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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6.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나를 본받으라

관리자 2013-06-16 (일) 11:00 10년전 1227  

나를 본받으라

고린도전서 4장 14-21절

 

어떤 한 사람이 한 겨울에 직장을 잃고 죽기보다 싫은 노숙자가 되었고, 할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구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고급 식당 앞에서 나오는 한 부부에게 적선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는 “미안해요. 잔돈이 없군요”하고는 사라졌습니다.

이 때 그 앞을 지나가던 다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중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떨고 있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우리만 들어가 식사를 하겠어요”하면서 3천원을 주며 말했습니다.

“작지만 이 돈으로 음식을 사드시고 용기를 잃지 말고 일거리를 찾아 보도록 하세요.”

그 노숙자는 그 부인의 부드러운 말을 듣고 “고맙습니다. 아주머니는 저에게 새 희망을 주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부인은 “아저씨는 우리 예수님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이 떡을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도록 하세요”하고 다정하게 권했습니다.

3천원을 받은 그 노숙자는 1천 5백원으로 요기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도록 한 그 부인의 말이 생각나 자신의 옆을 지나가는 노인에게 1천 5백원을 주었습니다.

그 노인은 그 돈으로 빵을 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빵을 떼어 먹다가 나머지를 종이로 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노숙자가 노인에게 “내일 먹으려고 싸 가십니까?”고 묻자 그 노인은 “아닙니다. 저 길가에 신문팔이 아이가 있는데 그 놈에게 나누어 주려구요”하고 대답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 빵 조각을 가지고 그 아이에게 갔습니다. 그 아이가 미친듯이 빵을 먹는데, 길 잃은 개 한 마리가 그 아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아이는 나머지 빵조각을 개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신문을 팔러 뛰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본 노인 또한 일감을 찾으러 뛰어갔습니다.

마침내 그 노숙자는 속으로 “나도 이렇게 있을 수 없지”라고 중얼거리며 일을 찾고자 했습니다. 마침 빵을 먹은 그 길 잃은 개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어 그 노숙자는 그 목걸이에서 주소를 찾아 그 주인에게 개를 돌려 주었습니다.

개의 주인은 고마워 그에게 5천원을 주면서 “당신 같이 양심적인 사람과 내 사무실에서 같이 일하고 싶소. 내일 나를 찾아 오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노숙자는 작은 빵 속에 임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의 움직임을 느꼈습니다. 그는 실로 예수의 사랑에서 오는 새로운 창조의 신비를 실감했고 두 뺨에 흐르는 감동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을 포함하여 인간관계 속에는 나눔이 중요합니다. 나눔은 이웃에게 공감하여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은 남는 물건을 단순히 적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고 고통을 함께 하고자 하는 연대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눔 속에는 나와 너의 인격적인 교제가 있고, 삶의 큰 고뇌와 슬픔을 없애거나 완화시키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고 이 땅에 가난한 가정의 자녀로 내려 오셨습니다.

그러나 나신지 8일만에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가 헤롯이 죽은 다음 나사렛에 오셔서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 목수일을 하셨습니다.

그 후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사시면서 제자들을 교육하셨으나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삶은 곧 나눔의 생활이었습니다.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셔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눔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류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의 사도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본래 바리새인이었고 울법에 정통했으며, 관원이었고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진 이스라엘의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의 포로가 된 다음, 그는 그 모든 좋은 것을 버리고 소아시아와 유럽을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할 때(AD 50-52) 세운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교회를 세우고 전도 사역을 하는 등의 주의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많은 고난이 따릅니다.

바울 역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바울의 복음 선교사역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난과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바울의 고난은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아는 정도’(고후1:9)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마치 산모가 산고 끝에 아이를 출산하듯 고난과 역경 속에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듯, 그의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고난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산고의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해서 고린도 교회를 세웠는데, 바울이 그곳을 떠나 에베소에 있을 때 전해진 말은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말재주도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기에 무지한 자라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평가를 받은 것은 고린도 교회의 아볼로파들의 중상모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상 아볼로파가 따르는 아볼로는 언변이 뛰어나고 성경 지식이 능하기에 하는 비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파가 비난한 것처럼 결코 무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대학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덴에 가서 철학적인 지식으로 복음을 전하자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의 선교에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도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했기에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절)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을 무시하라고 하는 아볼로파의 교인들은 실상 지식이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 말재주와 사변적 철학에 익숙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적으로 교만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변화나 역사의 발전은 이런 교만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희랍어로 ‘뒤가미스’인데, 다이너마이트와 같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힘을 가리킵니다.

이 복음이 바울의 복음 전파 후 1세계로 전파되어 세계 역사를 주도하였고, 그 후 유럽을, 최근에는 미국과 캐나다를 세계 최상으로 키워나갔습니다.

이 복음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우리나라를 오늘의 강대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은 이렇게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바울을 고린도 교인들은 말에 능하지 못하기에 무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럽을 성령으로 불태워 세계 역사의 무대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5-16절)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떠나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우고 있을 때 아볼로가 목회자가 되어 그 교회를 양육했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인들을 잘 훈련한 스승으로서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전도하여 예수 안에서 구원받게 했기에 영적으로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볼로는 훌륭한 스승이고, 그 후로도 그 교회에 올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이 있을 텐데, 그들을 영적으로 낳은 이는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 당시 스승은 집주인의 자녀를 양육하는 학문과 언행이 뛰어난 노예였습니다. 이런 스승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이 아버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16절)고 권면했습니다.

이 말은 아볼로파나 게바파가 아니라 자기파 곧 바울파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했듯이 자신의 그 신앙을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바로 이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내어 놓았습니다.

바울이 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우리도 바울을 본 받아야 합니다. 바울의 헌신적인 믿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위대한 주의 종들이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장기려 장로님 같은 분들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6.25사변 전에 서울에 내려왔다가 자기 가정이 있는 북한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서울대 의대 교수로 계시다가 피난민들이 많은 부산에 내려가 병원을 세워 그들을 위해 평생을 치료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십자가의 나눔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만을 위해서 살다가 죽는 것은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처럼 우리의 것을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복음과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눔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월 초에 실시하는 성만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나눔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나누시기 위해 예수님도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셨습니다.

나눔이야말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김혜자 권사는 인기 여배우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지난 10여년간 소말리아 인도 르완다 방글라데시 등의 빈민촌을 누비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담을 적은 수필집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나눔이며, 이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그 어떤 전쟁과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걸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심으로써 우리가 살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나눔은 생명입니다. 떡이 나누어지고, 포도주가 나누어질 때 거기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나누어져서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수효를 세는 일을 셈이라 합니다. 셈에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은 가감승제(加減乘除)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더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온갖 좋은 것을 더 주십니다. 더하기로 나타나는 복입니다.

두 번째는 빼기로 나타나는 복입니다. 우리가 불의와 죄악을 버린 만큼 은혜로 채워주시는 복입니다.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면 하나님은 새사람으로 입혀주십니다.

세 번째는 곱하기로 나타나는 복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인내로 지키는 자들에게는 복이 최소한 30배요 그 다음은 60배이며 그 다음은 100배입니다.

네 번째는 나눔으로 받는 복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집니다. 남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자는 무한대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복을 이웃에게 나눈 자에게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안겨주십니다(눅6:38). 최고의 복은 바로 나눔이니, 나눔을 실천하여 하늘의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고 주님을 본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사도 바울을 본받는 자, 즉 주님의 복음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어줄 믿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나누어 이 세계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심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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