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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1.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자랑스러운 성도

관리자 2014-08-31 (일) 11:00 9년전 1070  

자랑스러운 성도

고후 7:1-4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손주 자랑은 이미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손주 자랑하려면 돈 만원씩 내고 하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가 무엇을 하든지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저도 저의 손주들도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아이들인데도 자랑하고 싶은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에 유치원에 다니는 막내 딸의 아이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무슨 책을 읽었느냐”고 했더니 위인전기를 읽었다고 합니다. 김구, 안창호, 윤봉길, 안중근, 장기려, 베토벤, 모차르트 등 많은 위대한 선각자들의 책을 읽었다고 하길래, 그 분들에 대해서 물었더니, 책의 내용을 단편적으로나마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손주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교회 다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는 손주들이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것도 자랑할 만하겠지만, 그 아이들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자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본문을 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에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자신과 같이 장막 만드는 직업을 가진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 동업을 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고, 그 결과 디도 유스도와 회당장 그리스보 가족이 주님을 영접하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면서 고린도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행 18:1-11). 바울은 거기에서 일 년 유 개월 동안 머물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곳을 떠난 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회 내적으로 윤리적, 신앙적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의 영적인 스승인 바울에 대한 오해와 비난이 난무했습니다.

본문 2절에서 바울은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2절)고 했는데, 이러한 바울의 입장 표명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 어떤 비난을 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첫째,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불의하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어느 지역에서는 오래 머물기도 하고, 어느 곳에서는 금방 떠나기도 했는데, 이는 바울은 공정치 못하고 의롭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비방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이 자기를 잘 대우해주는 지역에서는 오래 머무르며 선교활동을 했지만, 별로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금방 떠나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사도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바울이 남을 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의 비난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생명 걸고 지켰는데, 특히 유대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하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바리새인 출신인 율법주의자들은 할례 및 율법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이방인의 선교사로 나선 바울은 할례를 비롯한 유대의 율법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전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의 선교는 율법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하며 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바울이 성도들의 것을 속여 빼앗았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울이 기근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고린도 교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모금한 것을 두고, 바울이 헌금을 강요하여 자기가 착복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청렴결백한 그리스도의 사도였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선교 사역에 몸 바친 바울에게 헌금을 착복했다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바울의 입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바쳐 헌신적으로 섬기며 교회의 터전을 이루어 놓고 떠나온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러한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을 때, 인간적으로는 서운함과 노여움이 없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배은망덕한 비난을 듣고도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그들에게 애틋한 사랑을 가지고 권면하였습니다. 바울도 인간인 이상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사태를 바라보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인간적인 부족함과 배은망덕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섰던 자신의 모습에 비하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오해와 비난은 얼마든지 감수하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신도 주님께서 사랑하셔서 택해주시고, 사도로 삼아주셨는데, 그런 자신에 대해 오해와 비난을 한다고 고린도 교인들을 외면하는 것은 바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한 애틋한 연민을 안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안에 바로 서기만을 바라고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당사자로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고린도 교인들을 영적으로 낳은 부모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부모가 그 자녀를 포기할 수 없듯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서운한 마음보다는, 영적인 부모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에 대한 사랑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그에게 오해와 배신을 일삼을망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고후 7:3)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말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을 ‘동일한 생명체’ 혹은 ‘공동운명체’로 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몸의 일부라고 여기듯이,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동일한 생명이기 때문에 결코 떼놓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관계였습니다. 그런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비난했다고 그들과 단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한탄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5).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사 49:15-16).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자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부모의 사랑 같은 것입니다.

 

1865년 영국에서 한 겨울에 어떤 여인이 생후 20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기를 안고 추위에 떨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당시 그녀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자신의 옷을 끌어 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옷을 헤쳐 보았더니 거기엔 갓난아기가 있었고, 놀랍게도 아기는 어머니의 옷에 감싸인 채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아이는 얼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가정에 입양된 그 아이에게 사람들은 어머니의 엄청난 사랑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생명을 버린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며, 그 아이는 독학으로 치열하게 공부해서 27세의 나이에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노동자를 위해 살며, 국민보험법과 실업보험법 등을 성립시키는 등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기초를 확립시켰습니다. 자신이 받은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그대로 나눠준 것입니다. 그가 바로 1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수상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입니다. 한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이 한 아이의 생명 뿐 아니라, 역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에 빠진 인간을 포기하거나 잊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그 크신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같은 공동운명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옛 사람은 주님과 함께 죽었고 이제 새사람으로 함께 산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또 바울은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후 7:4)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담대한 것도 많고”라는 말은 “크게 신뢰하고”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고린도 교인들에게 문제가 많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그들을 끝까지 신뢰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우리를 향한 신뢰를 거두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믿고 기다려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주십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그런 고린도 교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을 오해하고 비난했던 고린도 교인들이었지만, 그들이 그 잘못을 뉘우치고 바울에게 돌아왔을 때, 바울은 그들의 지난 일들에 대해 책망치 않고, 돌아온 그 자체를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손주들의 말과 행동이 조금만 기특해도 자랑으로 삼고, 부모들이 비록 못난 자식이지만, 자기 자식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자기 자녀들을 자랑하는 것은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들을 믿고 그 가능성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부족한 고린도 교인들을 신뢰하고 자랑스러워 한 것도 바울이 그들을 영적으로 낳았기 때문이고, 그만큼 그들을 한 없이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바울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눅 15:11-32). 거기에서 아버지는 비록 집을 떠난 둘째 아들로 인해 노심초사했지만, 그가 다시 돌아올 때 맨발로 뛰어나가 맞이할 만큼 기뻐하였습니다.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친다”는 말은 바로 이와같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얼마나 위로와 기쁨이 있겠습니까?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바울에 대한 오해와 적대행위를 했던 것을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얼마나 위로가 되고 기뻤겠습니까? 바울은 그런 위로와 기쁨으로 환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지금까지 믿음으로 산다고는 했지만,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주님 앞에 부족하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들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무한히 신뢰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대하고 계십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께 돌아가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신뢰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주님께서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고,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을 걸고 복음 전도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전달되어 바울이 그렇게 원했던 복음전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이번 총동원 전도주일에 한 생명을 구하는데 나서야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믿어주는 만큼 우리도 주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때문에 주님이 위로와 기쁨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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