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금 목사 강남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 2016년 4월 17일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나치스에 의해 점령당한 어느 유대인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독일군은 마을의 주민들을 광장으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한 독일군 장교가 유대인들이 늘어서있는 중앙에서 한 중년 남성을 지목해서 끌어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학교 교사였습니다. 독일군 장교는 그 사실을 알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교사가 신앙을 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장교는 큰 소리로 그 교사를 윽박질렀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을 버려라. 그러면 평생 동안 사는데 필요한 것을 다 주겠다.”
그 유대인 교사는 독일군 장교의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고 “싫습니다.”라며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당황한 독일군 장교는 재차 협박했지만 그 교사의 대답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독일군 장교는 권총을 빼들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본보기로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그 교사는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광장에 모인 유대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자들 중에는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아예 눈을 감아 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더니 다시 그 장교가 큰 소리로 “너의 신이 네 목숨보다 더 소중하단 말이냐? 신을 버리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라며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사는 더욱 단호하게 “싫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난 장교는 교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총성과 함께 총알이 교사의 어깨를 관통했습니다. 총에 맞은 교사는 땅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하나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것은 낮은 목소리였으나 모든 사람들이 아주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 정교는 “우리가 너희 신보다 힘이 센 것을 모르느냐? 너희 목숨은 네가 믿는 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한다. 내가 한 마디만 하면 너를 당장 병원으로 이송해주고 치료해 줄 수도 있고 네 가족과 행복하게 살게 해 줄 수도 있다.”
그러자 그 교사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말을 짧게 내뱉었습니다. “싫습니다.”
장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연속으로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결국 그 교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던 한 사람이 훗날 이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러한 실화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삶을 마감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올 때, 자녀들과 교인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믿음을 고백하고 소망 중에 주님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 안에 거하기 전에 불신앙의 옷, 죄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 64:6).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믿음의 새 옷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 장사되었고,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옛 사람 즉 죄와 불신앙의 삶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옛 사람을 벗는 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반드시 ‘새로운 옷’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골 3:12-13).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그 새로운 옷을 바로 주님이 입혀 주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 61:10)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새 사람으로 거듭난 자를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12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를 택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영원히 사랑하시는데, 우리는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정성껏 단장하듯, 새 사람으로서 합당한 옷을 하나 하나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정말 더러운 죄인들인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거룩한 존재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불의를 행하고 세상 것을 가지고 아귀다툼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런 우리가 입어야 할 ‘새 사람의 옷’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피차 용서하되..”(12절)
새사람에 합당한 옷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서’의 옷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여기에 덧붙여서 ‘의로운 옷’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 19:8).
분명한 것은,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는 더러운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이 새 옷들을 하나 하나 입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쳐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까지도 불쌍히 여기고 온유한 마음으로 오래 참아냄으로써 결국 사랑과 화해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사랑하심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닮은 자들로서 항상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도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자기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한1서 2:16). 그래서 우리는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남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을 용서하기 보다는 악감을 가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모습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마 18:22)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누구의 잘못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께서 나같은 죄인도 그렇게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주님께 배워서 다른 사람을 끝까지 용서해야 합니다.
옷이 흐트러지거나 흘러 내리지 않도록 허리 띠를 하듯이,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된 우리는 앞에서 말한 여섯 가지(긍휼/자비/겸손/온유/오래참음/용서)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사랑의 띠를 매어야 합니다(“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14절).
이 사랑의 매는 줄로 매어야 그 여섯 가지의 옷이 완전하게 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사랑이 없으면 이 여섯 가지 옷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고전 13:1-3).
이렇게 새로운 옷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평강이 그 마음을 다스립니다(15절). 이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심을 믿고 하나님과 화목의 관계가 이뤄진 사람에게 오는 축복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그 마음에 말씀이 가득차야 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16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고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 시간에 말씀 듣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 제자훈련 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가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이런 성경읽기, 성경공부, 제자 훈련 등을 통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 같은데, 변화되지 못하고, 감사와 찬양의 생활로 승화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도리어 말씀이 지식이 되어 교만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풍성하게 거한다”는 것은 많은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말씀이 그 안에 풍성하게 거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뜻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능력이 역동적으로 나타납니다.
장로교 창시자 존 칼빈은 몸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위장장애, 불면증, 담석, 폐결핵 등 여러 가지 질병으로 도저히 무슨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종교개혁에 헌신했습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고 하신 말씀대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 사람이 된 우리는 옛날의 더럽고 낡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라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옷으로 갈아입고,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