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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5.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불완전한 인간

관리자 2013-12-15 (일) 11:00 10년전 1319  

불완전한 인간

 

고린도전서 13장 8-13절

 

한국 교회의 위대한 성자 손양원 목사님는 한센병자들이 있는 여수 애양원 교회를 목회하던 중 8.15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 손양원 목사님에게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은 참으로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용한 바닷가에 피바람을 몰고 왔던 여순반란사건에서 손 목사님의 두 아들인 동신과 동인은 목회 활동을 하던 중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님는 아들들을 땅에 묻으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혼란한 세상을 벗어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들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장례식을 마친 뒤 손목사님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인 안재선을 자신의 양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친아들을 면회 가는 것 마냥 기쁜 마음으로 양아들이 갇혀 있는 교도소로 향했습니다.

손 목사님는 창살 너머로 양아들의 두 손을 꼭 부여잡고 차분히 말을 옮겼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하나님이 내게 보낸 새로운 자식이야. 부디 과거의 실수는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새롭게 살자구나.”

때가 절은 죄수복을 입은 양아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손 목사의 말이 끝나자 주르륵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감옥을 나온 양아들은 그 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한 아버지를 본받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두 아들의 뒤를 따른 손양원 목사님의 묘비에는 감사로 가득한 손목사님의 마음이 빛나고 있습니다.

“두 아들을 제게 보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두 당신의 의로운 뜻을 위해 불러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

저 또한 당신의 뜻을 위해 이렇게 의롭게 죽음을 맞게 되어 기쁩니다. 당신께는 오직 감사 감사의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습니까? 원수마저도 감동시키는 손목사님과 같은 사랑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랑 없이 분열과 대립만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대립은 극에 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개성공단이 재개됨으로써 극단적인 대립으로 가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의 상처는 커 남북관계는 타협을 모르고 전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경색되어 있습니다.

이런 남북의 대립은 남과 북의 대립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사회에 극심한 좌우대립을 초래했습니다. 최근의 이석기 사태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시국미사에 대한 좌우의 날선 이념적인 대립은 종북논쟁과 연계되어 한국사회를 또다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전투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국가의 정신적인 에너지가 이념논쟁에 쏠린 결과 경제는 정부의 간섭 없는 완전한 자유시장을 꿈꾸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로 인해 노동이 급속도로 유연화 되어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중산층이 몰락하여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급속도로 가속화 되고 있음에도 미처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갈수록 첨예화 되고 있는 이러한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에 맞서 사랑과 관용과 희생으로 그것들을 치유하고 공정한 정의를 회복하도록 영적으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할 종교계마저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립에서 보여주듯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정체성과 그간 누려왔던 기득권을 계속해서 누리려는 열망에만 급급합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 기독교는 WCC에 관련한 보수와 진보의 집안싸움으로 대내외적인 망신을 사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으로 대립과 분열을 영적으로 치유해야할 기독교마저 과거의 역사의 덫에 사로잡혀 치유해야 할 대립을 더욱 확대재생산하고 있으니, 참으로 하나님 보기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분열의 시기에 고린도후서 5장 18-19절의 말씀과 히브리서 12장 14절의 말씀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사도 바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자 화해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했으며, 또 그 구원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켰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 또한 우리 인간 사회 속에 그 화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간들 사이를 화해시키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극한적인 대립 또한 극복하여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해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동료 인간과 자연은 정복과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나갈 동역자들입니다.

본문 말씀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많은 은사를 받은 후 그들이 받은 은사의 우월성을 자랑하면서 교회가 분쟁에 빠져 있을 때 사도 바울이 권면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언의 은사를, 어떤 이들은 방언의 은사를, 어떤 이들은 지식의 은사를 받은 것을 자랑하며 교인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은사라는 것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예를 들어 예언의 은사는 말씀 전하는 은사로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은사입니다.

실상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이 그 누가 예수의 복음에 감동하겠습니까? 이처럼 예언의 은사는 정말 자랑할 만합니다.

방언의 은사 역시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통해서 큰 믿음을 갖는 것이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은사로서 자랑할 만합니다.

또한 지식의 은사는 세상의 이치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분간하는 지식을 갖는 것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은사입니까? 이 은사 역시 가지고 있다면 은근히 자랑할 만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8절)고 말합니다.

즉, 사랑의 은사를 제외한 모든 은사는 세상의 종말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은사 외에는 모든 은사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제외한 은사가 불완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인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조차도 타락하여 불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은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여 그 은사들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은사가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온전한 은사를 불완전한 은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 인간의 불완전한 상태를 ‘어린아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보통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른에 비해 부분적이고 이성적이기보다 감각적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어린아이는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피부로 느껴지는 것만으로 판단합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하더라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지식 앞에서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즉 아무리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 해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피부로 느껴야만 믿음을 갖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주님끼서 못 박힌 손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을 때 그때서야 그들이 믿고 기뻐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만져보고서야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신앙은 감각적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서 감각적인 신앙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제자들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제자들에게서 예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고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고 했습니다.

그 후 예수께서 도마를 만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하셨을 때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보시기에 제자들과 도마는 감각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르면서 제자훈련을 받고, 또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체험했으면서도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예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하고서야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고야 믿는 감각적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은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감각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그저 배가 고프거나 몸이 아프면 울고 또 현실적인 요구가 충족되면 웃습니다.

그들은 미래를 바라보고 오늘의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신령한 은혜를 받았어도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 현재의 고난을 이져내지 못하면 영적인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주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늘 알려주는 것도 바로 이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 10명은 가나안에 강력한 아낙 자손이 살고 있어 도저히 갈 수 없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대부분의 백성들이 그들의 현실적인 보고를 믿고 그들에게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땅은 우리들의 밥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적인 보고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해야 했고, 결국 출애굽 세대는 그 광야에 뼈를 묻어야 했습니다.

믿지 않고 부정적인 것에 현혹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 문제에 발목잡히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지식이 거울을 보는 듯이 희미하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거울을 놋(청동)으로 제작하였기에 오늘날처럼 명확하거나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희미했습니다.

구약을 통해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누구라는 것을 정확히 계시해 주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과 관습에 눈이 어두워 불과 소수만이 메시야를 대망하고 영접할 정도였습니다.

또 만물이 주님의 신성을 드러내고 또 성경에서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밝히 나타내 주시지만 인간은 무슨 막에 가린 것처럼 밝히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이 욕심 때문에 우리의 거울이 청동거울처럼 확실히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마음이 가난하고 청결하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마5:8).

우리 인간의 지식은 아무리 많아도 불완전합니다. 인간이 소유한 은사 또한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폐기될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은사는 인간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지만 사랑의 은사만은 이웃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에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천하게 되면 그것으로 모든 은사를 완전하게 되기 때문에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의 은사를 얻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소록도에서 한센병자들을 위해서 헌신하여 피고름을 입으로까지 받아 주었으니, 그 사랑은 주님이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한국 교회의 선조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할 때 한국 교회는 달라질 것입니다. 아니 우리나라가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간절히 구해야 할 것은 바로 모든 은사를 더욱 완전하게 하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니, 바로 우리의 하나님께 사랑의 은사를 구해 이 땅에 그 은사를 아름답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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