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2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올바른 헌금 > 이사장칼럼

본문 바로가기
법인소식
정기간행물
정보공개
언론보도
이사장 칼럼
 


2014.02.2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올바른 헌금

관리자 2014-02-23 (일) 11:00 10년전 1137  

올바른 헌금

고전 16:1-9

 

어느 나라의 한 왕이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 이름을 넣은 기념 교회를 크게 짓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를 새로 지으면서 왕은 아무에게도 건축헌금을 못하게 엄히 명령했습니다. 그래야 후대에 이 웅장한 교회가 자기가 지은 교회로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교회당이 완공되어 머릿돌에 왕의 이름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그는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나더니 그의 이름을 지우고 그 위에 어떤 가난한 과부의 이름을 새겨 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은 너무 화가 나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교회는 자기가 지었는데, 과부의 이름을 새기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꿈이니까 그러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하도 이상해서 꿈에서 천사가 새겨 놓은 과부의 이름을 찾아봤더니 정말 그런 과부가 있었습니다. 왕은 그 과부를 불러들여 그녀에게 호통을 치면서 “너는 교회를 지을 때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과부는 벌벌 떨면서 겁에 질려 대답했습니다.

“왕이시여,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왕께서 헌금을 못하게 하셨는데 어떻게 헌금을 하겠습니까? 건축 현장에는 접근도 못했습니다. 다만 너무나 교회 건축에 동참하고 싶어서 벽돌을 나르는 말들에게 건초를 주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자신의 과실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석공에게 시켜서 그 교회의 머릿돌에서 자기의 이름을 긁어내고 그 과부의 이름을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 몸부림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현재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큰 기근에 처에 있으니 그들을 위하여 헌금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8에 보면 글라우디오 때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아가보의 예언이 전해지고 있고(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행 11:28), 갈라디아서 2:10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비참한 빈궁 속에 빠져 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흉년이 들은 것 뿐 아니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핍박과 로마 정부의 경제적 수탈로 인해서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인들을 도운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곤궁에 처한 예루살렘 형제들을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교회로서 복음 전파 사역의 중심에 있었고, 거기에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여 그 당시 시리아와 소아시아, 마게도냐, 그리스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고린도교회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환난을 지나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뿐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갈 2:10), 마게도냐와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롬 5:26)에게도 헌금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모으러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계획을 편지로 알렸습니다. 바울은 어디에 교회가 있던 그 교회와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돕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요청한 헌금의 성격은 “성도를 위하는 연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헌금의 방법과 자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고 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일정한 날’을 정하여 준비된 자세로 헌금을 모아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각자 수입에 따라 하라고 했는데, 이는 일부 부유한 이들에게만 헌금하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각자의 능력대로 동참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헌금의 의미는 액수가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마음과 정성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다가, 많은 돈을 헌금한 부자보다 보잘 것 없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두 렙돈이란 보잘것없는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는 생활비 전부였습니다 (눅 21:1-4).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드린 즉흥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헌금보다, 정성스럽게 준비된 한 과부의 헌금이 복되고 귀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헌금은 무슨 회비를 내는 것이나 의무금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그 고마움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라고 했습니다. “각 사람”이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란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의 능력에 따라 헌금을 준비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실로 헌금의 의무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있는 이는 있는 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대로 자기가 얻은 수입에서 정성껏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에서도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제물을 드리는 데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레위기에 보면, 부유한 사람들은 소나 양, 염소로 예물을 드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라도 준비하여 예물을 드리되,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의 마음과 정성이 그만큼 중요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비록 많은 헌금을 드리더라도 정성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주거리가 되고 맙니다.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전 재산을 드린 것 때문에 교회가 사랑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이들은 자기들의 전 재산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전 재산을 정리하여 교회에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살 것이 걱정되어 얼마를 감추고 그 얼마를 가지고 와서 사도들 앞에 드리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고 ‘성령을 속였다’면서 이는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전 재산을 처분하였기 때문에 얼마를 감추었다고 해도 헌금한 액수가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께 거짓말을 함으로써 저주를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가난하다고 하여 빈손으로 나오는 것도, 많은 헌금이라도 정성이 없는 것도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또 바울은 3절에 헌금을 가리켜, “너희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낼 자비로운 '사랑의 연보'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러한 구제의 연보는 대가를 전혀 생각지 않는 선물임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바울은 헌금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베푸신 무한하신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헌금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얼마나 큽니까?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그 존귀한 몸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내가 드리는 적은 물질이 사용된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할진대, 내가 드린 적은 물질, 그것이 아깝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환난과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으로 드린 마게도냐 교회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후 8:1-2)

 

어느 교회에 큰 사업을 하는 장로님이 재정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우리 교회 모 여집사님이 남의 집 일을 거들면서 사는데 한 주에 오만 원씩 주일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너무 무리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주부터는 제가 그 여집사님 대신 낼 테니 무리하면서까지 헌금을 하지 말라고 해주세요.”하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는 장로의 말을 고맙게 여기고, 그 여 집사를 불러 “어떤 장로님이 헌금을 대신 내 준다고 하니, 이번 주부터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그 여집사님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당황한 목사님이 왜 우시냐고 묻자, “제가 비록 남의 빨래를 하고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저는 매주 헌금을 내면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왜 그 기쁨을 빼앗으려고 하십니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는 그녀의 신앙에 감탄하고 자기의 경솔함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재정 장로님에게 말하자, 그 장로님도 자기가 잘못 생각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헌금의 자세입니다. 이런 기쁨의 자세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을 감격하며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헌금을 할 때 자발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니라” (고후9:7)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드리는 것은 드리지 않는 것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금자세입니다.

 

영국의 어떤 교회에서 5살 된 한 소년이 헌금을 했습니다. 헌금 시간에 헌금을 하는데 1페니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꼭 신약성경을 사서 인도에 보내 달라고 지정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이 작은 헌금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조금 보태어 아주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사서 소년의 사인을 받고는 인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잊고 지냈습니다. 20년 후 이 목사님이 인도에 들러 어떤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참 진지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까?" 그때 뜻밖에도 한 선교사가 이 마을을 찾아와서 작은 신약성경 한 권을 건넨 것이 그 마을의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경을 가져왔습니다. 다 떨어지고 남루한 자그마한 신약성경의 마지막 표지에서 20년 전 자기 교회의 5살 된 어떤 소년의 사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물질이 많고 적음보다 정성을 다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쌓이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정성으로 주님께 구별된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19 기독교회관 604호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대표자 : 전병금
TEL : 02-744-1895   FAX : 02-744-1894  고유번호 : 584-82-00066  
604, Korea Christian Bldg., 19, Daehak-ro, Jongno-gu, Seoul, Republic of Korea(Postal Code 03129)
Copyright by 2016 (사)지구촌구호개발연대.   All rights reserved. Produced by 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