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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8.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이타적인 삶

관리자 2013-12-08 (일) 11:00 10년전 1225  

이타적인 삶

 

고린도전서 13장 4-7절

 

지난 번 우리교회를 방문에서 강연을 했던 토니 홀 박사는 미연방의 11선 하원의원이며, UN 식량 농업기구의 미국 대사를 역임했던 분입니다. 지금 홀 박사는 국제 기아대책기구 회장으로 세계 빈국 108개 나라와 북한을 여덟 번이나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등 분주한 활동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홀 박사는 지난 10월 28일 천안 백석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때 제가 그 자리에 참석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홀 박사는 명예박사 학위 감사의 연설에서 자신은 네 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가난한 사람을 돕는 생활을 우선적으로 하겠다. 둘째,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겠다. 셋째, 그 누구와 만나더라도 함께 기도하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두, 세명이 기도하면 응답하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

저는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앙에 분명히 서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사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면 “나는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자기 식구나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도 나와 관계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먼 남의 이야기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나와 관계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사랑을 아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그렇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 같은 초월적인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유한한 인간인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의 빛을 스스로 발하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아니라 그 빛을 받아 다시 비추는 반사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하게 비추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우리의 사랑은 우리 인간이 진지하게 노력하고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아름다운 결과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맺으신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근본적으로는 우리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실로 사랑이라는 은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거듭났다는 분명한 증거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시금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랑을 15가지 특징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을 7가지만 묵상하려고 합니다.

첫째, 사랑은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자신을 오해하여 비난할지라도 그 오해가 결국은 풀려 상대방과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오래 참는 사랑의 본을 보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우상숭배를 통해 하나님을 모욕하였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오래 참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사랑할 때도 오래 참으며 그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링컨의 젊은 시절,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 변호사를 하고 있었을 때 링컨을 애송이요 시골뜨기라고 모욕하는 언사를 일삼던 유명한 변호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윈 스탠턴이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도 반대당(민주당)에 소속된 사람이자, 그 당시 법무장관으로 정적 가운데서도 그를 가장 비난하는 이도 스탠턴이었습니다. 스탠턴은 성품이 아주 강직하며, 또한 독설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대놓고 링컨을 비난하며 아주 심한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선거기간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며 링컨을 헐뜯고,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으며, '깡마르고 무식한 자'라고 놀려댔습니다. 심지어 스탠턴은 인신공격적인 발언도 남발했습니다.

“여러분, 링컨의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얼굴이 도대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될 얼굴입니까? 저는 고릴라를 잡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가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링컨의 고향에 가면 얼마든지 고릴라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이때도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며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스탠턴과는 달리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자기 행정부를 조직하면서 놀랍게도 자기를 그토록 비난했던 스탠턴을 전쟁장관(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나를 비난했지만 국방장관으로서는 적임자다. 지도자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과거에 자기를 비난했던 그의 모든 잘못들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었으며, 자질을 높이 평가해서 국방장관에 임명했던 것입니다. 스탠턴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링컨을 잘 도와 남북전쟁에서 승리했으며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1865년 4월, 링컨이 암살을 당했을 때 제일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스탠턴이었습니다. 그는 링컨의 시신 앞에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 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인류 역사상 영원히 기념되어질 것입니다.”

스탠턴은 며칠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수도를 방어하고 음모자들을 체포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슬퍼했고, 누군가 링컨의 이름을 꺼내기만 해도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링컨을 보내면서 자원해서 조사를 맡은 사람도 역시 스탠턴이었습니다. 그는 울먹이며 낭독했습니다. “링컨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링컨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위대한 창조자다.” 사랑은 이렇게 그 어떤 악인도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성격과 태도가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온유함의 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독선적이었고, 고압적이었고,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언제나 부드러움으로 대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가운데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인데도 친절하지 못하고 남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우리의 이웃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셋째,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시기는 남이 잘되는 것을 샘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고대 그리스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이 빠른 한 육상선수가 2등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죽을 고생 끝에 결승선에 섰으나 군중은 그가 아닌 우승자에게 환호를 보냈습니다. 승자를 위해 축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다른 등외 선수들과 함께 서있어야 했습니다. 시내를 걸어 집에 돌아가는 그의 귀에는 승자의 이름밖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시내 한복판에 우승자를 기려 거대한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2등 선수는 평생 하루하루 그 동상을 보며 자신이 패자임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가 그의 영혼을 점차 장악해 결국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밤마다 잠 못 들고 그는 몰래 어둠 속으로 나가 승자의 동상으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석상을 기초부터 조금씩 끌로 파냈습니다. 밤마다 거대한 대리석상은 조금씩 약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가 석상을 한 조각 더 파내자 육중한 선수 동상이 큰소리로 갈라지며 앞으로 쓰러진 것입니다. 거대한 대리석 챔피언은 끌을 든 작은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는 즉사했습니다. 그러나 끌을 든 남자는 동상이 무너진 순간에 죽은 것이 아니라 그간 조금씩 서서히 죽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루하루 생각이 꼬리를 물때마다 그를 죽인 것은 시기심의 무게였습니다. 시기심은 자랑스러운 일급 선수의 영혼을 끌이나 들고 타인의 행복을 벗겨내는 옹졸한 사람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시기의 치명적 독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욥5:2)고 했습니다.

 

넷째,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역으로 사랑은 겸손합니다. 이러한 겸손의 모범은 누구입니까?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주님의 이런 겸손한 사랑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1-4).

 

다섯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요청한 사람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정치, 종교 권력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 처형을 원한 사람들은 자기 의에만 빠져있는 사람들이었고, 현재 영적 상태에 만족하여 자신들의 영적 유산을 자랑으로 삼고 실제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영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눈먼 사람들이었습니다. 교만은 우리를 제사장들처럼 “저는 다른 사람은 구원하였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도다”고 말하게 할 것입니다. 오직 교만을 버리는 것만이 우리를 백부장처럼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교만하여 우리 자신이 죄에 빠진 것을 인정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그 겸손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정중한 것이며, 예의 바른 것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에게 모욕이 되는 방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의를 가지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부부사이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고, 사제지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며,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도 예의를 가지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일곱째,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이유를 조사해 보았더니 ‘남편이 예수를 믿으면 자기만을 더 많이 사랑해주며, 자기의 일을 도와주며, 헌금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자기만을 사랑하여 외도하지 않으며, 가정에 더욱 더 충실하고,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한다’는 통계가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제목은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진정으로 남편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이 지옥가지 않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여 남편이 믿도록 기도하기 때문에 그 기도는 응답이 더딥니다.

우리의 정욕과 이기적인 생각은 기도의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참된 사랑의 장애물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최선을 다해 우리의 이익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돌아봐도 우리의 이익을 버리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좀 덜 생각하고 자신의 의무를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세상은 이렇게 어지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각 이익단체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주장을 끝없이 내 놓고 자신들의 의무는 생각하지 않은데서 이렇게 시끄럽습니다. 오늘의 가정도 식구들이 각자 자신들의 주장만하고 상대편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 문제가 끊이지를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주장보다는 상대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이익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더럽고 추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사랑의 핵심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을 온 누리에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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