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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1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마음이 큰 사람

관리자 2014-08-17 (일) 11:00 9년전 1104  

마음이 큰 사람

고후 6:11-13

 

지난 달 우리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던 목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모여서 목회정보도 나누고 친교도 나누는 자리인데, 이번에는 14가정이 모여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가운데 이미 우리 교단에서 중진이 되어 목회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때 그들은 저에게 “목사님! 우리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목회자는 온 성도들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곧 큰 마음입니다. 그 누구도 풀어주는 마음입니다. 세파에 시달려 위로 받을 수 없는 이들이 목사에게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큰 마음으로 받아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자가 되라”(고전 11:1)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본받는 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귀감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의 학식이나 신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는 면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서로 본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에서 바나바와 함께 다니면서 젊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갔습니다. 마가 요한은 집이 유복한 가정이어서 예수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120명이 모여 성령이 강림하셨던 마가의 다락방이 그의 가정 소유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갈릴리 사람이었으나 수도 예루살렘에도 마가의 다락방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런대로 재력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서 제1차 선교여행에 나섰습니다. 바나바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수행원 자격으로 안디옥을 출발해 구브로 섬까지 동행했으나, 시작하자마자 그 선교 일정이 너무나도 고생스러웠던지 구브로에서 배를 타고 버가에 도착하자마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마가의 귀환은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사역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 보고를 하고,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먼저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기 위해 제 2차 선교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다시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에 대해 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젊은이가 한 번 실수를 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마가를 옹호하였으나, 바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선교 여행에 타격을 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의 주장이 너무나 심해서 바나바와 헤어져,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나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비록 마가 요한이 1차 전도여행에서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를 하기는 했지만, 바나바는 넓은 마음으로 그를 용납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일에 대한 사람들의 순결성을 요구했습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일에 추호도 빈틈이 없어야 하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기에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바울처럼 남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바울의 자세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의 말년에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한 때는 남을 포용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운 채,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많은 경험을 하고 연륜이 쌓인 후에는 예전과 다르게 다른 사람들을 넓게 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아직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좁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의 은사를 많이 받았으나(고전 12:7-11), 아직 신앙적으로는 미성숙한 상태여서 문제와 갈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덕을 끼쳐야 되는데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의 행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방해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도 이런 고린도 교회를 반영하고 있는 점이 많습니다.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는 비록 짧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직 130여년밖에 안되었는데, 세계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많은 신자를 가지게 되었고, 수많은 기독교 인재를 사회에 배출하였습니다. 대다수의 사회 지도층은 교회에서 배출한 인재들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있는지는 자신 있게 말하기가 힘듭니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하기는 커녕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신자들이 흔히 말하기를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똑같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이들인데, 세상 사람들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타락한 도시인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을 때, 그는 세상과 구별되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하나님의 공동체를 꿈꾸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헌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러한 바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헌신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떠난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그들은 바울 사도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보다는 오해하고 비난만 하고 있었으니, 바울의 마음은 상처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바울은 1차 여행을 마칠 때처럼 혈기만 넘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던 때와는 달랐습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역은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와 인도하심에 의한 것임을 깨닫고, 더 이상 인간적인 환경과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넓은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고후 6:11).

여기서 “입이 열리고”라는 말은 아직 미성숙하여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자신의 중심을 토설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감정적으로 멀어졌다면, 아예 관계를 단절하고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치 말썽만 부리는 자식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타이르는 부모처럼 진심을 다해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문제를 일으킬수록 마음이 닫히고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넓어졌으니”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끝까지 고린도 교인들을 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미숙하고 결점이 많아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지만 큰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진심을 담아 편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된 모습이 어디에서 유래하고 있는지 꼬집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령에서 좁아진 것이라”(고후 6:12). 여기서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는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좁은 마음을 가진 원인을 바울 자신이 제공한 것이 아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입만 열면 “바울 때문에”라고 했습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바울에게 떠넘기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바로 고린도 교인들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남탓만 할 때,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간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후 6:13)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고 배척하는 좁은 마음이 아니라, 넓은 마음을 가지고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마음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도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잠언은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라고 했고, 시편 기자는 여호와 경외하는 자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 112:7)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넓으면 그 사람은 큰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마음이 큰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주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고 그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넓어질 수 있는 길은 내 안에 하나님이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면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넓어집니다.

반대로 사람이 마음이 좁아지면 그만큼 부정적이 되고 무력하게 됩니다. 좁은 마음은 멀리 보지 못하고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은 손해볼 일을 유익한 줄 알고 합니다. 심지어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두운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살아도 그의 마음은 기쁘지 않고 항상 자기나 남에게 해로운 일만 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라고 합니다.

 

어떤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너무 근심이 많아 불안해 했습니다. 가족들이 왜 그렇게 불안해 하시냐고 물으니까 그 노인은 자신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노인이 어렸을 때, 그와 가까운 친구들과 동네 한 가운데 있는 네거리에서 놀곤 했었습니다. 그 네거리에는 도로 방향 표시판이 있었는데, 그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친구들과 함께 그 방향 표시판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려 놓았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그때에 장난친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갔을까 생각해보니, 후회가 막심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직접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지만,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없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옳은 길, 즉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삶에 자랑이 있다면 바로 넓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애써왔다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이름이 수잔나인데, 그녀의 자녀 양육법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열 아홉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그 중 한 아이가 같은 질문을 20번이나 반복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잔나는 귀찮아하거나 꾸짖지 않고 20번이나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남편이 수잔나에게 “한 가지를 20번이나 되풀이 해서 가르치면 어떻게 해요?”하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대답하기를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으면, 열 아홉 번은 다 무효될 것 아니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넓은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한 수잔나의 교육 덕분에, 후에 열 아홉 명의 자녀들이 모두 역사에 남는 자식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누구보다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본래 이기적인 존재인 인간이 넓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넓은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분에게 내 마음을 맡기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셔서 크고 위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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