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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1.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주의 길을 예비하라

관리자 2014-12-21 (일) 11:00 9년전 1014  

주의 길을 예비하라

눅 3:1-6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콜로라도 덴버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지역 신문에 여섯 살 된 폴 헤일리라는 소년이 불치의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죽기 전에 미국 대통령을 직접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기사가 난 것을 보았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그 신문을 보고는 그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하였습니다. 8월 어느 날, 주일날 아침에 대통령의 리무진이 헤일리의 집 문앞에 섰습니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방문을 받은 소년의 아버지인 로널드 헤일리는, 아직 수염도 깎지 않고 푸른 작업복을 입은 채 당황하면서 대통령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대통령은 폴을 만나 함께 운동도 하고, 대통령의 전용 리무진을 구경시켜 주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폴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고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소년의 아버지 로널드는 대통령이 돌아간 다음에, “그날 좀 일찍 일어나서 면도를 하고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더라면 대통령을 정중하게 맞이할 수 있었을텐데...” 라고 하면서 두고 두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의 후회는 잠깐이지만, 만일 우리가 준비하지 않고 우리 주님을 만난다면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억하고,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까를 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데,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출생한 세례요한은, 사역을 수행하기 전까지 요단 부근의 광야에 머물면서 금욕적이고 청빈한 수도자적인 삶을 살면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의 종으로서 준비하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사역에 나섰습니다. 예수보다 먼저 온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말하며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요청은 오늘날 우리를 향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할까’ 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의 제사장직은 세습직이기 때문에, 세례 요한도 마땅히 제사장의 직분을 배워서 감당해야 되었습니다. 당시 종교인의 지위는 대단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구별되어 있지 않은 유대사회에서의 제사장직은 존경받는 자리이면서 생활도 안정되어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더욱이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훌륭한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된다면 그 또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뿌리치고,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준비를 위해 제사장의 길을 가지 않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사람으로서, 광야에서 금욕적이고 청빈한 수도사적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런 준비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소명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2).

하나님은 그를 메시야의 오는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쓰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선자자가 700여 년 전에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사 40:5-6, 눅 3:4-6).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 곧 선지자의 길은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제사장으로서의 안정된 길을 마다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선지자의 길을 가는 것은 어쩌면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것에 현혹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사람으로서, 안정된 삶이나 세상적인 성공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추구하였습니다. 후에 이러한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께서 평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눅 7:28)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 세례요한의 인물됨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직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 일에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세상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물질, 명예, 권력, 쾌락 같은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모두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처럼,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가서 6장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정의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것을 깨달았던 세례 요한은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광야에 나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세례요한을 통해서 모든 백성들이 예수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눅 3:4).

고대사회에서는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그 행렬이 순탄하게 갈 수 있도록 미리 도로를 정비 하곤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를 염두에 두고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모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서 먼저 거칠고 메마른 심령과, 뒤틀리고 왜곡된 삶의 길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고향인 군산에 비행장이 있었는데, 하루는 군산비행장을 통해서 그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했습니다.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온 거리는 환영인파로 가득 찼습니다. 학생들도, 학교마다 동원령이 내려진 상태여서, 수업도 안하고 환영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거리를 가득 메운 환영인파는, 손에 태극기를 들고, 그것을 휘날리며 연도에 서서, 대통령을 환영하였는데, 참으로 그 환영행렬은 대단했습니다.

별 것 아닌 사람도, 조금만 지위가 높으면 이렇게 환영을 받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온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일이었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인용한 이사야 선지서에는 메시야의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서,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해져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짜기’, ‘모든 산과 언덕’, ‘굽은 것’, ‘험한 길’은 죄악에 침윤(浸潤)되어 있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① 먼저, ‘깊은 골짜기’란 ‘사망의 골짜기’로서, 죄악에 침윤되어 있는 인간의 마음의 골짜기입니다. 죄악으로부터 비롯된 ‘열등감’과 ‘소외감’과 ‘허무감’ 등은 인간을 파멸로 몰아갑니다. 이로 인해 모든 일에 무력감에 빠져 삶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오늘날 자살자가 속출하는 현실도 이러한 인간소외 때문인데, 이런 인간 소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서 오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메울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의 골짜기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피로써만 메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온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골짜기가 그리스도로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도록 힘써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② 그리고 ‘모든 산과 언덕’은 마음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18)라는 잠언의 말씀도 있는데, 이런 교만에 빠지면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내세우게 됩니다. 이런 교만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 중에는 자기 교만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교만병’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울 때에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즉 사람은 신앙으로만 자기 자신을 낮출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세상에서 인정받고 성공하면 교만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이 그렇게 인정받고 성공했다는 것을 잊은 것입니다. 교만은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온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시지 않고, 자기를 비워 사람같이 되었으며, 십자가에 죽어 인간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바울은 “너희 안에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빌 2:5). 이런 주님을 믿고 본받는 사람은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될 때, 우리 안에 있는 교만의 산과 언덕이 낮아질 것입니다.

 

③ 또한, ‘굽은 길’과 ‘험한 길’은 인간이 사악하고 허탄한 마음, 즉 분노와 투쟁과 증오의 포로가 되어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히브리어에서 “굽었다”는 말은 “속인다”는 의미이며, “험한 길”이란 “모든 종류의 악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하는데, 이것이 “곧아지고” “평탄해진다”는 말은 “정의롭고 공정하게 되며” “순결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불의하고 사악한 심성을 회개하여, “정의롭고, 공정하며, 순결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역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주를 맞이하기 위해 이렇게 준비할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눅 3:6). 즉 우리가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주의 길을 예비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여전히 메워지지 않은 ‘골짜기’가 없습니까? 우리 안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산과 언덕’은 없습니까? 우리 안에 ‘굽어지고 험한 길’은 없습니까? 이사야와 세례 요한의 외침처럼, 우리 안에 있는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이 낮아지고, 굽은 길이 곧아지며, 험한 길이 평탄해지는 성탄절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목도하는 성탄절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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