. 어찌 우리 주님 같이 크고 위대하신 분을 그 집 따위에 모실 수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가 가진 모든 학문을 가지고도 설명할 수 없고, 지상에 있는 것에 속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시편은 말씀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주님을 작은 집, 그 예배당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장소에 제약되지 않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장소에 제약되지 않는 전능하신 주님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 주님을 골방에 모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볼 수 있는 그 눈으로 우리는 저 산 아래의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정확히 보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겠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베드로의 문제는 주님의 말을 듣지 않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도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관계없이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배운 대로, 경험한 대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신비 체험을 위하여 산으로, 기도원으로, 부흥회로 찾아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을 들으라.”

어떤 며느리가 친정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자기가 보기엔 친정 가족들이 신앙생활도 더 열심히 하고 부지런해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시댁이 더 잘되기 때문입니다.

시댁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그다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오히려 시댁은 하나님께 더 축복을 받는다면서 어찌 된 영문인지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뵙고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제가 시댁과 친정 가족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시댁 식구들은 누군가가 자기들에게 잘못을 했을 때 빨리 빨리 용서를 하고 하나님이 ‘이게 아니다’ 하시면 재빨리 태도를 바꾸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친정 식구들은 신앙생활은 열심히들 하시지만 무언가 마음에 미움이 있을 때 그걸 빨리 풀어버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들려올 때도 자세를 빨리 바꾸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목사님께 정말 목사님의 말씀이 맞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성경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먼저 네 마음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귀하게 보시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사울왕은 제사를 드리려고 소를 안 죽이고 데려왔지만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성령충만한 생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일탈현상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지식과 경험, 자기 판단력으로 나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탐욕과 이기심이 꿈틀거립니다. 나만 알고 독선적인 생활을 하기 일쑤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신 산 아래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찾아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산 아래에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합니다. 산 아래에 주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종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인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충성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상황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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