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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7.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거룩한 근심

관리자 2014-09-07 (일) 11:00 9년전 1099  

거룩한 근심

고후 7:5-16

 

미국의 위대한 교회 지도자였던 웰치 목사는 101세 생일을 맞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101세 연세에 대해서 두려움은 없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웰치 목사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70세에 은퇴했는데, 그때 늦게나마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제가 과거를 회고해 보니 많은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사실 따지고 보니 제가 날마다 가지고 있던 근심이나 걱정의 대부분은 실제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실제로 생겨나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너무 많은 근심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께 다 맡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걱정 근심 가운데 80퍼센트는 일어날 수 없는 쓸데없는 것이며, 12퍼센트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고, 오직 8퍼센트만이 진정으로 걱정할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나머지 8퍼센트의 걱정 근심도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기도 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라는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기도를 통해 걱정 근심을 극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 중에는 생계 문제를 위한 것도 있지만, 자기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전전긍긍해 하는 것도 많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잘못이 발각될까봐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심을 하면서도 발각되지만 않으면 또 그런 죄를 저지르곤 합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모두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면 매일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 사도에게도 큰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운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고, 심한 분쟁과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근심하는 마음으로 그의 동역자인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디도가 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문제가 더 복잡하게 되어 오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서 고린도로 가는 도중에 위치한 마게도냐까지 가서 그곳에서라도 디도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에 간 바울은 그곳에서 많은 핍박과 내적 갈등으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대한 염려와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바울은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고린도 교회에서 돌아온 디도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습니다. 디도를 만난 바울은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것은 디도를 만난 반가움뿐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바울에게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후 76-7). 바울의 눈물어린 편지를 통하여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핍박도 넉넉히 이겨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고린도 교인들의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고 배은망덕하며 사악하기까지 한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이는 죄인인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타락한 인간에 배여있는 사악한 습성이 저절로 제거되기를 바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극적으로 회개하고 그들의 삶에서 사악한 모습을 제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깊게 자리잡고 있는 사악하고 거짓된 언행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를 받고 자기들의 삶과 죄에 대한 근본적인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죄에 대한 근심이 결국 그들로 하여금 전인적인 회개를 낳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회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을 보여줍니다. 이제 그들은 ‘죄를 짓더라도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죄를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임을 깨달았습니다.

 

지난번 ‘한국 기독교 목회자 협의회’(한목협)에서 글로벌 리서치에 의뢰하여 조사, 발표한 것에 의하면, 무종교인들이 지적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언행 불일치”였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들이 여기에 근심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일제 시대의 한국의 지성인들에게 가장 희망적인 종교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사상적 토대는 탁월한 도덕성과 해방적 구원사관에 입각한 기독교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고, 많은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귀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박해를 받던 초대교회의 순교신앙을 이어받아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 나갔습니다. 이러한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등불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탁월한 도덕성과 십자가 신앙에 입각한 이타적 사랑은커녕, 세상 사람들이 언행불일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손가락질 하고 있으니, 우리는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이 문제를 근심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근심은 할 필요가 없는 근심이지만, 이러한 신앙적인 근심은 거룩한 근심이 될 것입니다. 이런 근심을 통해 한국교회의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보통의 성도들은 이러한 한국교회를 위한 근심을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런 주님의 몸이 세상에서 맛잃은 소금이 되어버리는데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몸의 한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한국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가정, 내 사업, 내 직장 외에는 무관심한 이기적인 신앙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회개하기 전의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의 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그들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영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더럽고 추한 자신들의 모습에 갈등하였고 근심하였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 끌려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러한 죄악된 자신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있다는 것을 직시했습니다. 밝은 빛 아래서 사물의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신들의 부패하고 악한 모습을 보고,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꾸러져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진리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어지럽힌 이들을 벌하는 자정 노력을 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바울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9)

바울을 그렇게 비난하고 욕했던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인들이 “두려워 떨므로” 바울을 영접하였습니다. ‘두려워 떤다’는 것은 진리에 대해서 경외심에서 나온 겸손의 극치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또한 이렇게 해야 합니다. 물질적 탐욕에 빠져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교회답지 못했던 모든 이기적 탐욕과 비신앙적 행태들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변화는 인위적으로 하거나 쇼맨십으로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 모습을 서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회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한국교회에 이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한국교회 성도들이 거룩한 근심을 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지난 5월, 한국교회의 원로목사님들이 모여서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면서 회개 기도회를 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교회 원로 목사님들의 ‘회초리 기도회’는 세월호 참사와 한국교회의 영적 침체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자는 취지로 전국을 돌며 그와 같은 ‘회초리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에게서 얼마 전에 소포가 하나 와서 받았는데, 그 안에 회초리 하나가 들어있었습니다. 아마 그 분들이 교계 지도자들에게 회개하라고 보낸 회초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회초리를 받고 ‘그 어른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하는 생각에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회초리 기도회’를 두고도 논란이 많습니다. 저마다 “나부터 회개합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는 말들을 쏟아냈지만, 정작 회개의 내용은 전혀 없고, 립서비스만 나열한 ‘회개 퍼포먼스’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무슨 쇼가 아닙니다. 방송과 언론에 ‘우리가 대표로 회개 기도회 합니다’라고 떠들어 가면서 ‘회개쇼’를 한다고 이 나라와 민족의 암울한 현실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나 한사람’부터 바뀌어야 하겠지만, 자칭 종교 지도자들이 회초리 들고 나서는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섣부른 회개보다는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철저한 현실파악이 먼저 필요합니다. ‘회개’보다 ‘진상규명’이 먼저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회개도 가능합니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일에 대해 우리 일이 아니라고 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실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의무입니다.

 

항해 중에 있는 배가 암초를 향해 항진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키를 돌려서 배의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것은 ‘죄와 사망’을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돌려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회개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죄에 빠져 있는지, 곧 무엇으로부터 회개해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셨고 그것에 맞서 성령과 말씀으로 싸우셨습니다. 오늘날 죄악된 사회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회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자기 성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근심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전인적인 회개를 해야 합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고쳐야 합니다. 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의 말씀처럼 세상적 근심이 아닌 거룩한 근심을 해야 합니다. 거룩한 근심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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