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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6.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주를 사랑하라

관리자 2014-03-16 (일) 11:00 10년전 1087  

주를 사랑하라

고전 16:21-24

 

빌리 그래이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 가운데 자식을 못 낳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그 가정에 고아원에서 한 아이를 입양하도록 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 교인은 부유해서 입양한 아이가 행복하게 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뻐했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그의 새 부모들과 함께 그가 앞으로 사용할 방으로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네 침대란다. 이건 네가 실컷 가지고 놀아도 좋은 장남감이야. 이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이 얼마든지 있어. 네 마음대로 꺼내 먹어라.”

이 말을 듣더니 그 아이가 말했습니다.

“더 없나요?”

아이의 반응에 의아하긴 했지만 자상하게 말했습니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니?”

“저에게는 이런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사랑이에요. 만일 이집에서 사랑 받을 수 없다면 저는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갈래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집은 ‘하우스’(House)가 아니라 ‘홈’(Home) 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 홈입니다. 홈은 부부의 사랑이 있고,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가정이란 그 아이에게는 고아원과도 같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사랑을 배우고, 부모가 자기에게 베풀어준 사랑을 받으면서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남을 쉽게 사랑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 만이 사랑을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아로 자랐는데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있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으면서도 남을 위할 줄도 모르고 사랑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랑을 받되 ‘어떤 사랑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랑 중에서 최고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본래 죄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자들인데, 하나님은 이런 낮고 천한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우리 대신 그 죽음의 형벌을 받게 하시고, 그를 믿는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입니다. 단지 영원한 형벌 가운데 있는 죄인들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희생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으니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더 큰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큰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고아로 자라나 부모로부터 사랑을 못받고 자란 사람이나, 배우자의 성격이 비뚤어져서 사랑을 못받은 사람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하도록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나를 위해 직접 자기 몸을 희생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희생하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천박한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우리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배척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엄청난 죄이고 저주를 받을 일입니다. 사랑을 배척하는 죄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 전, 설에 90대 독거노인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에게는 어엿한 일곱 자식이 있는데, 설에도 찾아오지 않았고 불쌍하게 혼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 보도를 본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찾습니다.

이처럼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은 부모를 배척하는 죄입니다. 자식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부모의 사랑을 외면한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 주님의 사랑을 저버린 것은 얼마나 큰 죄입니까?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주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시고 이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이런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겠습니까? 부모가 자녀를 무조건 사랑하듯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을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주님의 사랑을 배척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히 2:3)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구원받은 일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등한히 여기는 것’도 ‘배척하는 것’ 못지 않게 악한 태도입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속죄의 사랑은 너무 큰 것이기 때문에 등한히만 여겨도 죄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기는 믿어도, 신앙생활을 하기는 해도, “등한히” 여기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최고의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21:33절 이하는 ‘악한 포도원 일꾼의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놓고 타국에 갔는데 열매를 거둘 때가 되자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농부들이 배은망덕하게도 종들을 잡아 심히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돌로 치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어찌 이런 일이 있는가’ 해서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보냈는데 그들 까지도 그렇게 했습니다. 나중에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건만, 농부들이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 유산을 차지하자”고 하면서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고나가서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들처럼,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의 아들까지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등한히 여긴 자에게는 오직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마 21:40, 43)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보통 다른 것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 자체가 큰 저주를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모르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이는 그것 자체가 저주받은 자인 것과 똑같습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통 ‘돈’을 사랑합니다.

성경에서 종종 돈은 단순히 화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맘몬(mammon) 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돈을 숭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가리켜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또한 돈을 사랑하는 것을 타락한 자의 표징이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 엘리사에게는 ‘게하시’라는 종이 있었는데, 그는 돈 때문에 망했습니다. 또 바울의 제자인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바울을 떠났다고 했는데(딤후 4:10), 그가 세상을 사랑한 것은 돈을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또한 쾌락을 사랑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를 ‘살았으나 죽은 자’(딤전 5:6)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자들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 이후에 나오는 인류의 타락 기사와 사사기 시대의 죄악은 모두가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 죄의 근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교회를 위협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에 대해 강하게 경고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6:22)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앞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안디옥에서 활동하던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처음 붙여진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도’라는 우리 교회 표어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얼마나 닮아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 점점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진정한 이웃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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