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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3.강남교회 주일 낮예배 설교 - 하늘을 향하여

관리자 2014-07-13 (일) 11:00 9년전 1050  

하늘을 향하여

고후 5:1-10

 

흔히 인간을 ‘만물의 영장(靈長)’(Man is the lord of the creation)이라고 합니다. 인간이야말로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이 동물만도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동물들은 일단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을 것에 욕심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사나운 사자나 호랑이도 배가 부르면 바로 앞에 토끼가 지나가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흔히 먹는 것을 탐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알려진 ‘돼지’도 위장의 크기에 80%만 먹으면 포만감을 느끼고, 더 이상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돼지는 결코 과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정량의 100%를 넘게 먹고서도 과식하는 건 ‘사람’ 뿐이라고 합니다. 저도 다른 것은 절제를 잘하는데 먹는 것은 절제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혹시 누가 대접을 할 때 그만 과식을 하여 소화하는데 상당히 불편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과식을 해서 잠도 못자고 숨도 못쉴 때는, ‘어째 내가 돼지만도 못한가’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욕심을 내는 것은 음식만이 아닙니다. 동양철학에서는 인간에게 다섯 가지 욕심, 즉 오욕(五慾)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색욕(色慾)입니다. 이밖에도 권력욕, 소유욕 등이 있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과도하게 욕심을 낸다는 것입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는 속담도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다”는 말은 욕심을 채우려는 것으로는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과식을 해서 배가 부를 때보다, 뱃 속이 적당히 비어 있어야 편안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욕심을 비울 때, 마음의 안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흙에서 나온 것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비롯한 모든 것은 ‘땅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된 것은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갔을 때입니다. 즉, 하늘의 생기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땅의 것’도 먹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있는 영이 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신령한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은 땅의 것으로 지어졌지만 오히려 ‘땅의 것’은 절제하고, 그 빈자리에 ‘하늘의 것’을 채울 때,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땅에 있는 장막 집”(earthly tent)“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eternal house in heaven)을 비교하며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참된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였던 바울(tentmaker)은 자신에게 익숙한 ‘장막’을 인간의 몸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은 곧 인간의 육신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장막이 무너지면”이라는 말은 인간의 육신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장막(tent)은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은 임시 거처와 같다는 것입니다. 장막이 무너진다는 것은 인간의 몸이 죽는다는 의미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임시 거처인 장막을 철거하고, 본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듯이, 인간의 몸이 죽으면 영원한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고후 5:1)

이 말씀은, 주의 재림 이전에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하여 재림을 경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염려도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주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손수 지으신 집을 준비해 주시는데, 그 집은 이 땅에 있는 장막 집 같은 임시집이 아니라 영원히 살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장막 집은 흙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썩기도 하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어진 우리의 육신도, 세월이 지나면 병들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세속적인 욕망에 빠져 죄와 사망으로 허우적거립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하늘 나라에 예비된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바울은 환상을 통해, 그 나라를 가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2-4)

 

바울은 자신이 본 그 나라가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사모하여 차라리 자신의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빌립보서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빌 1:23).

 

여기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바울의 말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덧없게 여기는 허무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너무나도 원하는 심정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이 더 사모했던 것은 주님이 재림하시기전에, 우리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제압하고 영원한 몸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바울은 죽음을 맛보거나 혹은 맛보지 않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우리에게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시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바울은 영광스런 그 나라를 확신했기 때문에 아무리 무서운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든지, 천국에 가든지, 자기 중심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그 어떤 도전과 위협도 다 이기며 나가야 합니다.

 

에녹은 이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고(창 5:24, 히 11:25), 엘리야도 주의 일을 하다가 홀연히 승천했습니다(왕하 2:11). 이 두 사건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해방 받고 영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상에 남아서 사는 유일한 이유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기를 원했던 것은 그 나라가 좋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며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하면 이 땅에 살아도 좋고 죽어서 그 나라에 가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를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선교사 가운데 중국 선교사로 갔던 앤 월터 펀이라는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선교사를 자원하여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중국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한 곳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앤의 어머니는 딸의 안전이 걱정되어 큰돈을 주고 '안전하다(safe)'는 한마디만 전보로 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얼마 후에 앤에게서 전보가 왔습니다. 그런데 딸이 보내온 전보에는 어머니가 기다리던 '안전하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대신 거기에는 ‘즐겁다(delighted)’는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이 먼저 기뻐하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의 일을 기쁘게 감당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결핍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바울의 삶을 보아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먼저 ‘그 나라’를 바라보았기에, 그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난관에 부딪혀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빠져 실족하지도 않습니다.

 

웰치(Welch)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주스가 있습니다. 이 포도주스는 웰치라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원래 이 사람은 아프리가 선교사로 가려고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신체검사를 해보니 자기 부인이 아프리카 기후에 견딜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실망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결심하였습니다. 선교사로 가지 못한다면 돈을 벌어서 선교사의 일을 돕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치과 의사로서 부업으로 무알콜 포도주스를 만들어 교회 성찬용으로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그 사업을 물려받아 열심히 일을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위대한 웰치 포도주스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버는 돈마다 10의 5정도를 다 선교 사업을 위하여 드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때는 세상적인 것을 다 가지고 살았던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천국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 후에는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사람은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곧 ‘하늘의 신령한 것’을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감으로써, 이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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