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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9.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관리자 2014-02-09 (일) 11:00 10년전 1090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20-28

 

저희 아버지는 우리 동네에서 농사가 잘 안되기로 유명한 밭을 값싸게 사서 농사를 짓게 되었는데 그 땅은 잡초가 너무 우거졌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아버지는 그 땅을 갈고 또 갈고 퇴비를 하고 또 퇴비를 해서 좋은 땅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땅으로 만드는데 3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의 인품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고 또 말씀을 듣고 또 행할 때 언젠가 우리의 인품이 변하여 하나님의 사람다울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쓴 마가 요한도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며, 인간관계도 좋았습니다. 그는 바나바의 생질이었고 그래서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초대교회의 최고의 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의 일원으로 선교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장차 초대교회의 차기 지도자가 될 만한 옥토(沃土)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가의 마음속에 잡초가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주장만 하게 되었고 사도들을 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점점 굳어진 그는 팀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선교팀을 배반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마가에게 기대를 많이했던 바울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에서 쉽게 이탈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을 배반한 것이고 주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바울의 선교여행에 바나바는 마가를 용서하고 데리고 가자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할 수 있다면서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 일로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다투고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한편, 마가 요한은 바울의 거절을 겪었으면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크게 뉘우치고 자기 마음의 밭을 다시 갈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믿음의 확신이 없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획기적으로 변화된 것처럼, 그 또한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철저히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자 바울은 후에 그를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디모데가 자신에게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

 

훗날 마가는 알레산드리아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마가복음을 써서 기독교 역사에 엄청난 공헌을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치 ‘묵은 밭’과 같은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 곧 예수의 부활을 믿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부활로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안한 신앙으로 인해 마치 ‘묵은 밭’과 같은 허무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기 자신을 ‘묵은 밭’이라고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묵은 밭이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가처럼 이제라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체험하고 묵은 밭을 갈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앞서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도덕적 문제 즉, 성적인 문제, 우상제물 문제, 무질서한 은사 및 예배 문제에 대해 올바른 가르침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이러한 도덕적인 문제가 실상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15장에서 집중적으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부활’에 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신의 부활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우리의 부활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첫 열매”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은 큰 명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이 절기에 마침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추수시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율법에 “너희는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레 23:10-11)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첫 보리를 거두어 성전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거기서 보리알이 상하지 않도록 연한 방망이로 떨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곡식알이 불이 닿을 수 없도록 구멍이 뚫린 냄비에 넣고 볶고, 껍질을 바람에 날려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보리방아를 찧어서 그 가루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것이 ‘첫 열매’였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어들일 추수의 표시였는데, 바울은 이 개념을 사용하여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다가올 ‘성도들의 부활’의 표시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앞으로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표시라는 것입니다. 첫 열매를 정식으로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햇보리를 먹을 수 없었는데, 생명의 추수 또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의 연관성에 대해 ‘첫 열매’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바울은, 이제 구약의 사건으로 예수의 사건을 설명하는 ‘모형론’으로 같은 요지를 반복 설명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21-22)

 

창세기 3장에 보면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을 아담의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아담의 죄에 대한 결과이고 형벌입니다. 모든 인간은 글자 그대로 아담과 함께 죄를 범했다는 것이 유대인의 역사관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집단적 역사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아담과 함께 죄를 범했다고 믿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은 아담입니다. 그 안에 모든 인간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범할 때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로마서 5장에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이런 사상은 개인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 나라 사람에게는 아주 생소할 것입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지은 죄는 그들이 문제이지, 내가 죄지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집단적 역사관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한 것같이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었던 것같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정복했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8)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의 사슬로 하나로 묶여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는 ‘의로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하나로 묶여있던 사슬을 끊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함께 죄에 묶여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 안에서 영원한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부활이 나에게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고 단언하면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열매’는 부활 곧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정복시켜야할 ‘종말론적인 적’으로 의인화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사 25:8)라고 증언하고, 바울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23절부터 '군대 개념'으로 부활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3-26)

 

23절에 ‘차례’라고 번역된 말은 ‘순서’ 혹은 ‘계급’이라는 의미의 당시 군대 용어입니다. 마치 전투에서 선두에 선 선봉장이 적장을 물리치면,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승리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먼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할 것이며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원수인 사망이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어서 부활하셨고, 마지막 날에 전 이류가 빠짐없이 부활할 것인데, 우리 성도들의 부활과 불신자들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도들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영원한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기 위한 부활이지만, 불신자들의 부활은 심판을 받기 위한 부활이 될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이 뿐만 아니라, 그날에 세상의 모든 지배 질서를 뒤집어엎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 15:24)

 

여러분들은 영원한 형벌의 부활에 참여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부활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어 우리의 삶을 주님을 위해 완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만이 영원한 부활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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