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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사랑, 가장 탁월한 은사

관리자 2013-12-01 (일) 11:00 10년전 1257  

사랑, 가장 탁월한 은사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미국의 남북 전쟁 때 북군에서 전쟁에 나갈 장정을 징발할 때였습니다. 한 도시에서 전쟁에 나갈 만한 장정들을 광장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배당된 숫자를 채우는데는 그 도시의 많은 장정들이 나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갈 장정을 뽑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필이면 부모도 계시고 결혼도 해서 자식들까지도 있는 많은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장정이 뽑혔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전쟁터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 가운데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도 계시지 않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부양가족이 많은 그 친구를 대신하여 전쟁터에 나가겠다는 자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 모병 책임자가 감격하여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습니다. 그 친구는 대신 전쟁터에 나가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에 남아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고 있는 그 사람은 자기 대신 전쟁터에 나간 그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미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볼 때마다 전쟁의 전사자 명단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큰 격전이 있었고, 그 친구가 그 전투에 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 친구가 죽어 전사자 명단에 그 친구의 이름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 친구의 유해를 정성스럽게 수습하여 자신의 가족 묘지에 묻고 묘비에 그 친구의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그는 나를 위해서 죽으시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는 나를 위해 죽으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로마서 5장 6-8절을 보시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약하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힘이 없다거나 아직 어른이 되기에는 모자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바로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얻기에는 무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전적으로 타락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우리는 율법으로는 죄인입니다. 죄인이어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지 않고는 우리는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곳은 해골 모양의 바위 언덕이었습니다. 언덕 이름은 라틴어로는 갈보리라 하였고 히브리어로는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는 악한 죄인을 처형시키는 사형틀입니다. 사형수가 십자가를 지고 현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기고 십자가 형틀에 두 손과 두 발을 고정시킵니다. 그러면 손과 발이 찢어지면서 몸속의 피가 흘러나와 결국 죽게 됩니다.

어떤 죄수는 3일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6시간 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채찍에 너무 많이 맞아 기진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로 타락한 모든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대속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있습니까? 이런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찌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분이 생명을 대신 주고 산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십자가는 바로 죄악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증표이자,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영적인 책임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고”(고전2:2)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1:17)고 고백하였습니다.

또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지혜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3-24).”

그리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자신도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산다고 증거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의 사랑을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핵심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교만하였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영적인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자기들만이 무슨 큰 능력이 있고 지도자인양 행세하면서 다른 성도들을 무시하고 그들 위에 서려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기도를 잠깐하는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수 시간을 기도하였습니다.

방언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 속에서 기도할 줄 아는 은사로서 수준 높은 영적인 신앙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그 방언의 은사로 인해 영적인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특권으로 생각했고 방언을 하지 못하는 다른 성도들을 얕잡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교만으로 주님의 피로 한 형제가 된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교만에 빠졌으니, 이것은 분명한 영적인 타락이었습니다.

참 신앙은 주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해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믿음은 실상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을 강조하는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는 본래 가톨릭 교회의 유능한 사제였으며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으면서도 루터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속에서 꿈틀거리는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지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죄책감은 하박국을 인용한 로마서의 말씀을 깨달은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는 믿음(롬10:17)을 통해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 구원의 본질은 바로 믿음이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역사가 깊어지면서 어느덧 선행과 특별한 기부 행위로 대체되었고, 루터가 그것을 본래대로 회복시킨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하면 지금 시대에는 아마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음만으로 얻는다는 사실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는 공식임을 드높이 소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입니까? 즉,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드시 사랑이 뒤따라야 합니다.

사랑이 뒤따르지 않는 말로만의 믿음은 정당한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일년 내내 순전히 예수의 사랑에 대한 설교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진저리가 났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이렇게 일년 내내 사랑 설교만 했으니 교인들이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가 하고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늦게 목사님은 사모님 앞에 미리 예비해 두었던 보따리 하나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거지 누더기 옷 두벌을 꺼내 가지고 하나는 목사님이 입고 또 한 벌은 사모님에게 입으라고 해서 거지 내외의 행각을 했습니다.

그런 거지 복장으로 한 장로님댁으로 갔습니다. 초인종을 눌렀더니 성탄준비를 하느라고 장로님이 떡을 만들고 음식을 장만하다가 나와 보니 거지들이 왔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밥 한술만 주시기 바랍니다” 했더니만 장로님이 하시는 말이 “에이 재수 옴 붙었구나” 하고는 문을 꽝 닫고 들어가더니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 때 목사님 내외는 너무나 기가 막혀 이럴 수가 있느냐하고 한탄했습니다. 이번에는 권사님 댁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이 집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구걸했었지만 여기서도 “여보시오. 구걸을 해도 좀 염치가 있게 하구려” 하더니 떠밀어 내치기까지 했습니다.

목사님은 실망하고 “여보 갑시다” 하고 교회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목사님은 지난 주일에 등록한 교인이 생각났습니다.

그래 이 집이나 마지막으로 들어가자 하고 노크를 했습니다. 그 등록 교인이 문을 열어 보고서는 거지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고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이리 들어오세요” 하더니만 음식을 차리러 갔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여보시오, 됐습니다” 하고는 도망쳐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날 설교를 하시면서 “여러분 제가 1년 내내 성도의 사랑에 대하여 설교했는데, 장로님,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간 거지 내외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저와 아내였습니다. 권사님, 뭐가 어째요? 저는 오늘부로 사임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는 그 교회를 떠났다고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믿음이 근본적으로 중요하지만, 그 믿음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기에, 그 믿음 속에 사랑이 없으면 잘못된 믿음입니다.

또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에는 방언 은사 외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언이란 점쟁이들이 개인의 미래에 대해서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설교를 말합니다.

설교자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을 유일의 목적으로 삼고 구령열에 불타서 불신영혼을 구하려 쫒아 다녀야 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 같이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복음 증거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주님을 위한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자의 설교는 정말 위대한 예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없고 항상 위협만 가득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랑이 없는 설교는 예언이 아닙니다. 설교 속에도 사랑이 가득차야 합니다.

어떤 고린도 성도들은 지식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지식은 잘못하면 지적인 교만에 빠져 자기만 알지 이웃을 배려하고 이웃에게 양보하는 일은 없는 속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학식이 있다고 남을 멸시하기 일수입니다. 지식은 성령의 불로 뜨거워질 때 참으로 큰 일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학문이 높은 사람이었으나 언제나 겸손하게 구령 사역에 전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지식을 통해 기독교를 세계화시켰습니다. 그의 학식은 그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위대한 재료가 되었습니다.

또 고린도 교인 가운데에는 믿음의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정적인 믿음이 때로는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게 합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 회사는 주일은 쉬지만 매일 아침에 예배를 드렸고 전 직원들에게 너무 많은 일을 시켰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일하여 회사를 키웠고, 직원들에게 수당을 더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장은 믿음은 좋았으나 직원들의 몸을 생각하는 사랑은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을 인해 과로로 병이 드는 직원이 많이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몸도 주셨습니다. 사장은 직원의 건강과 복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믿음은 무모한 것입니다.

또 남을 구제하는 것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구제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구제하거나 자기 우월감을 가지고 구제하는 것은 사랑이 빠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구제는 결코 믿음의 행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희생하면서 죽는 자리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이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여 나에게 사랑을 주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교만하게 사용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은사를 사랑 가운데 실천하여 교회를 영적으로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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